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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5)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6.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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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01

 

1930년대 전반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 함흥축구단 등 도시 축구 3강의 대항전과 각종 축구 대회에서 벌어지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연보전(오늘날의 연고전)이 많은 축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축구는 우리가 일본을 압도하는 종목이라 일본인들이 즐기는 야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서울과 평양의 축구 대항전인 경평축구전은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열렸으며 서울과 평양, 함흥 세 도시가 참가한 축구 3도시 대항전은 조선축구협회 주최로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개최됐다. 정기 대항전뿐만 아니라 각종 축구 대회에서 서울과 평양, 함흥이 맞붙는 경기에는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고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전 조선 규모의 축구 대회는 여전히 조선체육회가 주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른 종목의 경기인들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축구인들도 조선체육회의 창립 정신에 바탕을 둔 전통과 권위를 존중해 조선체육회를 중심으로 모든 종목이 단결해야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그런 가운데 조선축구심판협회가 1928년 5월 22일 창립총회를 갖고 발족했다. 이 협회의 창립 취지는 조선체육회의 전조선축구대회를 측면에서 협조하고 심판 기술의 향상과 판정을 둘러싼 불상사 방지에 이바지 하는 데 있었다. 이어 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오늘날의 대한축구협회)가 창립됐다.1934년 4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그들이 싫어하는 축구의 통제를 시도했다. 총독부 학무국이 한반도 안에서 축구 경기와 학교 팀의 참가를 제한하기 위한 실시안을 세우고 있던 가운데 그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 1929년 8월 전조선축구대회 우승한 경신중학(오늘날의 경신고등학교) 축구부. 전통의 축구 명문인 경신고는  우수 선수를 수없이 많이 배출했다. 80여년 전 흑백사진이지만 경신학교 전통의 유니폼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 ⓒ 한국 축구 100년사

 

일부에서는 총독부 학무국이 조선인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내용을 흘려 내보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다.축구 통제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전 조선 규모의 축구 대회는 1년에 한 차례에 한해 학무국장의 허가를 받아야 대회를 개최할 수 있다. *각 도 규모의 축구 대회는 도 체육협회(일본인 조직)와 축구연맹(일본인 조직)이 주최해야 한다. *두 개 이상의 도에 걸친 축구 대항전은 관계 도 체육협회와 축구연맹이 주최해야 한다. *축구 경기는 원칙적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치르되 평일은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오후 3시 이후에 치러야 한다.총독부 학무국은 "종전의 축구 대회는 학생들의 학업에 지장을 주고 대회 주최 측이 영리 목적으로 대회를 마구 개최하고 있기 때문에 축구 통제가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축구 통제안에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평양의 관서체육회였다. 통제 안이 그대로 실시될 경우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만 살아남게 되고 10년 이상 열려 왔던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전 조선 규모가 아닌 일개 지방 대회로 전락하게 될 우려가 있었다.1934년 4월 25일 관서체육회 부회장 김병연과 상무이사 송석찬이 상경해 총독부 학무국 관계자들을 만나 "관서체육회가 지니고 있는 전조선축구대회 개최의 기득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관서체육회가 내세운 "일본에서 오사카 아사히신문이 주최하고 있는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하고 있는 전일본중등학교축구대회와 마찬가지로 관서체육회의 전조선축구대회도 대회 개최의 기득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가 정연해 총독부 학무국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축구 통제 안은 폐기됐다.그러나 학무국은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는 학교들에게 제약을 가해 참가 의지를 꺾는 간교한 행위를 했다.

 

신명철 편집위원 sports@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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