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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타자' 이승엽의 '일곱 홈런 이야기'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9.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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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이승엽 일러스트 / 출처=KBO

 

이승엽은 원래 투수였다

 

“저는 투수 할 거라서 타자는 신경 안 씁니다.”


1995년 초. 삼성 라이온즈의 박승호 타격코치는 당황했다. 팔꿈치 수술을 받고 1년 동안 재활을 하게 된 고졸 신인 투수가 방망이 실력이 괜찮아 보여 ‘투수 못하는 동안 타자를 해보자’고 권유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박 코치도 오기가 생겨 3주 동안 매일 같이 권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


“절대 안 한데요. 생긴 건 순한 양인데 고집은 황소였어요.”

 

‘고집불통’ 이승엽을 타자로

 

박승호 코치는 몰랐다. 평생 어른들 말에 토 한 번 안 달았을 것 같은 19살 예의 바른 순둥이가, 사실은 못 말리는 ‘고집불통 인생’을 살아왔다는걸. 부모님 허락도 없이 초등학교 야구부에 가입부터 한 뒤, ‘단식 투쟁’을 벌여 결국 유니폼을 입었고, 중 고교 진학 때 학교의 추천과는 다른 곳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관철했다는걸. 지금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도, 예정됐던 대학 진학을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수능을 망친 결과라는 걸.

 

그런 이승엽이 옥신각신 끝에 ‘타자 한번 해 보겠다’고 고집을 꺾은 건 이례적인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한국 야구사를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별명에 ‘국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가수, 국민배우, 국민 감독... 오랜 세월 우리에게 행복과 감동을 준 거장에게 그렇게 존경을 바쳤다. ‘국민타자’라는 별명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한국과 일본 프로 무대에서 친 626개의 홈런과 국제무대에서 숱한 드라마틱한 홈런들을 친 위대한 선수에 바친 헌사였다.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한국 야구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해 우리를 울렸던 이승엽의, 가장 위대한 일곱 장면을 되돌아본다.

 

1.  2000.9.7. 시드니올림픽 3-4위전

 

어렵게 ‘1년 간 타자 실험’을 결심한 이승엽은 무섭게 성장해갔다. 정교한 중장거리 타자로 시작해, 3년 차부터는 본격적으로 슬러거의 길을 걸었다. 1997년 첫 홈런왕, 1999년 프로야구 사상 첫 50홈런을 달성하며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최초로 ‘프로 드림팀’이 구성돼 출전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간판타자는 당연히 이승엽이었다.

 

문제는 이승엽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8월 말 정규시즌 경기에서 도루를 하다 무릎을 다쳐 올림픽 개막 전 20일 가까이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가까스로 합류는 했지만 대회 중반까지 선발로 뛸 수 없었다. 간판타자의 부재 속에 대표팀은 예선 탈락 위기에 몰렸다. 여론까지 흉흉해졌다. 이승엽 등 선수들이 대회 중에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했다는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었죠. 저는 그 시간에서 선수촌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거든요. 원래 도박 좋아하지도 않아서 카지노 근처는 얼씬도 안 했는데 제 이름이 기사에 나왔더라고요. 아프고 실전 감각이 없어서 안타도 아예 못 쳤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절박한 위기에서 믿기지 않는 활약을 펼치는 이승엽의 습관(?)은 그때 시작됐다.

 

▲ 마쓰자카 vs 이승엽, 국민타자로 다시한번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 사진출처=KBO

 

2승 3패의 대표팀은 예선 6차전에서 일본을 만났다. 지면 탈락하는 벼랑 끝 승부. 상대 선발투수는 일본 최고의 스타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마쓰자카는 1회 초구로 시속 150km의 직구를 한가운데 던졌다. 여기서 이승엽의 방망이가 깨어났다. 6경기 만에 터진 대회 첫 안타가, 시원한 투런 홈런이 됐다.

 

연장전 끝에 이 경기를 잡고 4강에 오른 대표팀은 미국과 준결승에서 ‘빗속의 혈투’ 끝에 끝내기 패배를 당해 3-4위전으로 밀렸다. 동메달을 다툴 상대는 다시 일본이었다.

 

“비를 쫄딱 맞으면서 미국에 지고 새벽 3시에 선수촌에 들어갔는데, 다음날 일본전이 낮 12시라는 거예요. 당시에는 스파이크랑 배팅 장갑 같은 장비가 하나씩밖에 지급되지 않았어요. 다음날 일어났는데 신발이 아직 젖어 있는 거예요. 다들 걱정했죠. 경기를 어떻게 하지?”

 

우리 선발 구대성은 감기 몸살을 앓고 있었고, 상대 선발은 또 마쓰자카였다. 구대성이 초인적인 역투를 펼쳤지만, 우리 타선도 마쓰자카를 공략하지 못했다. 8회 투아웃 2-3루 기회를 잡았지만, 앞서 3연타석 삼진을 당한 이승엽에게 희망은 많지 않아 보였다. 풀카운트. 1루가 비어있었고, 마쓰자카는 세 번 모두 삼진을 유도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다. 여기서 마쓰자카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직구 정면승부였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마쓰자카는 이 공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포수의 사인이었다”고 밝혔다.)

 

▲ 약속의 8회의 시작,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 사진출처=KBO

 

타자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직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변화구 노리다가 직구가 들어오면 대응을 못 할 것 같았거든요. ‘모 아니면 도’였죠.”

 

이번에도 마쓰자카의 직구는 한가운데를 향했다. 평소보다 짧고 날카로운 이승엽의 스윙에 정확하게 걸렸다. 좌중간을 총알같이 가르는 2타점 2루타. 한국 야구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  2002.11.10. 한국시리즈 6차전

 

2002년 홈런왕 경쟁은 뜨거웠다. 이승엽과 심정수가 마지막까지 피 말리는 각축을 펼쳤다. 마지막 경기를 남기고 나란히 46개씩으로 동률이었다.

 

“홈런왕을 해보겠다고 스윙이 저도 모르게 많이 커졌습니다. 결국 마지막 경기 연장전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쳐서 홈런왕이 됐죠. 그 커진 스윙을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는 3주 동안 수정을 못 한 거예요.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철저하게 당했죠.”

 

한국시리즈에서 이승엽의 부진은 처참했다.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6차전 네 번째 타석까지 성적이 20타수 2안타. 삼성이 3승 2패로 앞서 있었지만, 9회말까지 석 점 뒤져 승부는 7차전으로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도 20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 한 ‘달구벌의 저주’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삼성 하면 1등이었잖아요. 그런데 야구만 2등이었어요. 한이 맺혀있었죠. 특히 그 전해 정규시즌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도 두산한테 진 충격이 컸습니다. 이번에도 지면 정말 우승은 영원히 못할 것 같았어요”

 

암울해지는 상황에서, 이승엽은 기분 전환을 위해 배트를 바꿨다.

 

“배리 본즈가 쓰던 배트였어요. 2002년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에 초청받아 갔을 때 두 자루를 받아 왔었거든요. 워낙 안 맞아서, 그날 처음 꺼냈어요.”

 

9회말 원아웃 1-2루 기회. LG 마운드는 그해 가을 투혼의 역투를 이어가던 이상훈이 지키고 있었다. 이승엽은 이때까지 이상훈을 상대로 홈런이 하나도 없었다. 이승엽은 2구째 직구에 대비했다. 이상훈은 슬라이더로 의표를 찔렀다. 하지만 코스가 한가운데였다. 이승엽의 커진 스윙에 공이 걸렸다. 당시 중계방송을 맡은 SBS 윤 모 PD는 연세대 야구부 4번 타자 출신의 야구 전문 PD였다. 소리만 듣고도 타구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맞는 순간 동점 스리런 홈런을 직감한 윤 PD는 치솟은 타구가 관중석 떨어지기 전, 잠깐 타자를 화면에 잡았다. 타자는 두 팔을 들고 타석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 2002년 한국시리즈, 이승엽의 기적 같은 동점포  / 사진출처=KBO

 

제가 평소에는 세리머니가 큰 편이 아니었죠.

하지만 그 순간을 어떻게 참겠습니까?

그 홈런을 안 쳤으면 저는 지금 어떻게 돼 있었을까요?

 

믿기 힘든 홈런이 터지는 순간, 대구구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다음 타자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자 모두가 오열했다. ‘정규리그만 강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가 20년의 한을 푸는 순간이었다. 혈을 뚫은 삼성은 이후 한국시리즈를 7차례 제패하며 진짜 명문구단으로 올라선다. 그래서 삼성 팬들의 가슴이 기억하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이승엽의 최고의 홈런은 당연히 이 장면이다.

 

3.  2003.10.2. 56호 아시아 신기록

 

2003년 여름, 난데없이 잠자리채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아시아 프로야구 홈런 신기록에 도전하는 이승엽의 역사적인 홈런공을 잡아보려는 팬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외야석부터 채웠다. 롯데가 3년 연속 꼴찌로 추락해 텅텅 비었던 사직구장에도 오랜만에 구름 관중이 몰렸다. 이들은 롯데가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걸려 보내자 오물을 투척하며 홈팀을 질타했다.

거침없던 이승엽의 질주는 결승선을 앞두고 주춤거렸다. 55호 홈런 이후 일주일 동안 홈런포가 침묵했다. 운명의 마지막 경기. 전날 광주 원정을 마치고 새벽에 대구에 도착한 이승엽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 이송정 씨는 “오늘은 홈런 치지 말라”고 부담을 덜어주려 애썼다.

 

롯데 선발투수는 2년 차 신예 이정민이었다. "피할 이유가 없고 정면 승부를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2회 첫 타석, 이정민은 예고대로 씩씩하게 정면승부를 펼쳤다. 3구째 한가운데 직구를 이승엽은 가볍게 밀어 쳤다. 낮은 궤적의 2루타 같아 보인 타구가 계속 뻗어나갔다. 공은 좌중간 담장 넘어, 신기록에 대비해 플래카드를 준비해놓고 있던 이벤트사 직원의 손에 떨어졌다. 아시아 프로야구 최초의 56호 홈런이었다. AP, AFP 등 세계 주요 통신사들이 대구발 긴급뉴스로 전 세계에 소식을 전했다. 심지어 평양 고려호텔에도 NHK 뉴스 라이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즉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세계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솔직히 너무 기대가 커서 부담도 컸습니다.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치지 않았다면 남은 타석을 버티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세계 야구사에 이름을 남기고도, 이승엽은 평생의 꿈이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빅리그 구단들이 한국 야구의 수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무대에서 절치부심하던 2006년 봄, 이승엽은 자신을 과소평가한 세계 야구계를 뒤흔든다.

 

4.  2006.3.5. WBC 1라운드 한일전

 

1990년대 세 차례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수준차가 뚜렷하게 보였다. 최초의 ‘프로 정예 대표팀’ 대결이었던 2003년 아시아선수권 결승전에서도 완패를 당했다. 그래서 2006년 제1회 WBC 1라운드 한일전에서 7회까지 2대 1로 뒤진 상황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8회, 원아웃 1루 기회를 잡았지만 희망은 크지 않아 보였다. 다음 타자 이승엽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한 몸살이 걸려 있었습니다. 도핑 테스트 때문에 몸살약을 못 먹었거든요. 컨디션이 최악이었습니다.”

 

일본 구원투수 이시이 히로토시는 조심스럽게 승부했다. 3볼 1스트라이크로 이승엽에게 유리한 상황. 한국이라면 직구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일본 야구를 2년 경험한 이승엽은 다른 답을 알고 있었다. “일본 투수들은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변화구 확률이 높습니다. 이시이는 슬라이더가 좋기 때문에 슬라이더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공이 들어왔어요.”

 

총알 같은 타구가 도쿄돔 우중간 관중석에 꽂혔다. 믿기지 않는 역전 홈런에 흥분한 소수 한국 응원단의 함성이 도쿄돔을 가득 채웠다. 나루히토 천황(당시 황태자) 부부를 포함해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던 4만여 일본 관중은 침묵에 빠졌다.

 

“그 정적이 너무 기분 좋았습니다. 그 분위기는 지금도 못 잊습니다. 정말 이기고 싶은 경기를, 정말 이겼네요.”\

 

5. 2006.3.14. WBC 미국전

 

이승엽은 2라운드가 열린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스타 투수들을 잇따라 두들겼다.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직전 시즌 15승 투수인 로드리고 로페스로부터 선제 투런 홈런을 뽑아냈다. 다음 날 열린 미국전은 더 충격적이었다. 미국 선발은 2003년 신인왕, 2005년 22승으로 빅리그 전체 다승왕인 돈트렐 윌리스였다. 몸을 뒤틀었다가 던지는 까다로운 투구폼으로 왼손 타자의 31%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좌승 사자’였다.

 

이승엽의 노림수는 ‘초구 공략’이었다.

 

“카운트가 몰리면 불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초구가 위력적이지 않았어요. 몸이 좀 덜 풀렸던 것 같아요.”

 

예상대로 들어온 초구 직구는 이승엽의 방망이에 걸려 끝없이 뻗어나갔다. LA 에인절스 스타디움의 우중간 관중석에 떨어지는 초대형 투런 홈런. ‘한국이 야구로 미국을 이기는’ 허황된 상상을 현실로 만든 한 방이었다.

 

이승엽은 WBC 초대 홈런-타점왕에 올랐다. ESPN은 이승엽을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는 선수’로 평가했다. 3년 전, 대구까지 와 이승엽을 관찰했던 토미 라소다 당시 LA 다저스 부사장은 “우리가 정말 큰 실수를 했다”고 대놓고 후회했다. 이후 요미우리의 파격적인 제안에 메이저리그행 꿈을 접었지만, 최전성기의 이승엽은 분명 ‘세계가 주목한 선수’였다

 

6.  2008.8.22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 한일전

 

서른 즈음에 접어든 이승엽은 악화되는 손가락 통증에 신음했다. 손가락을 조심하려다 스윙이 망가져 부진에 빠졌다. 요미우리 구단은 이승엽의 부상을 우려해 올림픽 참가를 만류했다. 이승엽은 구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다.

 

“올림픽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죠. 후배들과 예선을 뛰면서 약속도 했습니다. 본선에서도 꼭 같이 뛰자고.”

 

정작 올림픽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대표팀은 승승장구했지만 이승엽은 부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예선 7경기 타율 0.136. 끝이 안 보이는 슬럼프에, 당시 막내 김현수에게 “어떻게 하면 잘 칠 수 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준결승은 또 한일전이었다.

 

“저희 더그아웃 위에서 우리 팬이 “이승엽 빼!”라고 외치시더라고요. 한일전을 앞두고 야유를 들으니까 멘탈이 완전히 깨져 있었습니다.

 

첫 타석 삼진. 두 번째 타석 병살타. 세 번째 타석 또 삼진. 2대2 동점이던 8회 원아웃 1루 기회에서 타석에 들어가며, 이승엽은 계속 뒤를 돌아봤다.

 

“바꿔줬으면 했어요. 김경문 감독님은 외면하시더라고요.”

 

상대는 NPB 역사상 최고의 구원투수인 이와세 히토키. 이승엽이 그때까지, 그 후에도 안타를 하나도 치지 못한 특급 좌완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풀스윙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몸쪽은 자신이 없어서 바깥쪽만 보자고 생각을 했죠.”

 

힘 있는 바깥쪽 직구 두 개로 노 볼 2스트라이크가 되자, 승부는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이승엽의 생각은 달랐다. “2구째 파울을 쳤는데, 그때 감이 왔어요. 이 스윙이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의 가장 극적인 순간 / 사진출처=KBO

 

1볼 2스트라이크에서, 이와세의 장기인 투심 패스트볼이 가운데에서 약간 몸쪽으로 휘어들어 왔다. 이승엽은 조금 전 느낌 그대로 방망이를 돌렸다.

 

“파울이나 내야플라이 가능성이 높을 타이밍이었는데, 스윙이 짧게 잘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홈런인지 몰랐습니다. 체공시간이 너무 길었거든요. 그런데 우익수 이나바 선수가 펜스에 붙더니 글러브를 내리더라고요. 그때부터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대회의 비중과 승부의 무게, 이후 파장을 고려할 때 한국 야구 대표팀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홈런이 이 한 방이라는 데는 이견이 별로 없다. 한국을 ‘올림픽 챔피언’으로 만들고, 야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까지 야구팬으로 바꿔놓은 홈런. 무엇보다 짓누르던 부담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이승엽은 경기 후 목이 메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눈물의 인터뷰’를 마친 뒤, 이승엽은 김경문 감독에게 물었다. 왜 자신을 교체하지 않았느냐고.

 

“바꾸는 순간 지는 거야. 해낼 줄 알았어.”

 

7. 2017년 10월 3일 ‘굿바이 국민타자’

 

2017년 10월 3일. 23년 선수 인생의 마지막 출근길. 라이온즈파크 선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린 이승엽의 소감은 “야구장에 오기 싫었습니다.”였다. 그래도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예전처럼 배트를 길게 쥐고 호쾌한 스윙을 해보자.’ 마지막이니까, 경이로웠던 그때 그 스윙을.

 

정말로 홈런을 칠 줄은 본인도 몰랐다. 그것도 두 방이나.

 

▲ 굿바이 라이언킹, 국민타자 이승엽 / 사진출처=KBO

 

넥센 선발 한현희도 전력을 다해 승부했다. 1회 첫 타석에서 시속 148km를 찍었다. 이승엽은 간결하게 받아쳤다. 36번의 유니폼, 수건이 가득 찬 우중간 관중석에 떨어지는 투런 홈런. 프로야구 사상 첫 ‘은퇴 경기 홈런’이었다. 더 이상 완벽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승엽은 언제나 그랬듯 예상을 깼다. 두 번째 타석에서 시속 149km짜리 강속구를 다짐대로 호쾌하게 받아쳤다. 비거리가 무려 150.4m. 2017년 프로야구에서 나온 1,547개의 홈런 중 최장거리 홈런이었다. 측정 장비 운용사도 너무 놀라 미국 본사에 시스템 점검을 의뢰했지만 문제가 없었다. 타구의 비거리에는 타자의 스윙 완성도가 담겨 있다. 완벽한 기술이 긴 비거리를 만든다. 그러니까 이승엽은 떠나는 순간까지, 최고였던 거다.

 

이성훈 기자 / SBS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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