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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피치] 멈추면 먹히는 정글의 세계

---Inside Pitch

by econo0706 2023. 3. 1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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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07. 06

 

언젠가 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파키스탄에 야구를 보급하러 간 적이 있었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것부터 설명했다. 홈플레이트에서 18.44m 떨어진 곳에 선을 그어놓고 "여기서 던진다"고 했다. 그리고 "해보라"고 했다.

 

공을 건네받은 파키스탄 사람, 포수 쪽을 흘낏 쳐다보더니 2루까지 걸어간 뒤 거기서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이 그어진 지점에 이르러 "아자!"하고 공을 던졌다. 그들이 즐기는 크리켓 스타일로 공을 던진 것. 모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야구에선 그러면 안 된다. 투수는 달려와서 던지는 게 아니라 서서 던진다. 그래서 마운드 한가운데 나무로 된 투수판이 있다. 가로 24인치, 세로 6인치의 투수판은 홈플레이트의 투수 쪽 (오각형의 뾰족하지 않은 부분)과 나란하게 놓여있다. 투수들은 축족(오른손 투수는 오른발, 왼손 투수는 왼발)으로 이 투수판을 밟고 던진다. 그때 투수판의 어느 쪽을 밟느냐에 따라 공의 궤적과 각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투수는 자신의 주무기와 스타일에 따라 투수판 1루 쪽이냐, 3루 쪽이냐를 선택한다. 오른손 투수의 경우 공 끝이 떠오르는 포심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커브.슬라이더를 즐기는 파워피처는 3루 쪽을, 공 끝이 가라앉는 투심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싱커.체인지업을 즐기는 컨트롤러는 1루 쪽을 밟고 던지는 게 일반적이다.

 

투심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삼은 뒤 재기에 성공한 박찬호는 올 시즌 줄곧 1루 쪽을 밟고 던졌다. 그는 지난해 여름 재활등판을 기점으로 투심 패스트볼 투수로 공인됐고, 그때 투수판을 밟는 위치도 3루에서 1루 쪽으로 옮겼다. 투수판 1루 쪽에서 왼손 타자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그리고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파고드는 투심 패스트볼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4월과 5월, 박찬호의 재기는 빛나는 성공이었다.

 

그런데 6월부터 타자들에게 맞기 시작했다. 부진한 등판이 이어졌다. 지난달 22일 LA 에인절스전에서는 1이닝 8실점이라는 형편없는 내용이 나왔다.

 

그는 고민했다. "타자들이 내 공을 알고 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분석이 이어졌고, 투수코치와 의논한 뒤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그는 6월 27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전부터 투수판 3루 쪽을 택했다. 그리고 오른손 타자 몸쪽 포심 패스트볼과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슬라이더의 비중을 높였다.

 

스피드 차이가 크지 않은 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위해 아주 느린 변화구(백업 커브)도 섞었다. 타자들은 그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두 경기 연속 7이닝 6K.2실점의 좋은 성적이 나왔다.

 

빅리그는 정글이다. 연구와 발전 없이는 도태되고 잡아먹힌다. 물 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백조가 물속에선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정상에서도 꾸준히 자신을 계발해야 롱런을 할 수 있다. 박찬호의 변화에서 배울 점이다. <텍사스에서>

 

이태일 / 야구전문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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