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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7)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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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6.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의 우승팀인 연희전문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이 뽑힌 것은 그나마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이자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인 이상백이 강력히 밀었기 때문이었다. 이상백은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 선수단 총무, 올림픽 농구 국제 심판으로 참가한 인물로 일본 체육계에 영향력이 컸다. 축구의 경우 최강팀인 경성축구단이 아닌, 한반도 전체에서 김용식 한 사람만이 뽑혔을 뿐이다. 김용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은 김용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해 한반도 전체가 기쁨의 도가니가 된 가운데 1936년 8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제 17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부터 수상(수영), 권투(복싱), 탁구 등 3개 종목이 추가됐다. 종목이 계속 추가되면서 이때쯤 오늘날 전국체전의 틀이 갖춰졌다. 축구는 중등부에서는 경신학교(오늘날의 경신고등학교)가 영생고보를 3-0, 전문부에서는 연희전문(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이 보성전문(오늘날의 고려대)을 2-1, 일반부에서는 경성이 순천을 4-2로 물리치고 우승했다.순조롭게 이어지던 전조선종합경기대회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전쟁에 혈안이 된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인 민간 단체를 모두 일본인 기관에 흡수해 버리기로 방침을 세웠고 이에 따라 조선체육회는 1938년 일본인 체육 기관인 조선체육협회에 강제로 흡수됐다.

 

조선체육회가 해산되자 조선체육회가 주최해 왔던 전조선종합경기대회는 그해부터 중지됐다. 조선축구협회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축구만을 이어받아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라는 이름으로 1938년 11월 제 19회 대회를 열었다. 첫 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 제 19회를 단 것은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의 개최 횟수를 이어받겠다는 뜻이었다. 축구가 전국체전의 명맥을 이어 간 것이다.그런데 이 무렵 주목할 만한 일이 있다. 일본이 1938년 제 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김용식과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 4명의 조선인 선수가 들어 있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 12조에 속한 일본이 기권하지 않았으면 한국과 월드컵의 인연은 보다 일찍 맺어졌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연인원 40여 명의 조선인 선수가 각종 국제 대회에 대비한 일본 축구 대표팀 훈련에 소집됐다. 우리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방증이다.조선축구협회는 일본인 체육 기관인 조선체육협회 산하 단체로 흡수돼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 1933년 10월 경평축구대회 입장식에서 두 팀 선수들이 나란히 서 있다. / ⓒ 한국 축구 100년사

 

조선축구협회는 1941년 11월 제 22회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바로 전 일본메이지신궁경기대회 축구 경기에서 평양일곡 팀이 이길 때 응원단이 소란을 피웠다고 해서 그 책임을 조선축구협회가 진다는 명분으로 대회를 열지 못했다. 평양일곡 팀의 응원단이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 소란을 피운 데 대해 조선축구협회가 책임을 지는 것도 납득이 안 가거니와 대회까지 중지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일제가 축구를 통한 민족정신 앙양을 못 마땅히 여겨 압력을 가한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가 1940년 제 21회 대회를 끝으로 없어지면서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의 횟수를 이어갈 대회도 없어졌다. 전국체전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1945년 11월 뜻있는 체육인들의 노력으로 일제에 강제 해산당한 지 7년 만에 조선체육회가 재건됐다. 이때에 벌써 조선축구협회를 비롯한 여러 경기 단체가 속속 결성되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중단됐던 전조선종합경기대회도 부활했다.

 

1945년 10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자유 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가 막을 올렸다. 이 대회가 제 26회 전국체육대회다.광복 다음 해인 1946년 축구와 육상, 야구, 배구 등 중요 종목들이 각각 제 1회 대회로 활발히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민간인의 38선 통과가 금지되기 두 달 전인 1946년 3월 25일에는 광복 후 첫 경평축구대항전이 서울에서 열렸다. 조선체육회는 1946년 10월 16일부터 닷새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올림픽대회'를 열었다.

 

아직 전국체육대회라는 명칭이 정착되지 않았던 때인데다 2년 뒤 런던 올림픽 출전에 대한 열망이 조선올림픽대회라는 대회 명칭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회가 제 27회 전국체육대회다. 대회에는 축구를 포함한 16개 종목에 5천 명이 넘는 선수들이 참가했다.체육인들의 발빠른 움직임에 힘입어 신생 대한민국은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했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나라는 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고 올림픽 종목 경기 단체가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맹하고 있어야 IOC의 승인을 받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재빠르게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한 종목이 축구와 육상, 복싱, 역도, 농구, 사이클 등이었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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