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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이종범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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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이종범 일러스트 / 출처=KBO

 

야구하면 이종범

 

프로야구에서 계속 회자되는 말이다. 야구의 기본이 치고, 달리고, 던지는 것이라고 할 때 이종범은 어느 하나 뺄 수가 없다. 공격, 수비, 주루 다 능했다.


프로야구 출범 뒤 40년 동안 ‘5툴 플레이어’라고 하면 ‘이종범’이라는 이름이 늘 맨 처음 거론되는 이유다. 이종범은 일명 ‘토털 패키지 선수’였다

 

신인 이종범, 신인왕 대신 유격수 골든글러브

 

1970년생인 이종범은 1993년 프로에 데뷔했다. 광주일고, 건국대를 거쳐 해태 타이거즈 신인1차지명으로 프로에 발을 들인 그는 전 경기(126경기)에 출전해 타율 0.280, 133안타(2위), 16홈런(4위) 53타점 85득점(1위)의 성적을 냈다. 도루(73개)는 전준호(75개·롯데 자이언츠)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공격보다는 수비로 더 평가받는 유격수 포지션에서 신인답지 않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양준혁(당시 삼성 라이온즈)에 밀려 최우수 신인상은 놓쳤다. 당시 양준혁의 성적은 타율 0.341, 23홈런 90타점이었다. 다만, 유격수 골든글러브는 거머쥐었다

 

이종범이 보여준 악착 같은 야구

 

아마추어 때부터 이미 유명했던 이종범이다. 광주 서림초, 충장중에 우승을 안겼고, 청룡기 결승전에서 연장 11회말 끝내기 역전 2루타를 기록하며 광주일고를 39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9년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의 에이스 노모 히데오 공략에 성공(4타수 2안타 2도루)하며 대회 MVP를 차지했다. 그때가 건국대 1학년이었다.

 

이종범의 야구 이유는 분명했다. 어렸을 적 그의 집은 가난했고, 어머니(김귀남 씨)가 손수레 행상까지 했다. 7남매 중 막내였으나 어머니의 고생을 보면서 야구로 성공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 때문에 아마추어 때부터 악으로, 깡으로 야구에만 매달렸다. 1988년 광주일고 졸업 후 건국대를 택한 것도 사실 “국가대표를 하고 나면 프로 계약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 신인시절 이종범 선수  / 사진출처=KBO

 

젊은 시절 수많은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야구에만 몰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종범은 “집안 막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현실에 펼쳐지니까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운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돈을 많이 벌자는 게 목표였고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르는 게 프로였으니까 더 악착같이 했다”라고 밝혔다.

 

역사적인 1994 시즌

 

동기 부여가 확실하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어진다. 1994년이 그랬다. 2년차 징크스는 없었다. 팀 주축 투수 선동열의 부진과 함께 팀 성적이 곤두박질친 가운데 이종범만은 그만의 독무대를 만들었다. 오죽하면 ‘해태의 이종범’이 아닌 ‘이종범의 해태’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이종범은 그해 124경기(전체 126경기)에 출전해 타율(0.393), 안타(196개), 도루(84개), 출루율(0.452), 득점(113개) 1위에 올랐다. 타율은 KBO리그 유일한 4할 타자인 백인천(80경기 타율 0.412·당시 MBC 청룡) 이후 가장 높은 성적이었다. 정규리그 MVP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 1994년 MVP를 차지한 이종범 / 사진출처=KBO

 

꿈의 4할 타율도 거의 닿을 뻔했다. 8월21일 광주 쌍방울 레이더스전에서 4타수 4안타를 치면서 4할 고지를 밟았다. 시즌 104번째 경기였다. 하지만 육회를 먹은 게 탈이 나 계속 설사를 했고 이후 3경기에서 13타수 1안타에 그쳤다. 지금 같으면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는 게 당연했으나 팀 분위기상 그럴 수 없었다. 식중독과 함께 떨어진 타율을 다시 회복하기는 힘들었다. 이종범 또한 “배탈만 아니었으면 4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건창(현 LG 트윈스)이 2014년 히어로즈 시절 일궈낸 ‘시즌 200안타 시대’도 이종범이 일찌감치 열어젖힐 수 있었다. 200안타에 단 4개만 부족했다. 발이 빨랐던 그가 좌타자였다면 쉽게 달성될 수도 있던 기록이었다. 좌타자 타석은 1루 베이스에 더 가까워서 우타자보다 두 걸음 정도를 절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태생적으로 왼손잡이였다.

 

그 당시 희귀했던 좌투우타

 

이종범은 야구만 오른손으로 한다. 밥도 왼손으로 먹고, 당구도 왼손으로 친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야구를 시작할 당시 왼손잡이용 글러브가 귀했다. 당시 야구부 감독이 유격수 포지션을 권유한 탓도 있었다. 유격수 수비를 오른손으로 하다 보니 타석도 자연스레 오른쪽에 서게 됐다. 1970년대 후반은 지금은 비교적 흔한 우투좌타를 생각할 수 없던 시대였다.

 

이종범과 종종 비교되는 스즈키 이치로(일본)가 우투좌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종범도 시도만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2004년 262안타)을 세운 이치로의 경우 내야 안타 비중이 25%에 이르렀다. 현역 시절의 아쉬움 탓인지 이종범은 아들인 이정후(키움 히어로즈)가 맨 처음 야구를 한다고 했을 때 “왼손 타자로 바꾸면”이라는 유일한 조건을 내걸었다. 이정후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잡이다.

 

왼손잡이가 ‘정말 잘 치는’ 오른손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종범은 “1979년 당시에 아버지가 집 앞에 타이어를 박아주셨다. 하루에 빈 스윙을 300개 하고, 타이어를 300개 쳤다. 매일같이 1시간48분(그는 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동안 10년 하니까 타격이 많이 늘었다”라고 했다. 당시 ‘타이어 훈련’에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던 김기태 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도 있었다. “‘좌기태 우종범’이 함께 서서 방망이로 타이어를 쳤다”라고 한다.

 

파워까지 겸비한 무시무시한 타자

 

이종범은 단지 콘택트 능력만 있는 타자가 아니었다. 장타력 또한 겸비했다. 데뷔 해부터 일본리그 진출 전까지 매해 홈런 10위 안에 들었다. 1997년 이승엽(당시 삼성 라이온즈)과 치열하게 홈런왕 경쟁을 펼친 것만 봐도 그렇다. 당시 이승엽(32개)에 이어 양준혁과 함께 홈런 공동 2위(30개)에 올랐다.

 

홈런과 함께 전매특허인 도루도 64개나 기록하면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이종범은 그해 볼넷도 87개나 얻었는데 고의4구만 30개였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투수들이 제대로 승부를 했다면 KBO리그에 전무후무했을 홈런, 도루 모두 1위의 발 빠른 강타자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아들, 일본 진출하다

 

국내에서 승승장구하던 이종범은 1998년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했다.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모그룹 해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기회가 생겼다. 박건배 당시 구단주는 맨 처음에는 전력의 핵인 이종범의 일본 진출 불가 방침을 세웠다가 주니치 드래건즈의 끈질긴 요청과 큰 이적료 수입(4억5천만엔·45억원) 때문에 결국 허락했다.

 

이종범은 2년간 임대조건이었던 선동열과 달리 완전 트레이드로 주니치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계약금 5천만엔과 연봉 8천만엔 등 첫해에만 1억3천만엔(약 13억원)을 챙겼다. 그가 해태에서 받던 연봉(1997시즌 1억1000만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액수였다.

 

이종범에게 일본은 기회의 땅이자 성공의 땅이었다. 첫해(1998년) 초반 성적도 좋았다. 시즌 56경기에 출전해 타율 0.285, 9홈런 28타점 32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8년 6월23일. 그의 야구 인생 전반을 바꿔놓은 일이 벌어졌다. 이종범은 이날 한신 타이거스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가 던진 공에 오른쪽 팔꿈치를 맞았다. 맞는 순간부터 뼈가 부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큰 부상이었다.

 

그때 그는 병원에서, 집에서 펑펑 울었다. 이종범은 “이전까지 큰 부상도 없었고 뼈가 부러지지 않는 한 경기에 나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봉 8000만엔(8억5000만원)이면 옵션이 8000만엔이던 시절이어서 5년 정도 풀타임을 뛰면 우리 가족 평생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모든 게 어긋났다”면서 “일본 진출 첫해에 많은 것을 못 보여주고 다쳐서 더 분노한 것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한동안 못 한다는 것도 화가 너무 났다”라고 돌아봤다.

 

이종범은 팔꿈치 골절 이후 3~4개월을 쉬면서 타격감을 완전히 잃었다. 수비 위치도 외야수로 바뀌었다. 이종범은 “안쪽에 핀을 박은 게 부담스러웠는지 방망이가 계속 가슴에 못 붙여 나왔다. 인코스에서 아웃코스로 방망이를 끌고 나와야 하는데, 아웃코스에서 인코스로 들어왔다”면서 “타격 메커니즘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타격 리듬감이 흐트러졌고 자신감도 떨어져 원형탈모증까지 생겼다. ‘아차’ 하는 한순간 때문에 일본에 갔을 때 생각했던 모든 게 무너졌다”라고 밝혔다. 그는 2001년 6월 주니치와 계약을 해지한 뒤 그해 8월 해태에서 기아(KIA)로 모기업이 바뀐 타이거즈로 복귀했다. 일본리그 통산 성적은 타율 0.261(1095타수 286안타), 27홈런 출루율 0.334.

 

국내 리그 유턴, 이종범은 이종범

 

비록 일본 진출 이전과는 달랐으나 그래도 이종범은 이종범이었다. 복귀 첫해 45경기만 뛰고도 타율 0.340, 11홈런 37타점을 올렸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꾸준하게 시즌 100안타 이상을 쳐냈다. 4년간 그는 평균 타율 0.295, 15.2홈런, 38.8도루를 기록했다. 2002년 도루 3위(35개), 2003년 최다안타 2위(165개), 도루 1위(50개), 2004년 득점 1위(100개) 등의 성적을 냈다.

 

▲ KIA로 돌아온 이종범, 역시나 공수만능 그 모습이었다. / 사진출처=KBO

 

처절하게 야구했던 '종범신'

 

이종범은 한국시리즈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두 차례나 수상(1993년, 1997년)한 큰 무대 체질이었다. 데뷔 첫해 처음 치른 한국시리즈 5~7차전에서 총 7개 도루를 성공시키기도했다. 2006년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는 7경기에서 25타수 10안타(2루타 6개)를 터뜨리면서 대회 올스타로 선정됐다. 일본과의 8강전에서 0-0으로 팽팽하던 8회초 1사 2, 3루 때 터뜨린 2타점 2루타는 한국 야구사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 가을 야구가 시작되면 가장 요주의 인물은 이종범이었다. / 사진출처=KBO

 

2011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이종범은 통산 타율 0.297(6060타수 1797안타), 194홈런 510도루의 성적을 남겼다. 더불어 시즌 최다 도루(84개), 24경기 연속 도루(이상 1994년), 한 경기 최다 도루(6개·1993년), 시즌 최다 고의4구(30개·1997년) 등의 신기원을 열었다.

 

연속 경기 출루 기록이나 시즌 최다 안타 기록도 향후 깨지기는 했으나 그가 새롭게 썼었다. 시즌 타율 0.393(1994년)는 백인천 다음으로 가장 높은 단일 시즌 타격 기록으로 남아 있다. 시즌 100경기 이상까지 4할 타율을 유지했던 이는 KBO리그 40년 역사상 이종범이 유일하다. 과거의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야구는 이종범’이 맞다.

 

이종범은 처절하게 야구를 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파서 바람만치 빨리 뛰었고 타석에 바짝 붙어 벼락같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의 간절한 바람은 열정을 낳았고 열정은 대기록을 남겼다. ‘바람의 아들’은 말한다. “나에게 야구는 생계 수단이었다.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야구를 했는데 결국엔 야구가 행복을 줬다.” 그의 야구는 이정후로 대물림 되면서 세계 최초 부자 타격왕 등 또 다른 리그 역사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이종범이 프로야구에 일으킨 바람은 아직도 휘몰아치고 있다.

 

김양희 기자 / 한겨레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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