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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배구 (8)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2. 1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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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7. 11.

 

여자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하고 1974년(멕시코)과 1978년(소련)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각각 3위와 4위를 차지하는 동안 남자도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등록 실업팀이 달랑 4개인 가운데 197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과 이탈리아 쿠바에 이어 4위에 오르는 기적과 같은 성과를 이뤘다. 아시아 나라 가운데에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금메달에 빛나는 일본이 1970년(불가리아)과 1974년(멕시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각각 3위에 오른 게 이전 최고 성적이었다.

 

1979년 멕시코시티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세계 수준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정상에 오르면 서 상승세를 탄 남자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강만수와 강두태, 문용관, 유중탁, 장윤창, 정의탁, 이종경, 노진수, 김호철, 양진웅 등 신구 조화를 이룬 역대 최강의 전력을 꾸려 출전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배구 경기는 열린 롱비치 아레나에서 열렸고 이 지역의 유명 대학 UCLA 출신인 데이브 손더스, 스티브 새먼스, 카치 킬라리 등이 이끄는 미국이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직전 대회인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위인 소련과 2위인 불가리아, 4위인 폴란드가 몽땅 불참했다. 소련은 1982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국이기도 했다.

 

▲ 1983년 애드먼튼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선전하고 있는 한국 남자 배구 대표팀 / ⓒ대한체육회

 

소련이 빠지긴 했지만 미국 남자 배구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미국은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이어 1988년 서울 대회에서 2연속 올림픽 정상에 올랐다. 서울 대회 결승에서는 소련을 3-1로 꺾었다. 소련은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꼽힌 알렉산드르 사빈이 빠져 전력이 다소 떨어져 있긴 했다. 그러나 미국은 두 차례 올림픽 외에 1985년 월드컵과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 1980년대 명실상부한 남자 배구 강국으로 큰소리칠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남자 배구는 랑핑이 이끄는 중국 여자 배구와 함께 세계 배구를 휩쓸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막강한 전력의 미국이 두려워한 나라가 있었다. 한국이었다. 한국은 조별 리그에서 미국에는 0-3으로 졌으나 튀니지를 3-0,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아르헨티나) 2위인 브라질을 3-1, 3위인 아르헨티나를 3-2로 꺾어 3승1패로 4강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조별 리그 성적만 놓고 보면 확실한 은메달 후보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결승에서 한국과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고 본 미국이 주전을 모두 빼고 브라질에 0-3 져주기 경기를 하는 바람에 세 나라가 3승1패로 승점 타이를 이뤘고 세트득실률에 따라 브라질(2.500)이 1위, 미국(2.250)이 2위로 4강에 올랐고 한국(1.500)은 3위가 돼 5~8위 결정전으로 밀렸다. 미국은 준결승에서 캐나다를, 결승에서 브라질을 각각 3-0으로 가볍게 따돌리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별 리그에서 브라질에 10-15, 11-15, 2-15로 졌던 미국은 결승에서는 15-6, 15-7, 15-7로 이겼다. 조별 리그에서 한국에 진 브라질은 미국 덕에 올림픽 은메달의 기쁨을 누렸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국은 5~8위 결정전에서 중국과 아르헨티나를 각각 3-1로 물리치고 5위를 차지했다. <9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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