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그라운드의 여우…'야구는 김재박' 시대가 있었다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9. 23:15

본문

▲ KBO 40주년 특집 김재박 일러스트 / 출처=KBO

 

‘삼류 선수’에서 ‘불세출의 유격수’로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는 말이 있다. 이종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야구는 김재박’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의 대한민국처럼, 모든 게 부족하고 허술했던 그 시절의 한국야구. 그런데 공·수·주에 센스까지 모두 갖춘 ‘신개념의 유격수’ 김재박이 출현했다.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은 아마추어와 프로야구 시대를 관통하던 1970~1980년대 불세출의 유격수로 자리매김하면서 한국야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모든 유격수의 우상 ‘그라운드의 여우’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근데 이종범 이전에 김재박이 있었어. 발이 빠르고, 수비범위도 넓고, 어깨도 강하고, 방망이도 잘 치고…. 김재박 이후에 이종범이 나왔지만, 그 시절 한국야구에 김재박하고 비교할 유격수는 없었어.” -김응용 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중학생 때 대구구장에 갔다가 실업팀 한국화장품 소속의 김재박 선수를 보고 세 번 놀랐다. 유격수로서 3·유간 땅볼을 잡아 1루로 빨랫줄처럼 던지는 어깨를 보고 놀랐고, 1번타자로 나서서 기습번트로 살아나가더니 도루를 하고 홈까지 들어오는 발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마무리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팀 승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도 김재박 선배님 같은 만능 유격수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류중일 전 삼성·LG 감독.

 

“김재박 선배님이 롤모델이었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유격수’ 하면 김재박이었다. 김재박 선배님 같은 유격수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도 등번호를 선배님과 같은 7번을 달았다.” -이종범 LG 퓨처스 감독.

 

KBO 11년간 통산타율 0.273, 972안타, 28홈런, 284도루. 이 수치만 놓고 보면 왜 이 선수가 ‘KBO 40주년 레전드 40인’에 선정됐을까 싶어 고개를 갸웃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수 이름이 ‘김재박’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에게 김재박은 ‘기록’ 그 이상의 ‘기억’과 ‘추억’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1984년 골든 글러브 시상식 장면. 우측에서 3번째 선수시절의 김재박 / 사진 출처=KBO

 

강대중-박종일-하일-김재박-류중일-이종범-박진만…. 해방 이후 한국야구 유격수 계보를 논할 때 김재박은 그 중심에 있다. 김재박 이전 국가대표 유격수는 안정된 수비를 자랑하는 이들의 몫이었지만, 김재박이 나타난 뒤로는 국가대표 유격수 자격에 대한 눈높이 자체가 달라졌다. 김재박은 한국야구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야구의 위상까지 끌어올린 주인공이었다.

 

‘김재박’ 하면 떠오르는 ‘개구리번트’의 전설

 

“슈퍼스타 그러면 김재박 선수 아닙니까. 아마에서~. 그러면 여기서 김재박 선수의 진가를 한번 보여줘야 되는 거죠.”

 

타석에 김재박이 등장한 순간, MBC 허구연 해설위원(현 KBO 총재)의 목소리는 고조됐다. 허 위원의 기대감 넘치는 목소리에 팬들의 기대감도 덩달아 치솟았다.

 

‘그래, 김재박이라면.’

 

모두가 마른 침을 삼킨 채 마운드에 선 일본 투수 니시무라와 타석에 선 김재박의 건곤일척 승부를 지켜봤다.

 

1982년 9월 14일 잠실야구장.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최종전. 한국은 이 경기에 앞서 일본과 7승1패로 공동 선두에 올라 있었다. 풀리그전으로 치러진 대회였기에 이날 승자가 우승을 차지하는 상황. 그러나 한국은 이렇다할 공격도 하지 못한 채 0-2로 끌려갔다.

 

한일전에 이어지고 있는 ‘약속의 8회’. 선두타자 심재원의 중전안타에 이어 대타 김정수의 중월 2루타로 한국은 1-2로 따라붙었다. 이어 조성옥의 희생번트로 1사 3루.

 

김재박 타석. 볼카운트 1-1. 일본 배터리가 스퀴즈번트에 대비해 피치아웃을 했다. 이때 김재박은 마치 개구리가 점프를 하듯 공중부양하면서 번트를 댔다. 타구는 절묘하게 3루 파울라인 안쪽으로 굴러갔고, 일본 3루수가 대시해 공을 잡았지만 어디에도 던지지 못해 내야안타가 됐다. 3루주자 김정수는 2-2 동점 득점을 올렸고, 잠실구장 계단과 복도까지 가득 메운 5만 관중은 야구장이 떠나갈 듯 환호성을 질렀다.

 

훗날 김재박이 사인을 잘못 읽고 스퀴즈번트를 실행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김재박의 필사적인 개구리 번트는 그의 야구센스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계속된 2사 1·2루. 한대화가 바뀐 투수 세키네를 상대로 볼카운트 3B-2S에서 왼쪽 파울폴을 강타하는 역전 3점홈런을 때려냈다. 5-2 역전 드라마. 1938년 창설된 이 대회에서 한국은 44년 만에 아시아국가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맛봤다.

 

이 대회에서 투수 부문 선동열과 함께 유격수 부문 올스타에 선정된 김재박은 ‘개구리 번트’ 하나로 국민적 영웅이 됐다.

 

실업야구 7관왕 ‘신개념 유격수’ 출현

 

김재박을 이야기할 때면 ‘개구리 번트’ 외에도 항상 따라붙는 것이 ‘실업야구 7관왕’의 전설이다.

 

영남대를 졸업한 뒤 1977년 한국화장품에 입단한 김재박은 데뷔 첫해부터 실업야구를 초토화했다. 타격왕(0.439, 148타수 65안타), 홈런왕(13개), 타점왕(37개), 도루왕(24개)에 타격 3관왕상(타율·홈런·타점 1위), 신인상, 최우수선수상(MVP)까지 거머쥐면서 7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KBO리그처럼 최다안타, 출루율, 장타율, 득점 타이틀까지 있었으면 더 많은 타이틀을 휩쓸었을 터. 김재박은 한마디로 ‘홈런 치는 도루왕’이었고, ‘도루하는 홈런왕’이었던 셈이다.

 

김재박의 가치는 오히려 공격보다 수비 쪽에 있었다. 앞서 레전드들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 김재박은 그 시절 차원과 격이 다른 유격수였다. 3루수 뒤 외야 잔디까지 가서 타구를 백핸드로 잡은 뒤 1루까지 노바운드로 대포알처럼 던질 수 있는 송구력은 국내에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김재박만의 전매특허였다.

 

여기에 빠른 발과 센스를 바탕으로 수시로 도루를 하고, 영리한 경기운영과 주루플레이를 펼치면서 ‘여시(여우의 경상도 방언)’. ‘그라운드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재박은 실업리그 7관왕을 차지한 1977년 11월, 니카라과에서 열린 제3회 슈퍼월드컵에서도 다시 진가를 발휘했다. 김응용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국 대표팀은 우승 결정전에서 미국을 5-4로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한국야구가 사상 최초로 세계무대 정상에 오른 순간이었다. 김재박은 이 대회에서 타격(0.426), 최다안타(23개), 도루(6개) 등 타격 부문 3관왕에 오르며 우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이때부터 ‘김재박 없는 한국야구’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일본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스를 비롯해 한신 타이거스와 긴테쓰 버펄로스가 강한 추파를 던졌고, 일본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김재박 영입에 팔을 걷어붙였을 정도로 주가는 급상승했다. 그러나 당시 군 미필자의 일본프로야구 진출은 불가능해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삼류 선수’에서 ‘일류 선수’로…“불가능은 없다”

 

김재박이 슈퍼스타가 된 것은 단지 야구를 잘해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알려진 그의 성장 스토리는 팬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던져줬다.

 

훗날 장종훈과 김현수 등이 KBO리그에서 ‘연습생 신화’, ‘신고선수 신화’로 주목을 받았지만, 김재박은 그들보다 더한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주인공으로 각광받았다.

 

어릴 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무명 선수’에다 상처 많은 ‘삼류 선수’였다. 키도 작고, 발도 느리고, 어깨도 약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경북중에서 2루수를 하던 김재박은 ‘야구 명문’ 경북고 진학을 목표로 야구를 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155㎝도 채 되지 않는 키와 그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뜻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간 부모님은 “경북고도 못 갔는데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 대광고가 야구부를 창단해 신입생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테스트를 받고 가까스로 대광고에 들어갔지만, 고교 졸업반 때 서울에 있는 대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영남대가 야구부를 창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고향 대구로 내려가야만 했다.

 

“밤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는데 가슴에 한이 맺혔어요. 서울 대학팀들을 내가 다 잡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런 독기가 저한테는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요.”

 

영남대 입학 후 배성서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다 받아냈다. 오히려 스스로 훈련을 더 찾아 나섰다. 당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못하게 하던 시절이지만, 체조부 선수들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함께 하며 힘을 길렀고, 육상부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주법을 배웠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운동장을 달렸고, 매일 산을 달리며 주력을 키웠다.

 

“대학 1학년 때 키가 갑자기 12㎝나 커지더니 힘도 붙더라고요. 기껏해야 외야수 위치까지만 날아가던 타구가 담장을 넘어 홈런이 되기 시작했어요. 100m 거리를 가볍게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어깨가 강해졌고, 발도 가장 빠른 선수가 됐어요. 배성서 감독님이 깜짝 놀라시더니 1학년 가을에 유격수로 보내시더라고요.”

 

‘명 유격수’ 김재박의 전설이 시작된 지점이다.

 

김재박은 2학년 시절이던 1974년 추계대학연맹전에서 타격왕에 오르며 전국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대학 친선대회 대표팀에 뽑히면서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국이 5전 전승을 거두고 금의환향하자 “김재박 혼자 야구 다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졌다.

 

대학 3학년 시절이던 1975년에는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 유격수로 처음 출전했다. 여기서 투타에서 활약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한국은 아시아선수권대회 3번째 우승 고지에 오르게 됐고, 이때부터 ‘투타 만능’ 김재박의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김재박은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내가 해봤잖아요. 내가 했으니까 얘기할 수 있어요. 내가 원래 발이 느렸는데 가장 빠른 선수가 됐잖아요. 어깨가 강하지 않았는데 가장 강한 어깨를 만들었잖아요. 정말 죽을 각오로 1년 동안 하니까 다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항상 물어요. ‘그게 가능해?’라고. 가능합니다.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해요.”

 

서른 살에 시작한 프로생활

 

김재박은 1982년 9월에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기막힌 ‘개구리 번트’로 한국의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 뒤 1982년 시즌 말미에 곧바로 서울 연고팀 MBC 청룡 유니폼을 입었다.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은 1983년부터 뛰었지만, 김재박을 원년에 1차지명해둔 MBC 청룡이 “하루라도 빨리 팀에 합류했으면 좋겠다”고 종용했다. 계약금 2000만원과 연봉 2400만원의 조건. 원년 최고 대우를 받았던 OB 베어스 박철순과 같은 특급 대우였다.

 

그러나 김재박은 1982년 출전한 3경기에서 13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호된 신고식을 했다. 실업야구에서 매년 타격상을 놓치지 않았던 김재박이 안타를 치지 못하자 오히려 안타를 친 것보다 더 화제를 모았다.

 

김재박은 1983년 4월 2일 OB와 격돌한 시즌 개막전에서도 안타를 뽑아내지 못했다. 볼넷 2개만 얻었을 뿐 2타수 무안타. 그리고는 4월 3일 OB전에서 마침내 안타를 개시했다. 첫 타석에서 3루수 땅볼로 물러난 뒤 3회 두 번째 타석에서 OB 선발투수 계형철을 상대로 3루수 앞 내야안타를 때렸다. 프로 데뷔 19타석 17타수 만에 나온 첫 안타였다.

 

▲ 1983년 MBC 청룡 후기리그 우승 당시 / 사진 출처=KBO

 

1954년생. 사실상 우리나이로 30세에 풀타임 프로 첫 시즌을 맞이했다. 실업리그 시절이라면 이미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깊이 고민할 나이였다.

 

신고식부터 시작한 김재박은 1983년 타율 0.290(373타수 108안타), 34도루(2위), 53득점(4위)을 기록했다. 개인 타이틀은 가져가지 못했지만, 골든글러브와 베스트10에 뽑히면서 프로에서도 ‘김재박 시대’를 예고했다.

 

김재박은 1985년 50도루를 성공하면서 원년부터 도루왕 타이틀을 독식하던 김일권을 밀어내고 도루 1위에 올랐다. 1986년까지 4년 연속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초창기 KBO리그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승리투수 승리타점 동시 기록…포수로 안방에

 

늦은 나이에 프로야구가 생겨 전성기의 나이를 허비한 점이 아쉬웠지만,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인 1980년대에는 ‘야구는 김재박’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끔 만든 추억들이 많다.

 

기습번트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주루 등 상상 그 이상의 재치 있는 플레이를 자주 연출했다. 한마디로 ‘야구 지능’이라 일컬어지는 ‘BQ(Baseball Quotient)’가 높은 선수를 떠올리면 김재박이 첫 손에 꼽혔다.

 

어깨가 약한 MBC 중견수 이해창이 공을 잡으면 김재박이 중견수 근처까지 달려가 송구를 받은 뒤 홈으로 총알처럼 중계를 하던 모습도 추억의 한 장면이다.

 

무엇보다 김재박의 천재성과 다재다능을 얘기할 때 ‘한 경기 승리투수와 승리타점 동시 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1985년 7월 2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 1-1 동점으로 진행된 연장 10회초 MBC 선발투수 김봉근이 1사 만루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빨간장갑의 마술사’ MBC 김동엽 감독은 투수가 아닌 유격수 김재박을 마운드로 호출했다. 웬만한 투수보다 어깨가 강한 데다 대학과 실업야구 시절 투수로서도 맹활약한 경험을 믿었다.

 

타석에는 삼성으로 이적한 ‘쌕쌕이’ 이해창. 여기서 김재박은 2구만에 3루수 직선타로 유도했고, 귀루하지 못한 3루주자 함학수까지 잡아내면서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어진 10회말 공격. MBC가 1사 만루 찬스를 잡았다. 타석에 들어선 김재박은 완투를 하고 있던 삼성 에이스 김시진을 상대로 깨끗한 끝내기 중전 적시타를 때려내 2-1 승리를 이끌었다.

 

지금까지 KBO 역사상 승리투수와 승리타점(결승타)를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역대 단 3명밖에 없다.

 

1982년 원년에 선수가 부족한 팀 사정상 투·타를 겸업했던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이 2차례(5월 15일 광주 삼성전, 5월 26일 동대문 MBC전) 기록했고, 1984년 8월 16일 롯데 최동원은 구덕구장에서 열린 MBC전에서 역대 두 번째 주인공이 된 바 있다. 그리고 김재박은 KBO 역사에서 승리투수와 승리타점을 기록한 최후의 선수로 남아 있다.

 

투수뿐만 아니었다. LG 트윈스로 이름이 바뀐 1990년에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안방에 앉기도 했다. 5월 9일 잠실 OB전에서 2-4로 뒤진 9회초 LG 공격. 백인천 감독은 포수 자리에 대타를 줄줄이 투입하면서 마지막 저항을 했다. 결국 2사 만루 찬스를 잡았고, 여기서 김재박은 OB 마무리투수 윤석환을 상대로 주자 싹쓸이성 우중월 2루타를 날렸다. 3루주자 유지홍과 2루주자 김동재가 득점에 성공했지만, 1루주자 양승관이 홈에서 아웃되고 말았다.

 

9회말 포수가 없자 백인천 감독은 은퇴를 앞둔 말년의 유격수 김재박을 안방에 앉혔다. 역시 가용할 수 있는 엔트리 중 가장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센스 있게 투수 공을 받아낼 수 있는 선수는 김재박이라고 판단했다.

 

비록 LG는 9회말 마지막 투수 정삼흠이 김형석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4-5로 패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위기 상황이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만능선수는 김재박이라는 사실. MBC 김동엽 감독 시절이나 LG 백인천 감독 시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유격수의 상징 ‘행운의 넘버 7’

 

김재박은 각종 CF 모델 섭외 1순위로 꼽힐 정도로 초창기 프로야구 최고 인기스타였다. 지금은 사라진 ‘슈퍼카미트’라는 운동화 광고부터 LG 세탁기 광고까지. 그 중 김재박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CF는 납작한 카라멜 7개가 들어있는 밀크카라멜 광고였다.

 

어린이들이 “김재박 아저씨, 아저씨는 왜 7번만 달아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CF에서 김재박은 “행운의 넘버 세븐!”을 외친다.

 

7번은 어느 순간부터 김재박의 또 다른 이름이 됐고, 한국에서는 유격수를 상징하는 번호가 됐다. 야구 기록에서 유격수를 뜻하는 숫자는 ‘6’이지만, 김재박 이후 한국의 최고 유격수들은 6번보다 7번을 선호했다. 이종범이 그랬고, 박진만이 그랬고, 김상수와 김하성이 그랬다.

 

1991년까지 MBC 청룡과 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한 김재박은 1992년 2월 인천의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한다. LG 구단에서는 은퇴 후 지도자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선수 생활을 더 연장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1991시즌까지 884경기, 911안타, 274도루를 기록 중이어서 1000경기, 1000안타, 300도루를 달성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당시 “슈퍼스타 김재박을 돈을 받고 판다”는 얘기가 나올까봐 LG가 무상 트레이드로 태평양 이적의 길을 열어준 것도 당시엔 화제였다.

 

그러나 김재박은 목표했던 수치를 채우지 못했다. 1992년까지 966경기, 972안타, 284도루에 그친 뒤 유니폼을 벗었다.

 

태평양 이적은 지도자 생활의 운명도 바꾸었다. 곧바로 태평양 코치가 됐고, 1996년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감독이 됐다. 감독 첫해 현대를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켰지만 백전노장 김응용 감독이 이끄는 해태에 패퇴했다. 그러나 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 4차례나 우승을 이끌며 KBO를 대표하는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그는 2007년 친정팀 LG로 돌아와 2009년까지 3년간 지휘봉을 잡았지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면서 그라운드를 떠났다. 감독 통산 1812경기 936승 830패 46무로 승률 0.530을 기록했다. 감독으로서도 역시 1000승을 눈앞에 두고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KBO 역대 감독 중 10회 우승을 차지한 김응용에 이어 김재박은 류중일과 함께 한국시리즈 4회 우승으로 이 부문 공동 2위에 자리 잡고 있다.

 

▲ 2000년 현대 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장면 1 / 사진 출처=KBO

 

▲ 2000년 현대 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장면 2 / 사진 출처=KBO

 

다시 태어나도 야구…최동원 선동열 같은 투수 되고파

 

늦은 나이에 KBO리그에 데뷔한 김재박이 KBO리그에 남긴 기록은 아주 크지 않다. 그러나 팬들과 전문가들은 기록 그 이상의 기억, 초창기 프로야구 인기를 끌어올린 상징성에 초점을 맞춰 김재박에게 표를 던졌다.

 

걸음마 단계에 있던 초창기 KBO리그에서 김재박이 보여준 공·수·주에 걸친 센스 넘치는 활약은 숫자에 찍히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의 플레이는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을 빠르게 끌어올리고 팬들을 열광시킨 원동력이었다. 류중일, 이종범, 박진만 등 후배 유격수들의 롤모델이 돼줬다는 점만으로도 김재박은 한국야구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

 

김재박은 ‘KBO 레전드 40인’에 뽑힌 데 대해 “영광이다. 선정해주신 투표인단과 팬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인사를 올렸다.

 

“저는 이상하게 창단팀과 인연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실업팀 모두 창단팀에 들어갔고, 프로에서도 MBC 청룡 창단 멤버와 LG 트윈스 창단 멤버가 됐죠.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 창단 팀 감독이 됐고요. 어려움도 겪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제가 야구를 만난 건 행운입니다. 그래서 영남대 시절부터 행운을 상징하는 7번을 달았고요. 야구를 해서 이름을 날렸고, 감독으로서 우승까지 해봤잖아요. 그러니까 야구를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요. 다시 태어나도 저는 야구를 할 겁니다.”

 

그도 그 시절을 추억하지만, 팬들도 다시 불세출의 유격수 김재박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7번을 달고 유격수로 뛰고 싶을까.

 

“그땐 유격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을 하고 싶네요. 최동원 선동열 같은 투수. 허허.”

 

이재국 야구전문기자 / 스포팅제국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