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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인사를 하자 맛있는 요거트를 받았다

--이재성 축구

by econo0706 2023. 4. 12.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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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4. 10

 

나는 인사를 좋아한다. 해외에 있어 평소에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눌 생각에 설렌다. 휴대폰 메시지로 주고받는 안부 인사와는 느낌이 다르다.

우리 선수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주시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보다 더 박수받아야 할 분들이다. 그분들은 특히 반갑다. 그래서 파주 트레이닝 센터에 갈 때면 늘 한 분이라도 더 만나뵙고 인사를 나누려 한다. 전북 클럽하우스에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전북에 있을 때 많이 챙겨주신 관리소장님이나 이모님들께 꼭 인사를 드린다. 마치 유학 나간 아들을 맞이하듯 반겨주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실 내게는 지난 몇 년간 당연한 패턴이었다. 최근 대표팀 소집에서 파주에 계신 영양사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인사이드캠' 영상이 화제가 된 건 오히려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영상을 통해 칭찬을 받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 되었다. 기분이 좋은 한편 우리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이 점점 ‘당연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칼럼을 통해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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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인사의 중요성을 숱하게 많이 듣고 자랐다. 살면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배웠다. 프로 선수가 되고, 국가대표가 되며 점점 대중에게 관심받는 위치로 올라가면 많은 게 바뀐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환경에 자칫 초심을 잃기 쉽다. 다행히 나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더 겸손하고, 더 예의 바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내게 인사는 기본 중의 기본이며, 누군가에게 고맙거나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도구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평소에는 인사에 대한 별생각이 없었다. 내겐 당연한 거였으니까. 영상을 통해 내가 칭찬받는 걸 보며 기본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흥민이 아버지가 쓴 책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도 문득 떠올랐다. 그 어떤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고 가장 첫 번째는 ‘기본기’이다.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그 위에 무엇을 쌓아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내게 인사는 그런 탄탄한 기본기에 속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쌓는 데 있어서, 나라는 인격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토대.

기본기의 중요성은 축구에도 적용이 된다. 학창 시절에 매일 반복되는 기본기 훈련이 정말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왜 매일 똑같은 훈련을 계속 해야 할까?’ 하는 불만도 들었다.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기 전이 오히려 더 즐거웠다. 내가 공을 차고 싶은 대로 차며 놀던 그때가 그리웠다. 선생님은 그런 내게 선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집중해서 패스 하나, 동작 하나하나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다그치셨다. 프로가 된 후에야 그 기본기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수없이 볼 리프팅을 하며 익혔던 발의 감각 덕분에 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패스의 중요한 요소인 정확성, 강약 조절, 퀄리티를 놓치지 않는다. 다음 동작을 하기 위해 내가 원하는 위치로 공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데 기본기가 좋지 않으면 내 뜻대로 공을 다룰 수가 없다. 그러면 다음 플레이가 늦어지고, 실수가 생기고, 실수가 반복되면 공을 받기 두려워진다. 그래서 기본기가 중요하다. 기본기 훈련을 대충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축구를 했다면 이 무대에 절대 서지 못했을 거다.

지금도 슬럼프가 오거나 자신감이 떨어질 때는 옛날 기억을 되살려 기본기 훈련을 한다. 기본기 훈련을 반복해서 잃어버렸던 감각도 살리고, 자신감도 살리고, 초심도 살린다.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축구에서 기본기 훈련만큼 중요한 요소는 축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축구에서는 팀플레이가 가장 중요하다. 축구는 11명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골을 만들어내는 스포츠다. 학창 시절에 기술이 뛰어난 동료들이 더러 있었다. 그 동료들을 보며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팀에서 원하고, 감독님이 원하는 선수는 따로 있었다. 팀에 더 헌신하고, 팀을 위해 뛰는 선수들이었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개인 기술을 뽐내는 선수가 있으면 오히려 ‘건방지다’는 핀잔을 받던 시절이었다. 개인 기술로 만들어가는 축구가 익숙하지 않은 때이기도 했다. 요즘은 어린 선수들이 어디를 가나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선수의 화려한 스킬 영상을 접할 수 있지만 당시에 우리에게는 스마트폰도 없고, 개인 노트북도 없었기에 그런 축구를 접할 기회가 적었다. 훈련장에서 배우는 축구, 경기장에 가서 보는 축구, TV를 통해 보는 축구가 전부였다. 늘 11명이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개인의 기술보다는 팀을 위한 플레이가 머릿속에 더 진하게 남았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어디서든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세대의 동료 선수들이 대부분 그렇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를 마다하는 감독은 거의 없다. 아마 한국 선수들이 어딜 가나 제 몫을 잘하는 데는 그 이유도 있을 거로 생각한다.

​요즘 어린 선수들은 내가 성장하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있다. 동경하는 선수의 화려한 기술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아직 성장하고 배우는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그런 개인 기술 동영상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싶어진다. 그런 욕심을 꾹 참고 팀에서 강조하는 기본기 훈련에 집중하기란 절대 쉽지 않을 거다. 또, 요즘에는 ‘축구 레슨’이라는 게 있더라. 팀 훈련과 별개로 1:1로 기술을 배우는 곳이다. 이런 걸 보며 참 많은 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며 축구의 트렌드도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팀 훈련을 하고 개인 보강 운동을 하는 게 전부였는데, 요즘에는 따로 시간을 내서 기술을 배운다니.

놀랍고 대단한 한편, 너무 개인 기술에만 집중하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가 된다. 팀 훈련과 개인 기술 훈련의 차이점은 공이 없을 때의 플레이, 공이 있을 때의 플레이다. 개인 기술은 공이 있을 때 빛이 난다. 거기에 너무 몰두하고, 그 재미에 푹 빠지면 공이 없을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공을 갖고 있지 않은 게 싫을 수도 있다. 그러면 팀의 밸런스가 깨진다. 내가 공을 갖고 있지 않을 때도 동료들을 위해 공간을 만들고, 계속 뛰어야 한다. 축구는 공으로 하는 스포츠이지만, 정작 공을 얻어내기 위해 뛰어야 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상대와 끊임없이 부딪쳐야 하고, 어디로 파고들면 좋을지 쉬지 않고 계산해야 한다. 그를 위한 끈기와 투쟁심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축구선수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화려한 개인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바로 이 부분이다. 기술이 좋으면 공이 있을 때는 좋은 선수라는 평가를 받겠지만, 공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선수가 되기 쉽다. 한 마디로 ‘반쪽짜리’ 선수다. 그러니 팀을 위해 헌신하는 마인드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팀에 녹아들기 힘들다.

그래서 요즘 친구들을 보면 대단하다. 그들은 여기저기 현혹되기 쉬운 상황 속에 놓여있다. 내가 성장하던 시절보다 몇 배로 더 집중하고 노력해야 한다. 축구에 정답은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기본은 존재한다. 기본이 되어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뛸 준비를 갖췄다는 뜻이다. 화려하고 눈이 즐거운 기술을 갖춘 선수들이 주목을 받지만 헌신하고 희생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고마워하는 선수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런 선수로 성장할 수 있게 어른들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

​나에게는 그런 어른들이 주변에 많았다. “기본에 충실해라”, “겸손해라”, “늘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등의 조언을 끊임없이 받았다. 덕분에 축구를 하며 나의 인격체도 올바른 방향으로 자라났다. 나는 여전히 어리지만 왜 그렇게 기본적인 예의와 겸손을 강조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하나 더 생각나는 말이 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라”이다. 이 역시 살면서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배웠다. 이 말을 떠올리니 최근의 한 사건을 언급하고 싶다. 승부조작 사면 및 철회의 과정에서 대한축구협회 이사진에 새롭게 선임되었던 축구인들이 많은 질타를 받았다. 그들의 침묵이 논란이었다. 잘못된 것에 대한 침묵은 질타를 낳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침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상황이 사람을 지배한다. 인상 깊게 읽었던 책 <프레임>은 ‘사람인가, 상황인가? 이 이슈에 대하여 어떤 프레임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많은 행동이 달라진다. 문자메시지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그를 비난할 것인가, 그의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상황에 지배당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대다수의 의견으로 인해 내 의견은 감히 말하지 못한 채 무리에 이끌려간 경험이 있다. 그들을 마냥 비난하기보다, 언젠가 그들이 들려줄 진심을 기다려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통해 성숙해진다.

주제에서 조금 빗나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다. 축구에서든, 삶 속에서든 기본을 잊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득이 된다. 쉽게 무너지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자신감도 생긴다. 내가 파주에서 영양사분들께 인사를 하고 하마터면 거를 뻔한 점심을 먹을 수 있던 것처럼.

​얼른 짐을 풀러 숙소에 올라가지 않고 시간을 내 그분들을 찾아간 건 나의 진심이었다. 이미 정리를 마친 주방에서 맛있는 요거트를 정성껏 준비해 내게 대접해주신 것 역시 그분들의 진심이었다. 누군가에게 받고자 하는 마음보다 주고자 하는 마음이 클 때 이렇게 따뜻한 기억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주목받기 보다 팀이 주목받도록 최선을 다해 뛰고, 나의 입장도 고수하되 상대의 입장도 헤아려보는 사람이 되도록 다시 한번 ‘기본’의 중요성을 마음에 새긴다.

 

이재성 / 분데스리가 마인츠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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