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재성] 독일에선 매주 월드컵을 경험한다

--이재성 축구

by econo0706 2022. 9. 23. 00:09

본문

2022. 09. 05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뛴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주 이런 곳에서 뛰면 얼마나 좋을까?’

관중이 꽉 찬 경기장. 90분 내내 멈추지 않는 함성. 처음에는 긴장감이 고조됐다가, 공이 움직이는 매 순간에 울려 퍼지는 환희와 탄식에 소름이 돋다가, 점점 몰입도가 높아지더니, 나중에는 방전된 줄 알았던 에너지가 다시 생기는 기분이었다. 

90분을 하얗게 불태운 후에 환호하는 관중석을 다시 올려다봤다. 이런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나 보다. 

자철이 형은 그런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분데스리가는 매주 이런 월드컵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뛴다”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내 마음이 독일로 향하기 시작한 건. 

그리고 난 지금 그 독일에 있다. 관중의 함성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 매주 경기를 뛴다. 이번 칼럼을 통해서는 내가 경험한 분데스리가의 뜨거운 분위기에 대해 공유하려 한다. 

 

*

 

어릴 적 TV를 통해 해외 축구를 즐겨 봤다. 선수들도 멋지지만, 경기장 분위기도 어린 내게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축구를 보기 위해 저곳에 모여있다니.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머플러를 두른 채 뜨겁게 응원하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프로 선수가 되기 전 그런 비슷한 장면 속에서 뛴 경험이 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이다. 우리 학교는 일 년에 한 번 아주 중요한 경기를 열었다. 연세대학교와 하는 정기 고연전이다. 대학생이었지만 프로 경기 못지않은, 어쩌면 프로 경기보다 더 큰 응원을 받으며 뛸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수많은 관중 앞에서 뛴 경기였다. 학우들의 함성과 응원이 얼마나 컸는지, 가까이에 있는 동료와의 소통도 힘들 정도였다. 정말 큰 함성이었다. 양 팀 학우들의 열띤 응원 속에서 나는 골도 넣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관중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직 프로가 되기 전이었고, 공 차는 게 마냥 즐거웠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을 통해 관중이 꽉 찬 경기장에서 뛰는 게 어떤 기분인 지 제대로 경험했다. 경기 시작 전 라커룸에서 나올 때부터 느껴지는 함성이 주는 울림, 경기 후에도 멈추지 않는 열정적인 응원에 계속 소름이 돋았다. 자철이 형이 매주 이런 분위기 속에서 뛴다는 게 부러웠다. 

유럽 진출을 앞두고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그중 나는 독일을 선택했다. 홀슈타인 킬을 당시 지도했던 팀 발터 감독님의 진심이 전해졌고, 2부 리그를 통해 1부 리그로 진출하면 되겠다는 확신도 섰다. 자철이 형이 내게 했던 그 한마디도 독일행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리그 개막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얼른 열기를 느껴보고 싶어서. 

독일 진출 후 가장 처음 뛴 경기는 함부르크 원정이었다. 함부르크는 1부에서 강등된 후였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2부 리그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리그 개막전이 공교롭게도 지역 라이벌인 킬이었고, 경기는 금요일 밤에 열렸다. 아직 분데스리가가 개막하기 전이라 독일 축구의 모든 관심은 다 우리의 경기에 쏠렸다. 괜스레 부담도 됐다. 데뷔전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함부르크 홈구장으로 향했다. 경기장에 도착하는 순간, 함부르크 팬들은 우리 버스를 향해 야유와 욕설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기보다는 얼떨떨했다. 여기가 유럽이구나.

경기장에 들어섰다. 이럴 수가. 6만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입장하는 내내 나의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몸에 있는 모든 감각이 아주 활발하게 살아있는 기분이랄까. 놀이공원에 들어가는 신난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내가 어릴 적 TV를 통해 본 그 ‘해외 축구 경기’ 속에 내가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때 느낀 그 감정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어떻게 경기를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경기가 끝난 후에야 와, 앞으로 계속 이런 월드컵 같은 분위기 속에서 뛰겠구나, 하고 실감했다. 

팬들과 같이 뛴다는 느낌도 받았다. 독일 서포터즈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서서 응원을 한다. 놀랍다. 2시간 가까이 앉지도, 쉬지도 않고 응원한다. 우리 팀 팬들이 계속 서서 목청을 높여 함성을 지르고 방방 뛰며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없던 힘까지 샘솟는다. 마치 경기를 함께 뛰는 열두 번째 동료 같다. 그래서 팬들을 열두 번째 선수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무관중 경기가 열리며 너무 아쉬웠다. 프로가 된 이후 관중이 없는 경기장에서 뛰는 날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염병 때문에 앞으로 무관중 경기를 치러야 한다고 했을 때 사실 쉽게 믿지 못했다. 그게 가능할까? 하물며 연습 경기에까지 팬들이 찾아오는데 말이다. 오늘은 어떤 분위기일까, 어떤 응원을 받게 될까 늘 기대하며 경기장에 갔는데 이제는 팬들이 없었다. 

경기장에 가면 장내 아나운서가 관중을 환영하는 인사가 쩌렁쩌렁 울리고, 버스 앞에서 기다리는 팬들과 인사를 하는 게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우리를 보고 기뻐하는 팬들의 표정을 보며 힘을 얻는다. 마치 유령도시 같은 경기장에 도착해서 텅 빈 관중석을 보자니 마음이 공허했다. 경기를 위해 몸을 푸는데 그냥 훈련하는 것 같았다. 경기장 위에는 선수들과 심판, 경기 진행을 돕는 스태프들뿐이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뛰고 있는 걸까? 누굴 위해 이렇게 뛰는 걸까? 연습 경기를 치르는 기분이었다. 

팬이 없으면 스포츠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에게 팬의 유무는 정말 큰 차이가 있다. 팬들이 지르는 함성, 아낌없이 보내오는 박수, 나를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같은 경기여도 몰입도가 달라진다. 경기에 정성을 더 쏟게 한다. 내 안에 있는 힘을 남김없이 쏟아붓게 만든다. 우리 팀을 위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기꺼이 돈을 지불해 경기장에 오는 팬들 생각을 하면 정말 힘을 안 내려야 안 낼 수가 없다. 

아직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 홈구장의 열기를 느껴보지 못한 게 아쉽다. 분데스리가 진출 후 가장 기대한 경기장이었다. 분데스리가 최고의 팀들은 어떤 응원 속에서 뛰는지 궁금했다. 내가 원정을 갔을 때는 코로나19로 일부 관중만 허용됐던 터라 기대한 느낌은 받지 못했다. 이번 시즌에는 경험할 수 있길 고대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포터즈는 상파울리다. 독일 내에서도 아주 열정적인 서포터즈라고 소문이 나 있다. 경기장에 가면 위협감을 느낄 정도로 아주 무섭다. 나를 완전히 압도시켜버린 곳도 있다. 바로 쾰른이다. 당시 우리 팀은 쾰른의 홈구장에서 2-0으로 이기는 중이었다. 나는 교체 멤버였다. 후반전에 들어갈 걸 대비해 열심히 몸을 풀었다. 후반전이 시작됐다. 응원 소리가 전반전보다 훨씬 커졌다. 그 소리에 경기장이 아주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기하게 쾰른의 경기력까지 좋아졌다. 우리를 위협하는 장면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첫 번째 골을 터뜨리더니, 연달아 동점골까지 넣었다. 골대 위에서 몸을 풀며 경기를 지켜보는데 ‘와, 이대로 가다가는 경기가 뒤집히겠는데?’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쾰른은 기어코 역전골을 넣었다. 관중석은 그야말로 불타올랐다. 홈팬들의 함성에 완전히 압도됐다. 이후 경기에 투입됐지만 이미 완전히 넘어간 분위기는 되찾을 수 없었다. 관중 유무, 팬들의 응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팬들을 위해 에너지를 전부 쏟아붓는다. 우릴 보러 와준 팬들을 위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수들이 차질 없이 경기를 준비할 수 있도록 분데스리가 대다수 구단은 경기장 내부 시설을 아주 잘 만들어 놨다. 라커룸이 크고 넓은 게 특징이다. 경기를 준비할 때마다 선수마다 루틴이 다른데, 방해받지 않고 자기 루틴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경기 후에는 바로 회복을 할 수 있도록 풀이 준비된 경기장도 많다.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이 각각 받아져 있어서 경기 후 바로 회복에 돌입할 수 있다. 그라운드에 나가기 전에 실내에서도 몸을 풀 수 있도록 실내 자전거를 설치하고, 인조 잔디를 깔아놓는다. 그곳에서 선수들이 아직 덜 풀린 몸을 충분히 풀 수 있다. 

최근 신설된 프라이부르크의 홈구장이 기억에 남는다. 경기 시 사용하는 라커룸과, 훈련 시 사용하는 라커룸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프라이부르크의 경우 같았다. 지난 시즌 프라이부르크 원정 경기가 끝나고 우영이를 만나러 홈 라커룸에 갔는데, 훈련 장비와 마사지 룸이 잘 준비되어 있었다. 평소 훈련할 때도 여기에서 마사지를 받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했다. 어쩌다 한 번 경기를 위해 이용하는 라커룸이 아니라, 매일 훈련을 위해 이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선수들은 편안해 보였다. 이런 환경은 선수들의 마인드 컨트롤에 큰 도움이 된다. 

그만큼 라커룸 내 분위기가 중요하다. 우리 팀은 경기를 앞두고 흐르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라커룸에 늘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는다. 그 노래를 들으며 각자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팀으로 준비해야 하는 세트피스에 대해서는 코칭 스태프가 선수마다 일일이 찾아가 다시 한번 점검을 한다. 팀 전체 워밍업 시간에도 선수들은 개별적으로 준비한다. 꼭 단체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누구는 자전거를 타고, 누구는 스트레칭을 하고, 또 누구는 마사지를 받는다. 근력 운동을 하거나 테이핑을 하는 선수들도 있다. 선수마다 필요한 워밍없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자유가 참 좋다. 개별적으로 준비를 하다가도 결국 우리는 한 공간에서 만난다. 바로 화장실. 경기를 앞두고 물을 워낙 많이 마시기 때문에 화장실은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버스를 타고 경기장에 오면서 창 밖으로 팬들을 본다. 부모님 손을 잡고 발랄하게 걷는 키 작은 소년, 커플 유니폼을 입고 가는 노부부, 멋지게 선글라스를 끼고 맥주를 마시며 위풍당당하게 걷는 젊은 남자. 모습은 모두 달라도 표정은 다들 비슷하다. 잔뜩 상기된 그들을 보며 경기장에 도착한다. 꼭 우리 유니폼을 입은 팬이 아니더라도, 경기장에 오고 있는 모든 사람이 내겐 감동이다. 경기장에 오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 에너지를 소비하는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 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팬들이 없는 경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상대가 바이에른 뮌헨이든, 도르트문트이든 말이다. 그 정도로 팬의 존재는 소중하다. 우릴 위해 여기까지 온 팬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라운드로 입장하기 전까지 컨디션을 1%라도 더 끌어올리기 위해 집중한다. 관중석에 앉아있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100%, 200%를 쏟아내기.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준 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이다. 

*

독일에서 벌써 5년째 뛰고 있으면 이제 익숙하지 않냐고? 

전혀 익숙하지 않다. 매주 다르다. 경기 상대에 따라 다르고, 경기장에 따라 다르고, 그날 나의 기분에 따라 다르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 팬들의 함성은 위로가 되고, 기분이 좋은 날에는 축하받는 기분이 든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LEE LEE LEE’를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세상에 둘도 없는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든다. 내게 분데스리가 이야기를 해준 자철이 형에게도 고맙다. 이번 주에는 어떤 월드컵 경기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우리 홈팬들을 위해 지난번보다 더 크게 손을 흔들며 웃어주고 싶다.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