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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6)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5.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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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09. 

 

축구 통제 안에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평양의 관서체육회였다. 통제 안이 그대로 실시될 경우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만 살아남게 되고 10년 이상 열려 왔던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전 조선 규모가 아닌 일개 지방 대회로 전락하게 될 우려가 있었다. 1934년 4월 25일 관서체육회 부회장 김병연과 상무이사 송석찬이 상경해 총독부 학무국 관계자들을 만나 "관서체육회가 지니고 있는 전조선축구대회 개최의 기득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관서체육회가 내세운 "일본에서 오사카 아사히신문이 주최하고 있는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하고 있는 전일본중등학교축구대회와 마찬가지로 관서체육회의 전조선축구대회도 대회 개최의 기득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가 정연해 총독부 학무국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축구 통제 안은 폐기됐다.

 

우리 민족의 축구 사랑은 일제의 간교한 통제 움직임에도 식을 줄 몰랐다. 1934년 5월 31일 조선체육회는 제 15회 정기총회를 열고 창립 15년을 맞아 기념 사업의 하나로 가을에 축구와 야구, 정구, 육상, 농구 등 5개 종목에 걸쳐 제 15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갖기로 했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로부터 15년이 지난 1934년 11월 2일부터 나흘 동안 열린 전조선종합경기대회는 전통과 역사를 살리기 위해 대회 명칭 앞에 '제 15회'를 달기로 했다. 오늘날 대한체육회가 주최하는 전국체육대회의 제 15회 대회가 이해에 열린 것이다. 전국체육대회는 올해 제 96회 대회를 강릉을 주 개최지로 해 강원도에서 성공적으로 열었고 2019년, 역사적인 제 100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한다.

 

전국체육대회는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이자 국민적인 축제의 마당이다. 2만 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례 행사는 전국체육대회가 거의 유일하다.아무튼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며 유구한 역사를 갖게 되는 전국체전의 출발점이 된 이 대회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축구와 농구에서 일어난 갖가지 불상사로 얼룩지고 만다. 조선체육회는 11월 9일 긴급 이사회를 열고 불상사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끝에 윤치호 회장의 "선수가 선수를 구타하고 선수가 심판과 간부에게 폭행을 가해 수라장을 만드는 한심하고 통탄할 사건이 일어나 다음과 같이 폭행 선수를 처벌한다"는 성명과 함께 엄벌이 내려졌다.그렇지 않아도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체육 활동을 이것저것 트집 잡아 통제를 가하고 있던 때라 조선체육회는 과감하게 경기장 질서를 바로잡아야만 했다. 3명의 중등부 축구 선수와 4명의 일반부 축구 선수 그리고 1명의 중등부 농구 선수에게 2년 동안 출전을 금지했다.

 

▲ 1940년대 보성고보 축구팀. 뒷줄에 있는 선수들이 오늘날과 거의 같은 포즈를 하고 있다. ⓒ 한국 축구 100년사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개최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유도와 씨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축구에서 중등부는 휘문고보가 숭실중학을 1-0으로, 전문부는 연희전문이 보성전문을 3-1로, 일반부는 청진축구팀이 철도팀을 3-0으로 각각 누르고 우승했다.조선축구협회가 보낸 경성축구단은 1935년 6월 도쿄에서 열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전을 겸한 제 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10월에 벌어진 제 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 일반부에서도 패권을 차지했다.

 

일본인들은 마라톤과 축구, 농구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조선인들을 일본 대표로 뽑는데 무척 인색했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 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원칙인데도 이런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의 우승팀인 연희전문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이 뽑힌 것은 그나마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이자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인 이상백이 강력히 밀었기 때문이었다. 이상백은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 선수단 총무, 올림픽 농구 국제 심판으로 참가한 인물로 일본 체육계에 영향력이 컸다.

 

축구의 경우 최강팀인 경성축구단이 아닌 한반도 전체에서 김용식 한 사람 만이 뽑혔을 뿐이다.김용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은 김용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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