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문학이 처음으로 외국말로 번역된 것은 1892년으로 <프랑탕 파르퓸>이란 제목으로 불역(佛譯)된 <춘향전>이다.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까지 건너간 김옥균의 살해범 홍종우와 파리의 동양어학교 로니 교수가 합작으로 불역한 것이다. 그 후 이들은 <르 부아 섹르플뢰리(고목화)>라는 한국 소설을 불역했고 그 밖에 단편 <일이 끝난 의식>을 불역해 간행했다. 소설뿐 아니라 홍종우는 동양학자 앙리 슈발리에와 더불어 <성점과 운세>라는 한국문헌을 불역해서 서구에 진출한 동양문학의 선구로서 각광받아 왔다.
110년 전에 중국이나 일본에 앞서 한국 문화와 문학이 유럽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전통만 계승되었던들 노벨문학상도 일본보다 먼저 보다 많이 탔을 것이다. 해야 할 일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하나둘일까만 나라에서 했어야 할 번역 문화교류의 등한(等閒)으로 그 찬란한 문화를 지녔으면서도 문화고도를 못 면해온 우리나라다.
알아들을 수 없게끔 지껄이는 것을 두고 "적선방 강아지 짖듯하다"고 한다. 적선방에 외국말을 가르쳐 외교와 문물교류를 관장하는 사역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한어·청어·몽어·왜어를 가르쳤는데 서당개 3년이면 풍월(風月)하듯이 이 적선방 개도 사역원에서 흘러나오는 혀짧은 소리 듣고 풍월하다 보니 그런 속담이 생겨났음직하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보면 궁예가 외교를 위한 이웃나라 말을 관장하는 사대라는 관직을 둔 것이 사역원의 시초로, 이덕형, 이원익, 이경석, 이정구 같은 명 정승들은 한어를 잘하여 임금님의 통역을 하였으니 사역원의 위상이 꽤 높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처럼 제도적으로도 역사가 유구한데, 그것이 보다 절실한 오늘날 정부에서 증발시켜 문화빈국으로 타락시켜 놓은 것일까.
뒤늦게나마 문학번역원을 설치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작품번역이 안 되어 노벨문학상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설립 이유라면 근시안적(近視眼的)이다. 문학번역원이 아니라 한국 고금의 명저들도 번역하여 한국문화의 흐름이 도도히 부각되어 번져나가도록 하는 문화번역원으로 시각을 넓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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