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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8)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4.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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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22.

 

체육인들의 발빠른 움직임에 힘입어 신생 대한민국은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했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나라는 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고 올림픽 종목 경기 단체가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맹하고 있어야 IOC의 승인을 받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재빠르게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한 종목이 축구와 육상, 복싱, 역도, 농구, 사이클 등이었다.1948년 상반기 대한체육회는 그해 7월 런던에서 열리는 제 14회 하계 올림픽에 출전할 축구와 육상, 농구, 복싱, 역도,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 67명의 선수단을 구성했다. 선수단을 구성하기까지 각 경기 단체는 자기네 종목에서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고 다른 종목을 헐뜯고 같은 종목 안에서도 서로 비방하는 등 잡음이 많았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 남쪽을 관할하고 있던 미 군정청이 비용을 마련해 줘야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미 군정청은 선수단 인원이 많으니 10명을 줄이라고 대한체육회에 통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사리 선수단을 구성한 대한체육회가 10명을 줄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때 일부 체육인들로부터 친일파로 배척 받아 체육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이상백이 “모두 다 보낼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체육회 간부들이 그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6편에 나와 있듯이 이상백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를 지내고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선수단 임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무를 맡았기 때문에 일부 체육인들은 그를 친일파라고 몰아세워 올림픽 선수단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견제했다.

 

그러나 다급해진 대한체육회로서는 이상백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이상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 군정청장인 존 하지 중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태평양 주둔 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움직였다. 맥아더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고 1928년부터 2년 동안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위원장도 맡은 체육인이다.그때 USOC 부위원장이 이상백과 친한 에이버리 브런디지였다. 브런디지는 뒷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된다. 이상백은 미국에 있는 브런디지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브런디지는 맥아더 원수에게 연락해 하지 중장으로 하여금 한국 올림픽 선수단을 모두 보내도록 했다.이런 활동을 한 이상백은 1960년대 IOC 위원으로 한국 스포츠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쓴다.

 

▲ 1948년 런던 올림픽 출전 축구 대표팀. 멋진 양복 차림인데 선수 선발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 ⓒ 한국 축구 100년사

 

런던 올림픽 출전 축구 대표팀은 감독 없이 선수 차순종, 홍덕영, 박규정, 박대종, 이시동, 민병대, 이유형, 김규환, 최성곤, 우정환, 배종호, 정남식, 김용식, 정국진, 안종수, 오경환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 가운데 김용식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김용식과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은 일본이 1938년 제 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들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실력을 인정 받은 베테랑들이 신생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948년 6월 21일 서울 종로에 있는 YMCA회관에 모인 축구 17명을 포함한 67명의 한국 선수단은 서울역까지 행진한 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후쿠오카에 갔고 그곳에서 기차 편으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배편으로 홍콩으로 간 뒤 홍콩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해 방콕→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바그다드→아테네→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경유지인 홍콩에서 홍콩팀과 친선경기를 가져 5-1로 이겼는데 이 경기가 한국 축구사에 기록된 첫 A매치다.

 

한국은 런던 올림픽 1회전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었으나 8강전에서 스웨덴에 0-12로 크게 져 탈락했다. 세계의 벽을 실감한 경기였다. 스웨덴은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3-1로 꺾고 우승했다. 이 대회 이후 한국 축구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한 차례 출전한 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동 출전권을 갖고 나서기까지 오랜 기간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크게 졌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암흑기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의 경우도 자유 참가제였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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