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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㉕ 지금도 흐뭇해지는 팬들의 마음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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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08

 

그 시절에 인기스포츠는...


국가대표선수 시절 여성 팬이 많았다. 팬레터와 함께 선물도 과분하게 받았다. 나의 전성시대였던 60~70년대 팬은 주로 여고생이었다. 명문고 학생들이 많았고, 대부분 학교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들이었다. 집과 학교만 오가는 공붓벌레로 가정이나 학교에서 시험압박에 시달렸지만, 풀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오가는 길에 보았던 YMCA 체육관을 방문했다가 난생처음 농구시합을 관전,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빠져들어 곧바로 농구 팬이 되곤 했다. 일부는 모교 팀 응원하러 갔다가 농구 좋아하는 학생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 인기 스포츠는 농구와 축구, 프로레슬링, 복싱이었다. 야구는 고등학교 경기가 인기가 있었다. 실업 야구는 관중이 없었다. 동대문야구장에 여자친구와 함께 가면 공짜였다. 1982년 프로화되면서 인기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축구, 복싱 등은 주로 남자가 좋아했다. 여학생에게 인기 있는 스포츠는 농구였다. 1994년 농구대잔치 때 오빠 부대가 만들어졌다. 때마침 농구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상승에 기름을 부었다. 장동건, 손지창, 심은하 등이 출연했는데, 농구 열기를 높이고 ‘오빠 부대’라는 호칭을 탄생시켰다.

마음 찡하게 한 정성 담긴 스크랩북


농구팬이 보낸 편지를 처음 받아 본 것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 때였다. 6, 7통을 받았는데 서울의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 국위를 선양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궁금해했는데, 한 편지에서 이유를 알았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지금 멕시코올림픽이 열리고 있는데 농구선수들에게 응원의 편지를 보내라고 주문을 했단다. 주전 선수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어놓고 분단 별로 선수를 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자신은 유희형을 잘 모르고 신동파 선수를 택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의 지시 때문에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했다. 응원 많이 할 테니 이기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농구를 좋아하는 선생님 덕분에 팬레터를 처음 받아보았다.

 

그때부터 팬이 많아졌는데 대부분 농구장에 와서 플레이를 본 다음부터다. 먼저 사인을 받고, 주소를 요구하는데 가르쳐주면 그 후 편지가 오기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 주전이었고, 전매청팀에서 독보적인 주득점원이기 때문에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고등학생 때 열성적으로 좋아했다가 대학에 진학하면 조금 뜸해진다. 대학 생활에서 남자 친구도 생기고 미팅도 하다 보면 시들해지는 것이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팬이 있다. 시내에 있는 모 여고 3학년 학생이다. 본교 농구팀 경기에 단체 응원하러 왔다가 내가 뛰는 시합을 본 후 팬이 되었다고 했다. 당시는 주로 장충체육관에서 농구경기를 했고, 실업, 고교, 대학경기를 번갈아 했다. 그 학생은 1971년 5월 장충체육관에서 나의 플레이를 본 후 5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5년간 내 활약상을 일일이 스크랩하여 정성을 다해 꾸민 자료집 다섯 권이 들려있었다. 표지는 예쁜 비단으로 덮여 있었고, 연도별 표시가 되어있었다. 흑백 사진과 활약상을 담은 기사 내용이 코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가슴이 찡했다.

‘여고 때 나의 플레이를 본 후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동안 내 관련 기사를 가위로 오려 정성스레 스크랩북을 만들었는데,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이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라며 나에게 내밀었다. 대학 4년 동안 먼발치에서 열심히 뛰는 모습을 가끔 보았다고 했다.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고 하자 미소만 지으며 답변하지 않았다. 75년 6월이었다. 그때는 결혼을 약속한 지금의 아내가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스포츠팬들은 좋아하는 선수에게 편지를 많이 보낸다. 10장 가까이 쓴 팬레터를 매주 한 통씩 보내오기도 한다. 사춘기 시절 완전히 이성과 대화하는 형식이다. 답장은 잘 하지 않는다. 답장하게 되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지론은 팬과 이성적으로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경기장에서 내 플레이를 본 후 팬이 되었기 때문에 농구장에 와서 보면 된다. 극성팬도 있었다. 집에까지 찾아와서 돌아가질 않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인데, 설득해 보내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 1969년 대만과의 경기에서 리바운드에 참여하고 있는 유희형(8번)

 

추억이 된 팬들


1969년부터 코리안리그가 만들어져 매주 경기가 있었다. 경기 장소는 냉, 난방 시설이 잘되어있는 종로 2가 YMCA 체육관이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여고 학생들이 경기를 자주 보러왔다. 관중석이 따로 없어 코트 주변에 100명 정도 입장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선수를 가까이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모 여고 학생 3, 4명이 늘 농구장을 찾았고, 사인을 받아 갔다. 그리고 한 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69년 말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 대비 합숙 훈련을 YMCA 체육관에서 했고, 숙소가 그 호텔이었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방으로 가는데 보온병을 받았다. 어떤 학생이 맡기고 갔다는 것이다. 따뜻한 커피였다. 편지가 들어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곳에서 1개월 합숙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와 편지가 들어있는 보온병을 받았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는 길에 호텔 프런트에 맡기고 가는 것이다. 오후에 수업 마친 후 찾아가는 일을 한 달간 계속했다. 대학 진학 후 뜸해졌지만 내 가슴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팬이었다.

 

▲ 1969년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동남아시아 원정 경기를 마친 뒤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는 모습(좌). 1975년 제4회 대통령배쟁탈 남녀농구대회에서 골밑득점을 시도하고 있다.(우)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가끔은 그 시절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어 준 팬들의 기억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가 종종 있다. 이젠 그들도 중장년의 나이를 넘기고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한때 스포츠 스타에 흠뻑 빠져 한없이 열광했던 어슴푸레한 기억을 추억의 갈피 속에서 꺼내보며 가끔 웃고 있지는 않을지, 지나간 세월은 누구에게나 아쉽고 속절없다 했던가, 아무튼 그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해 본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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