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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㉓ 사우디에서의 지도자 생활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2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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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06.

 

쿠웨이트에서 이란으로


2년간 쿠웨이트 코치 생활을 끝내고, 좋은 조건을 제시한 사우디아라비아로 자리를 옮겼다. 80년 6월이었다. 제다시에 있는 ‘에티하드’ 스포츠클럽으로 왕족이 후원하는 부유한 클럽이었다. 사우디는 모슬렘 국가 중 가장 율법이 엄한 나라이다. 도둑질하면 손목을 자르고, 살인, 강도, 성폭행범을 공개 처형하는 나라다. 여성은 운전할 수가 없고, 외출할 때는 얼굴과 몸을 가려야 한다. 여가문화를 위한 놀이시설이나 극장, 공연장이 전혀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술을 범죄로 다스리는 나라다. 술집은커녕 술 먹는 자체가 죄가 되는 곳이다. 외국인도 술 마신 것이 적발되면 1개월간 감옥에 있다가 곤장을 맞고 추방당한다.

 

사우디 인구가 1000만 명이었는데, 왕자가 1000명이 넘었다. 그들은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석유 수입에서도 배당받아 평생을 부자로 특권을 누리며 산다. 국가가 부유하기 때문에 국민에 대한 복지도 잘 되어있다. 자녀 수당을 매달 받고, 학교나 병원 등 모든 것이 무료다. 대학에 들어가면 월급을 받아 가며 공부하고, 졸업하면 국영기업체 과장 자리가 보장된다. 좋은 여건임에도 대학교 진학률은 낮은 편이다.

사우디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주택과 신형 차가 제공되었고, 관리비, 수도, 전기료까지 부담해 주었다. 생활비가 들지 않아 저축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곳에도 우리나라 근로자가 10만 명이나 있었다. 건설회사 간부를 초청해 음식 대접을 하면 육류를 비롯한 쌀, 채소 등 식자재를 듬뿍 싣고 온다. 살림살이가 넉넉하고 풍요로웠다. 한국에서 가져온 누룩으로 막걸리를 담가 먹는 즐거움도 있었다. 건설회사 간부들이 담근 술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섰다.

그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농구 실력은 우리나라 고교 팀 정도였다. 스포츠클럽 시스템으로 전국을 다니며 시합한다. 비행기로 이동하고, 5성급 호텔에서 호화판 식사를 한다. 원정경기에서 승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심판의 수준이 낮고, 횡포도 심하다. 그 지역 심판이어서 홈팀을 유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항의해 봐야 소용없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이슬람교도성지가 두 군데가 있다. ‘메카’와 ‘메디나’이다. 그곳에서 시합이 있을 때 나는 경기장에 갈 수가 없다. 두 도시는 이슬람교 신자만 들어갈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나홀로 외곽에 있는 호텔에 투숙해서 경기 결과를 기다린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메카에 있다고 주장하고, 죽기 전에 성지인 메카를 다녀와야 한다고 믿는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성지순례를 한다. 라마단(한 달간 낮에 금식) 기간에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 대형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 압사와 화재로 수백 명씩 죽는다. 두 도시의 외곽 도로명이 애니멀 로드(animal road)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이란다. 모슬렘이 아니면 모두 동물이라고 비하하는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다.

현대그룹은 중동 건설 붐으로 대재벌이 되었다. 정주영 회장의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사우디에서 이루어졌다. 1974년 주베일 항만 공사를 10억 달러에 수주했다. 우리나라 총 수출액이 40억 달러였을 때이다. 바다를 메워 10만 톤이 넘는 유조선이 정박할 부두를 만드는 공사다. 넓은 바다를 메우기가 쉬운 일인가? 10층 높이의 철 구조물을 포항제철에서 제작, 바지선으로 사우디까지 끌고 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공사 기간을 1년 앞당겨 떼돈을 벌었다. 
 

▲ 사우디에서 선수들과 함께. 사우디에서도 18세 이하 대표팀을 전국대회 우승시켰다


연예인들의 위문 공연


1981년 제다의 현대건설 캠프에 우리나라 노무자가 5000명 있었다. 그곳에 당시 유명한 연예인들이 위문 공연을 왔다. 사우디에는 여성이 입국할 수 없어 모두 남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희갑을 비롯한 유명가수와 코미디언들이었다. 공연을 끝내고 캠프에서 장예준 사우디대사와 함께 파티가 벌어졌다. 나도 초대되었다. 대사관에서 가져온 고급술이 있었다.


김희갑 씨가 노래를 시작했다. 무대에서 앙코르를 받아 여러 곡을 했는데, 술자리에서 또 뽑아대는 것이다. 나도 거들었다. 팝송과 함께 흘러간 가요를 좋아했고, 가사를 아는 덕에 그분과 함께 흥겹게 불러댔다. ‘애수의 소야곡’ ‘불효자는 웁니다.’ 등 10곡 이상을 같이 노래했다. 가수처럼 잘 부른다고 칭찬도 받았다. 오랜만에 술을 많이 마셔 취한 상태에서 운전했다. 경찰에 걸리면 끝장난다는 생각에 긴장했지만, 눈이 감겨 혼이 낮다. 늦은 시간이라 무사히 집에 돌아왔지만,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사우디에서의 성적은 좋았다. 20세 이하팀을 전국 우승시켰다. 청소년팀 1위는 대단한 것이다. 곧바로 성인팀 우승으로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선수 발굴이었다. 직접 찾아 나섰다. 키가 큰 젊은이를 보면 접근했다. 먼저 국적이 사우디인가부터 확인했다. 대어를 발견했다. 2m가 넘는 장신이었다. 나는 반가워 매달렸다. 신장이 크기 때문에 농구를 하면 대선수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 선수 덕에 청소년팀이 우승했다. 그 후 사우디 국가대표의 주전 센터가 되어 맹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제대회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받은 적이 있다.

 

▲ 사우디에서 찍은 가족사진. 사우디 측의 배려로 좋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체육부 이적


2년간의 계약 기간이 끝났다. 귀국을 준비하는데, 클럽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난감했다. 공무원 휴직은 2+2, 4년으로 규정되어있다. 복직하지 않으면 자동 퇴직이다. 아내와 상의했다. 그동안 많은 저축을 했고,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했다. 1년간 재계약한 후 귀국했다. 82년 7월, 휴가차 귀국해 보니, 중앙부처 체육부가 신설되어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초대 장관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체육부에 현역 때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 국장으로 있었다. 체육기자 출신으로 경기고, 고려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노태우 장관이 발탁했다. 사모님은 국가대표 배구선수 출신으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했고, 친분이 있었다.

체육부 이적에 희망을 품고 그분을 만났다. 재계약을 했기 때문에 1년간 휴직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체육부에서 대환영이었다. 발족하자마자 전문체육인이 있느냐? 국가대표 출신이 있느냐? 등의 질문을 국회 등에서 많이 받았는데, 내가 등장한 것이다. 장관 직권으로 전매청에서 체육부로 이적되었고, 1년간 휴직이 이루어졌다. 사우디로 출국했다.

1983년 7월부터 체육부에서 대표선수 훈련 담당을 맡아 올림픽 등 국제대회 현장에 파견되어 선수단을 도왔다. 유일한 국가대표 출신으로 누구보다 스포츠 현장 감각이 앞선다는 말을 들으며 열심히 일했다. 서기관으로 공무원을 마쳤다. 돌이켜보면 내 직업은 평생 공무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발 벗고 체육부 이적에 힘써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 덕에 공무원 평생 연금을 받고 있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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