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배구 (6)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2. 14. 16:29

본문

2016. 06. 27

 

그리고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후미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박인실이 무단으로 퇴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박인실은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한국 여자 배구의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지만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로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여자 배구가 펼쳐 보인 도쿄 대회 6위, 멕시코시티 대회 5위, 뮌헨 대회 4위, 몬트리올 대회 3위의 계단식 성장 과정은 한동안 국내 스포츠계에서 화젯거리가 됐다.

 

▲ 한국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배구 준결승에서 일본과 경기하고 있다. / ⓒ대한체육회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안은 선수는 이순복과 조혜정, 유경화,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이들 가운데 유경화와 유정혜는 공격력이 있는 세터여서 ‘더블 세터’를 이뤄 주 공격수인 ‘나는 작은 새’조혜정과 함께 메달 획득에 크게 이바지했다.

 

세계 무대에서 거두는 우수한 성적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1970년대 여자 배구 대표팀은 서울 신일고등학교에서 이따금 훈련했다. 남자 고교 배구의 명문 대신고가 주로 훈련 파트너가 됐다. 연습 경기는 대체로 10세트로 진행됐다. 살인적인 훈련량이었다. 게다가 세트를 내주면 곧바로 강한 체력 훈련이 뒤따랐다. 말이 좋아 체력 훈련이지 얼차려였다. 블로킹 훈련 때는 손가락에 오자미를 달고 점프했다. 무의식중에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훈련을 받고도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에 져 4위에 그쳤다. 그 뒤 다시 4년이 지나서야 눈물로 범벅이 된 올림픽 메달(동)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남자는 조별 리그 A조에서 1승3패를 기록해 순위 결정전으로 밀려난 뒤 5위 결정전에서 체코에 1-3으로 져 6위에 올랐다. 남자는 메달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조별 리그에서 대회 우승국 폴란드에 2-3(15-12 15-6 6-15 6-15 5-15)로 역전패하는 등 분전해 발전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김건봉과 조재학, 이용관, 정문경, 이선구, 이춘표, 박기원, 이희완, 이인, 임호담, 강만수, 김충한 등이다. <7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스포티비뉴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