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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클린스만 감독님이 우리에게 낸 과제

--이재성 축구

by econo0706 2023. 4. 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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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3. 27

 

“스포츠에서는 승리가 가장 큰 목표다. 그리고, 즐겨라. 너희들을 위해 3만 5천 명의 팬들이 준비해준 무대이다. 너희들이 그 무대의 주인공이다. 최대한 즐겨라.“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님이 콜롬비아전을 앞두고 해주신 이야기다. 짧은 시간 안에 우리 한국 대표팀의 전투력을 가장 잘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월드컵에서 우리를 뜨겁게 응원해준 팬분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즐겁게 뛰며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우루과이전에서도 그럴 거다.

이번에는 새로운 대표팀의 분위기를 짧게나마 전하려 한다. 아직 새 감독님 체제를 완벽하게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큰 감명을 받았고, 새로운 다짐도 하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들과 이렇게 공유할 수 있어 기쁘다.

 

국가대표팀 소집은 늘 특별하다. 이번 소집은 또 다른 의미로 특별하다. 월드컵 이후에 선수들이 처음 모이는 자리이고, 새로운 감독님도 부임하셨고, 팬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무엇보다 나의 고향 울산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래 못 뵈었던 둘째, 셋째 이모와 함부르크 어머니가 마중 나오셨다. 공항에 도착해 가족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편안했는데, 게이트를 나선 후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많은 팬분이 계셨다. 장시간 비행으로 나른해진 기분으로 나왔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사를 제대로 할 틈도 없이 한 분 한 분 사인해드리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기분이 얼떨떨했다. 이렇게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다. 월드컵에서 우리가 정말 팬분들을 즐겁게 해드렸다는 게 실감 났다. 우리 대표팀이 어딜 가나 팬분들이 계셨다. 파주에서 울산으로 이동할 때, 호텔에서 훈련장으로 이동할 때 등등 팬분들은 잠깐이라도 우리를 보기 위해 찾아오셨다. 두 경기 티켓 매진도 그렇고, 오픈 트레이닝 열기도 그렇고, 정말 우리 대표팀이 사랑받고 있단 느낌을 매일, 매 순간 받았다. 우리 선수들이 팬분들에게 그만큼 많이 해주지 못해 죄송하기도 했다.

감사한 마음이 큰 만큼 미안한 마음도 커지는 것 같다. 파주에서 우리를 위해 애써주신 영양사와 이모님들과 월드컵에서 그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해 아쉬웠다. 카타르에서 그분들 생각이 많이 났다. 파주에 들어와서 오랜만에 얼굴을 뵙고 인사를 드리며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덜어냈다. 3월이 되어서야 새해 인사를 드렸다. 우리가 파주에 있을 때마다 늘 영양가 높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인사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다. 인사를 주고받으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이번에 점심을 못 먹고 파주에 입소해서 그냥 저녁 맛있게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분들은 또 그런 나를 위해 손수 만든 요거트를 준비해주셨다. 덕분에 기분 좋게 대표팀에 합류했다.

우리 대표팀 동료들의 표정도 모두 밝았다. 월드컵의 좋은 기억을 함께 나눈 우리가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각자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유럽에 진출한 현규 이야기도 듣고, 새롭게 시즌 시작한 K리그 동료들의 이야기도 듣고, 각자 소속팀에서 활약한 것들을 서로 축하해줬다.

 

​그리고 화요일 저녁, 대망의 첫 단체 미팅이 열렸다. 클린스만 감독님을 비롯해 새로운 대표팀 코치진, 직원 스태프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사실 클린스만 감독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하실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심플한 미팅이었다. 아무래도 다들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 길었다. 감독님과 코치님들도 우리 선수들을 다 파악하지 못했고, 우리도 감독님과 코치님들을 잘 모르는 상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고 있다” 식의 정말 간단한 소개가 오갔다. 코치진은 우리 선수들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할지부터 고민이라고 한다. 김 씨 선수가 너무 많아서 고생 좀 하실 것 같다. 다들 아시아 팀을 맡은 건 처음이라 여러모로 어색해하는 분위기였다.

독일에서 뛰고 있는 선수로서 이 순간도 특별했다. 독일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사람이 우리 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독일 언론이 우리 대표팀을 주목하고 있다. 마인츠에서도 현지 기자들에게 클린스만 감독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확실히 스타는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감독님을 비롯해 코치진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왔다. 그들과 완벽하지는 않아도 독일어로 소통할 수 있어 첫 만남부터 편안했다. 독일어를 더 공부해야겠다는 동기부여도 되는 것 같다.

콜롬비아전을 앞두고 진행한 훈련에서는 사실 큰 전술 변화나 특별한 지시가 없었다. 다만 ‘태도’를 강조했다. 감독님은 콜롬비아가 어떤 스타일의 축구를 하는 팀인지 알려주시고, 늘 거칠게 플레이를 하는 팀이니 우리가 먼저 거칠게, 적극적으로 나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실제로 경기 중에도 그런 압박을 통해 골을 만들어냈다. 감독님은 스포츠는 어떤 경기를 치르든 이기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고 했다. ”너희들을 위해 3만 5천 명의 팬들이 모인다. 팬들이 너희를 위해 준비해준 무대이다. 너희가 주인공이니, 즐겼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흥민이도 마지막 훈련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카타르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사랑과 응원을 받았다. 보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벤트를 할 수 있지만, 최고의 보답은 축구장 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거다. 응원해준 분들에게 보답할 기회가 왔으니 그 기회를 활용하는 게 우리의 임무다.”

콜롬비아전을 위해 경기장에 나왔을 때 흥민이의 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동기부여가 확실히 됐다. 후반전에 실수로 실점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즐거운 경기를 치른 것 같다. 사실 선수들이 대체로 몸이 무거웠는데 경기장 안의 뜨거운 열기와 팬분들의 함성으로 정신없이 뛸 수 있었다. 팬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클린스만 감독님과 우리 선수들의 호흡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파울루 벤투 감독님이 부임하셨을 때와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국내/외 언론의 주목도부터 차이가 난다. 클린스만 감독님을 며칠 경험한 후 느낀 건, 우리에게 자유로움 속에서 프로페셔널함을 보이도록 강조하신다. 벤투 감독님은 이미 완성된 사단을 갖춰오셨다. 규율과 틀이 잡혀있었다. 부임 후 선수들의 첫 소집에서도 무조건 같은 날에 모이도록 하셨다. 그래서 그때 홀슈타인 킬에서 경기 하나를 치르지 못하고 한국에 갔던 기억이 난다. 클린스만 감독님의 스타일은 다르다. 선수들이 자기 상황에 맞춰 파주에 모이도록 했다. 선수 맞춤형 리더십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콜롬비아전이 끝난 후 우리는 외박을 받았다. 대표팀 소집 기간 외박은 이전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심지어 외박 후 모이는 시간을 오후 2시에서 5시로 미뤄주셨다. 가족, 지인과 더 편안하게 시간을 보낸 후 천천히 모이라고 말이다.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선수들 입장에서는 재충전도 되고 좋다. 반면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자유로움을 그저 ‘누리는’ 상황이 혹시나 발생할까봐. 이런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우리는 더욱더 강한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흐트러지지 않고 프로다운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혹여나 우리가 언젠가 안 좋은 경기력을 보였을 때 저런 자율성이 괜히 타깃이 되어 비판받을까 걱정도 된다. 이미 다양한 상황을 숱하게 많이 겪은 후라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프로페셔널해야 한다. 클린스만 감독님이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선 우리 고참 선수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감독님께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시면 고참 선수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 팀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야 한다. 우리 대표팀의 새로운 숙제다. 클린스만 감독님의 부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첫 번째 과제다. 지난날의 영광을 접어두고 얼마 남지 않은 내년 아시안컵을 위해 달려야 한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있다. 감독님도 계속 아시안컵 우승을 강조하신다. 허무맹랑한 각오가 아니다. 우리는 월드컵을 통해 한층 더 좋은 팀으로 성장했고, 완성도 높은 팀이 됐다. 새 감독님 체제에서 계속 성장해나갈 거다. 지난 2019년의 아픔도 잊지 않고 있다. 이번에도 일 한번 내보자는 선수들의 의지가 강하다. 그 의지는 이번 콜롬비아와 우루과이전을 준비하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참, 이렇게 보니 중요하지 않은 경기는 하나도 없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콜롬비아와 우루과이전을 준비했지만 뛰는 내내 우리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콜롬비아전에서 비겨서 아쉽다. 우루과이전은 반드시 이기자고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도 똑같다. 월드컵에서 우루과이를 상대로 아쉬운 결과를 냈기에 이번엔 꼭 이기고 싶다. 팬분들이 승리를 만끽하며 귀가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다시 시작된 우리 대표팀의 새로운 여정, 우리가 풀어나갈 숙제를 지금처럼 뜨겁게 지지하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

 

칼럼을 마무리하기 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대표팀 경기가 울산에서 열린 건 4년 만이다. 나의 고향에서 뛰어 감회가 새로웠다. 2002 월드컵을 울산에서 봤고,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곳이다. 이번 콜롬비아전은 어쩌면 국가대표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뛸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과 부모님의 지인, 친구들, 학교의 선후배들이 나를 보러 많이 왔다. ‘울산이 낳은 스타’라는 현수막도 걸렸다. 정말 뭉클했다. 내게 더없이 특별한 경기로 남았다.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어 나의 고향에서 뛸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제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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