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나의 삶 나의 농구] ㉒ 쿠웨이트 농구 코치가 되다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9. 22:43

본문

2022. 08. 05.

 

쿠웨이트로 향한 이유


1978년 3월 태릉선수촌에서 아시안게임 대비 강화훈련을 하던 중 급성간염으로 입원했다. 곧바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간염은 과로와 술을 조심해야 하고, 재발하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당시 소속은 전매청, 공무원 신분에 급여가 너무 낮았다. 은행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저축은 고사하고 생활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여자농구팀에서 코치직 제안도 있었지만, 지도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없었다.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이유는 술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술을 권한다.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간을 보호하기 위해 술이 없는 중동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쿠웨이트에서 코치 제안이 왔다. 스포츠클럽이었다. 중동 국가는 정부에서 스포츠클럽을 지어주고 운영 및 관리에 드는 예산까지 국가가 부담한다. 부유한 왕족이 후원하는 클럽은 호황을 누린다. 중동의 모든 직장, 학교는 1시에 끝난다. 집에서 낮잠을 잔 후, 5시쯤 소속된 클럽에서 스포츠를 즐긴다.

 

▲ 쿠웨이트 대표팀 감독 당시 협회에서 준 뷰익 6기통 승용차. 당시 집도 제공을 받았는데 거실은 운동장 같이 넓었다.


쿠웨이트행을 결정했다. 9개월 된 딸, 아내와 함께 쿠웨이트로 향했다. 계약 기간 2년, 제공된 집은 넓은 빌라였고, 거실이 운동장 같았다. 처음 만난 쿠웨이트 농구선수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기본기가 부족했다. 세심하게 지도할 수밖에 없었다. 출석률도 저조했다. 농구를 즐기러 오기 때문에 혼낼 수도 없다. 벌을 주면 바로 그만둔다. 10개 스포츠클럽이 나이별로 경기를 갖는다. 종목은 축구, 농구, 배구, 핸드볼, 탁구 등 구기 종목이 많고, 특히 축구를 선호한다.

현역 은퇴 직후여서 유명세도 치렀다. 농구 선배가 맡았던 한국교민회 사무총장을 내가 이어받았다. 중동 건설 붐으로 많은 한국인이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교민회가 하는 일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행사를 마련하는 것이다. 가장 큰 행사가 가을 체육대회다. 15개 건설회사끼리 경쟁하는 스포츠 축전이다. 회사의 명예를 건 입장식은 웅장하고 질서정연했다. 응원상을 타기 위해 카드섹션까지 도입한 회사도 있었다. 마치 전국체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종목은 축구, 육상, 줄다리기 등, 종합우승은 삼호 주택이 차지했다. 캠프 인원이 많았던 현대건설, 한양주택을 꺾었다.

대사관과 교민 행사에 전념하면서 집안을 등한히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집에 쌀과 식자재가 떨어져 굶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모슬렘 국가는 여자 혼자 상점에 갈 수가 없다. 백배사죄하고 반성했다. 그런 후에도 집에서 손님 치르는 일을 많이 시켰다.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 쿠웨이트 대표팀 주장(가운데)과 함께. 쿠웨이트 대표팀을 맡은 뒤 아랍대회 우승은 좋은 경험이었다.

 

가슴 뛰게 한 쿠웨이트 대표팀 감독 제안


쿠웨이트 생활 2년차인 79년 6월, 농구를 같이 즐기던 스포츠계 고위 임원으로부터 쿠웨이트 농구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출중한 농구 실력을 눈여겨본 것이다. 2개월 후 쿠웨이트에서 아랍농구대회가 열리는데, 쿠웨이트 대표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우승해야 한다는 당부도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꼭 우승하리라 다짐했다.

12개국이 참가한 아랍대회는 수준이 높았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의 이집트, 수단, 모리타니는 평균 신장이 2m 가까이 되는 장신 군단이었다. 흑인으로 구성된 모리타니는 특유의 점프력과 순발력으로 우승 후보 1순위였다. 치밀하게 준비했다. 첫 단계는 전지훈련을 추진했다. 한국과 필리핀으로 정했고, 가족 동반이 허락되어 1년 만에 반가운 친지를 만날 수 있었다. 부자 나라여서 예산은 풍부했다. 신라호텔에 투숙했다. 1979년 신라호텔은 엄청나게 비쌌다. 일반음식점 가격이 천 원인데, 호텔의 주스값이 3천 원이었다. 나를 만나러 온 친구, 가족, 후배들에게 기다리는 동안 마음껏 주문해 먹으라 했지만, 한참 후 가보면 그냥 앉아있었다. 너무 비싸 엄두가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전지훈련은 큰 효과를 가져왔다. 대학, 실업팀과의 연습경기가 실전경험에 도움이 된 것이다. 실력도 향상되었다. 필리핀을 거쳐 쿠웨이트로 돌아와 마무리 훈련을 했다. 이제 홈코트의 이점을 살려 우승하는 길을 궁리해야 했다. 머리를 짜냈다. 12개 나라 중 인근의 사우디, 바레인 등은 비교적 약하고, 아프리카가 강했다. 장신 군단 모리타니와 결승에서 맞붙었다. 심판의 도움 없이는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결승전 심판 한 명을 한국에서 초청하기로 했다. 왕복 항공료를 비롯해 충분한 조건으로 절친한 선배 심판을 초빙했다. 아랍국가가 아닌 제3국 심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관철했다. 무조건 우승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결승에서 모리타니에 5점 차로 승리했다. 쿠웨이트가 뒤집혔다. 난리가 났다. 중계가 끝난 후 모든 차량이 시내로 나와 경적을 울리며 우승을 축하했다. 상금도 받았다.

▲ 집에서 가족들과 한 컷. 이국땅에서 홀로 출산한 아내의 고생이 많았다.

 

둘도 없는 경험이 된 경험


아랍대회 우승시킨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시에 있는 명문 클럽에서 감독 제안이 왔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1980년 6월, 우리 가족은 사우디로 이주했다. 쿠웨이트에서 소중한 아들도 얻었다. 첫째가 딸인지라 너무 기뻤다. 즉시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로 소식을 알렸다. 부모님도 좋아하시며 며느리의 산후조리를 걱정했다. 쿠웨이트의 병원 규정은 출산할 때나 그 후에도 산모를 만날 수가 없다. 이국땅 병원에서 외롭게 혼자 아기를 낳은 것이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기분이 좋아 양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 2살짜리 딸을 돌보지 못했는데, 다음날 깜짝 놀랐다. 딸의 눈퉁이가 밤탱이가 된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산모가 혀를 찼다. 2살짜리 딸이 저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했냐고 울먹였다.

지도자 경험이 없었던 내가 쿠웨이트 대표팀을 맡아 우승시킨 것은 좋은 경험이었고,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 농구 지도자의 길을 가고도 싶었다. 그러나 10년 이상 쌓은 공무원 경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전매청 휴직 상태였다. 공무원 처우가 열악했지만, 그 길을 택했다. 농구 감독 자리는 매력적이지만, 성적으로 자리가 보존된다. 성적을 내려면 좋은 선수를 확보해야 한다. 유능한 감독도 우수한 선수를 만나지 않으면 쫓겨난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고 비참하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점프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