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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의전 담당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2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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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06.

 

‘이기는 곳’만 찾아다닌 VIP의전


미국에서 개최된 제26회 애틀랜타올림픽은 1996년 7월 19일부터 8월 4일까지 열렸다. 전 세계 197개국에서 1만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생소한 국가도 많았다. 동유럽에서 분리 독립한 나라가 30여 개국이나 되었다. 우리나라는 15개 종목 50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성적은 금 7개로 10위를 했지만, 은메달이 15개였다. 손안에 들어왔던 금을 놓친 아쉬운 경기가 많았다. 유도에서는 3초를 버티지 못하고 지도를 받아 패하기도 했다.

 

나는 문화체육부에서 본부 임원으로 파견되었다. 선수단에 대한 지원, 관리 등이 나의 업무였지만, 가장 어렵다는 VIP 의전을 맡았다. 경기와 관련된 모든 것은 대한체육회가 주관한다. 애틀랜타올림픽에는 유난히 높은 분들이 많이 방문했는데,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장관, 국회의원, 원로체육인 등이었다. 내 임무는 지위가 높은 분들을 영접하고 경기장 안내와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다. 의전은 잘해야 본전이라고 한다. 100% 잘하다가도 조그마한 실수 하나가 나오면 전체를 망치는 것이 의전이다. 의전 업무가 나에게 주어진 이유가 있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태릉선수촌 담당이어서 각 종목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이다. 높은 분들이 경기장을 방문할 때 한국팀이 이기는 장소로 안내해야 좋아한다. 누구보다 그 방면에 탁월했고, 순발력도 있었다.

국회 문화체육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여섯 분이 선수단 격려차 오셨다. 권정달, 이세기, 임진출(여), 이경재, 최희준 의원 등이었다. 한국경기를 참관할 때마다 승리하니까 임진출 의원이 핸드볼 경기장에서 여자선수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이 왜 이긴 줄 아나? 우리가 '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야!" 나는 속으로 응답했다. “기는 무슨 기! 내가 이기는 곳으로 안내했기 때문이지.” 쓴웃음이 나왔다.

 

의전에서 중요한 것은 VIP를 노상에서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숙소나 경기장에서 나오는 즉시 탑승하도록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 힘든 일이다. 날씨가 더워 땀에 젖은 손수건을 짜면서 일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1년 후 서기관으로 승진되었다. 많은 분이 문체부 장관께 일 잘한다고 칭찬한 덕이다. 키 큰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중앙부처인 체육부에 근무하면서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큰 대회 때마다 고생을 많이 했다. 숙소는 항상 선수촌이었고, 새벽에 나갔다가 밤 한두 시에 돌아왔다. 잠이 부족했다. 마치고 나면 체중이 5kg씩 빠졌다. 보람도 있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어글리’ 올림픽?


올림픽의 성공 여부는 언론사 기자들이 결정한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성공했다고 평하면 그 올림픽은 성공한 것이다. 애틀랜타올림픽은 철저한 상업주의로 최고의 흑자를 기록한 훌륭한 대회였다. 모든 경기 시설은 신축하지 않고 기존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했다. 컨벤션센터를 7개 경기장으로 만들었고, 대회가 끝난 후 원상 복구했다. 경기 운영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세계언론이 어글리 올림픽이라고 혹평했다. 시내 중심가인 센테니얼 공원에서 폭발물이 터져 2명이 사망했지만, 경기 운영과는 별개였다. 이유가 있었다. 숙박, 교통, 편의시설 부족으로 기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은 것이다. 경기장에 갈 수 있는 교통편은 새로 개통한 지하철이 유일했다. 그러나 탈 수가 없었다. 경기장에 늘 지각했다. 분실사고도 잦았다. 우리나라 임원과 선수도 지하철에서 지갑과 금품을 도난당했다. 보안통제선 때문에 택시 이용도 할 수가 없었다. 전 세계에서 취재하러 온 많은 기자는 오죽했겠는가? 사진기자는 무거운 촬영 장비 때문에 고생을 더했다. 고통을 겪은 미디어 관계자들, 애틀랜타올림픽은 최악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보도했다.

▲ 애틀랜타 올림픽은 철저한 상업주의로 흑자를 낸 훌륭한 대회로 손꼽힌다. 그러나 경기 운영과 별도로 숙박, 교통, 편의시설 부족으로 관계자, 기자들은 곤욕을 치렀다

올림픽 마지막 날의 해프닝


올림픽 마지막 날에 해프닝이 있었다. 러시아에서 분리 독립한 그루지야(현재는 조지아)의 선수단 단장 바그레쇼니가 여권이 들어있는 중요한 가방을 분실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숙소 앞 건널목에서 일이 벌어졌다. 폐회식은 항상 일요일에 개최된다. 그날이 주일이어서 기독교인인 이경재 의원이 한인교회에 가겠다고 하여 차량을 준비, 호텔 앞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건널목에 이 의원과 바그레쇼니가 나란히 서 있었다. 차량이 오자 이 의원이 바로 탑승했다. 그때 선수단을 도와주던 교포 송기호 씨가 차 안에 가방을 실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지아 단장 가방이었다. 이 의원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별생각 없이 자리를 떴고, 몇 미터를 걸어가는데 덩치 큰 외국인이 실성한 사람처럼 “마이 백”을 외치는 것이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송기호 씨에게 물었다. "아까 차에 실은 가방이 무엇인가요?" 하니 “이 의원이 들고 온 것 아닌가요?”라고 한다. 내가 "이 의원은 빈손으로 나왔고, 아마 저 사람 가방인 것 같다." 하며 그에게 다가가 가방의 형태를 물어보니 맞는 것이었다.

그분은 조지아의 체육부 차관으로 선수단 단장이었다. 비행기 표와 여권이 가방 안에 있고, 한 시간 반 후에는 비행기에 탑승해야 한다며 펄펄 뛰었다. 나는 가방을 찾아주겠다고 안심시켰다. 삼성에서 제공한 핸드폰이 있어 비상 연락이 되었다. 이 의원을 내려주고 최대한 빨리 출발 지점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차가 도착해서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 사람은 자초지종도 모른 채 가방 찾은 것에 고마워하며 조지아를 한번 방문하라고 나를 포옹했다. 보내고 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호텔에 돌아왔다면, 도난신고 되어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우리는 난처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남의 가방을 확인하지 않고 차에 실은 우리 잘못을 그 단장은 알지 못하고 귀국했다. 

▲ 민관식 회장님은 애틀랜타에서 차량, 수행자도 없이 외롭게 혼자다니셨다. 미안한 마음에 나흘 간은 회장님이 원하시는 경기장으로 모시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진은 배드민턴 혼합 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김동문-나경민 선수의 시상식 장면이다.

엘리트체육선구자 민관식 회장


VIP 의전을 끝내면 며칠간 여유가 생긴다. 경기장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에 짚이는 분이 있었다. 민관식 회장님이다.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 발전의 선구자이시고, 체육계의 대부이신데, 애틀랜타에서는 차량도, 수행자도 없이 외롭게 혼자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나섰다. 4일간 원하시는 경기장으로 모시고 많은 대화도 나눴다.

민회장님은 개성 출신으로 일본의 명문 교토대에서 학사, 박사(법학) 학위를 받으신 수재이시다. 무 전공자에게 단 한 번 부여한 약사 시험에 합격하여 대한약사회장도 하셨다. 자유당 시절 종로에서 약관 36세에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된 후 내리 4선을 하셨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시고, 그해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셨다. 문교부 장관 시절 획기적인 엘리트 스포츠 중흥대책을 만들어 시행했다. 소년체전, 체육 중·고, 체육특기자, 체육연금, 병역특례, 코치아카데미 등이었다. 문화재 땅인 태릉에 대표선수 훈련장을 건립했고, 무교동에 대한체육회관을 만들어 경기단체에 사무실을 제공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스포츠 강국이 되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주워 담았다. 민회장님은 1979년도에 국회의장 하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고, 의장님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 2006년 88세에 영면하셨다. 그 전날, 좋아하던 테니스까지 하신 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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