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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2루수, 정근우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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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정근우 일러스트 / 출처=KBO

 

프로 지명의 순간


그날은 두산 베어스와 연습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심장이 요동쳤다. 4년 전처럼 실패할까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해서 챙겨온 휴대폰이 어느 순간부터 “징~”, “징~” 하고 요란스런 진동소리를 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하는데 축하 메시지가 이어졌다. 감정은 소용돌이쳤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도저히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태라 이종도 고려대 감독은 그를 경기에서 뺐다. ‘악마의 2루수’ 정근우가 막 프로에 지명되는 순간이었다.

 

발군의 실력, 하지만 172센티라는 허들

 

정근우는 추신수와 함께 부산고 2학년 때부터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빠른 발의 1번 타자 겸 3루수였지만 작은 키(172㎝)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정근우는 “그때 당연히 신인 지명될 줄 알았는데 끝까지 내 이름이 없어서 서러운 마음에 진짜 펑펑 울었다. 야구를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지까지도 고민했다”라고 밝혔다. 3차례 팔꿈치 수술을 거치고, 입스(평소 잘 하던 동작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현상)가 왔는데도 기어이 극복해내며 포기하지 않았던 야구였는데 프로 어느 팀도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정근우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면 안되는 거구나 싶어 좌절했던 때였다”라고 했다.

 

절치부심하고 택한 고려대. 동기 부여는 확실했다. 그와 함께 아마추어에서 경쟁하던 김태균, 이대호, 이동현 등이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고교 절친인 추신수는 낯선 땅 미국에서 빅리그를 향해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정근우는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라면서 “무조건 빨라지기 위해 (고려대) 송추야구장에서 초시계를 들고 매일 뛰었다. 저녁에는 동기에게 펑고를 쳐달라고 해서 수비 연습을 하고 배팅 연습도 따로 했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1주일에 6일은 했다”라고 돌아봤다.

 

그와 함께 1년 동안 고려대 선수 생활을 했던 박용택 해설위원은 “(정)근우 첫 인상은 ‘키가 작네. 근데 요놈 봐라. 야구 센스가 있네’였다”면서 “신입생인데도 주눅 들거나 그런 면이 전혀 없었고 선배가 굳이 말을 안 해도 항상 먼저 움직이는 후배였다. 매일같이 나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라며 웃었다. 정근우는 “당시 학교에서 용택 선배가 제일 빨랐다. 제일 빠른 사람과 대결해서 이겨야지 싶었다. 따라붙는 재미가 있었고 하다 보니 늘었다”라고 했다.

 

메이저리그를 거쳐 지난해 SSG 랜더스 유니폼을 입은 추신수는 “(근우는)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이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야구를 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전국에서 실력이 가장 출중했다. 하지만 체격이 작아 프로 지명이 되지 않았는데 한편으로는 또 대학에 가서 프로 지명을 위해 더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라고 했다. 고교 시절에는 정근우와 친구이자 맞수였다는 추신수는 “항상 야간 연습에 서로 먼저 나가서 연습했고, 또 서로 몰래 연습하다가 들켜서 함께 웃기도 했다”라면서 “개인적으로 근우는 야구선수로서 인정하는 몇 안되는 선수 중 한 명”이라고 강조했다.

 

4년 뒤 입성한 프로 무대

 

대학 새내기 때부터 주전으로 뛴 정근우는 2학년 때는 프로 2군 선수들이 주축이 돼 참가하는 대륙간컵 대표로도 나섰다. “프로 선수들과 함께하면서 보완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더 열심히 하면 프로 지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얻은 시간”이었다. 남들보다 더 뛰고, 더 던지고, 더 친 노력의 결실이 SK 와이번스 2차 1라운드 7순위 지명이었다. 정근우는 “4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2000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동기들보다 4년 늦게 시작된 프로 생활. 하지만 낯선 환경이 그를 잔뜩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미국 플로리다 첫 스프링캠프 때 함께 프로 입단한 고졸 신인 최정과 3루 수비 연습을 하는데 1루로 던지는 공 10개 중 8개가 더그아웃으로 쪽으로 날아갔다. “둘이서 정확한 송구 개수를 갖고 내기를 할 정도”로 수비가 엉망진창이었다. 입스였다.

 

입스는 팔꿈치 수술 직후인 고교 2학년 때와 미래 고민으로 생각이 많아졌던 대학교 2학년 때 이미 겪은 일이었다. 정근우는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에게 공을 던질 때 입스가 오는데 공이 날아올 때부터 ‘큰일 났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포구 실책이 많아진다. 그때는 타인의 가벼운 핀잔도 엄청 부담으로 다가온다”라고 했다.

 

입스 등의 이유로 프로 첫 해는 52경기 출전, 타율 0.193(88타수 17안타) 5타점의 성적에 그쳤다. 실책은 7개나 했다. 2006시즌은 외야수로 시작했다. 내야 송구 불안 등이 원인이었다. 이후 SK 주전 2루수 정경배의 부진으로 2루를 꿰차며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로 그해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정근우는 “점점 마인드도 바뀌고 원하는 데로 공도 가니까 심적으로 편해진 면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해 45도루를 성공시키면서 이종욱(51개·두산)에 이어 리그 2위에도 올랐다.

 

2006년말 김성근 감독이 SK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야구 인생은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스프링캠프 동안 최정과 함께 김성근 감독이 지시한 엄청난 훈련량을 감내해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입고 있던 유니폼을 벗지도 못하고 숙소 침대에 그냥 쓰러져 자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러한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 경기할 때 공이 오기 전부터 몸이 반응했다. “중상이던 달리기 실력을 상상으로 만들기 위해” 대학 시절부터 이를 악물고 늘려온 발의 속도도 한몫 했다.

 

▲ SK 왕조를 이끌며 프로야구 대표 2루수 계보를 이은 정근우  / 사진 출처=KBO

 

정근우가 버티는 SK 2루는 물 샐 틈이 없었다. 넓은 수비 범위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공도 기어이 쫓아가서 낚아챘다. 특유의 점핑 송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안타라고 생각했던 공이 잡히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 타자들은 고개를 떨구기 일쑤였다. 그가 ‘악마의 2루수’라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정근우는 “숙소 룸메이트였던 최정과 함께 밤에 수비 영상을 찾아보고 실전에서 해보고 그랬다. 영상으로만 봤던 것이 될 때 진짜 너무 신났다”라고 했다.

 

비단 수비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SK 1번 타자로 빠른 야구의 선봉장이 됐다. 당시만 해도 홈런포를 앞세운 빅볼을 추구하던 구단들이 득세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빠른 테이블 세터진(정근우-박재상)을 앞세워 국내 야구 흐름을 바꿔놨다. 포스트시즌에서 번번이 SK에 발목 잡힌 두산 베어스 등도 스피드 야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김성근 현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고문은 “그 당시 정근우, 박재상은 SK 야구의 상징이었다. 한국 야구를 뛰는 야구로 바꾼 주인공들이었고 뛰는 야구는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이 이기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SK 왕조 시절의 주축, 그리고 한화로

 

정근우의 전성시대는 SK 왕조시대와 맞물려 있다.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르면서 2007년 팀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2008년, 2010년 우승에도 밑돌을 놨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고, 특히 2009년에는 타격왕에도 도전하면서 타율 5위(0.350), 득점 1위(98개), 최다안타 2위(168개), 도루 2위(53개)의 성적을 냈다. 빼어난 개인 성적과 달리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KIA 타이거즈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는데 정근우는 “이때가 야구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때”라고 말한다. “박경완, 김광현 등이 빠진 상황에서 나머지 선수들이 끈끈하게 뭉쳐서 우승 가까이 도달했는데 졌다. 너무 분해서 펑펑 울었는데 감독님이 팀 회의 때 ‘고맙다, 고생했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더 왈칵했다. 그때 이후로 선수들끼리 전우애 같은 게 생겼다.”

 

정근우는 2013시즌 뒤 FA 자격을 얻어 4년 총액 70억원을 받고 한화 이글스로 적을 옮겼다. 한화에서도 그는 이용규와 테이블 세터를 이뤄 1번 타자로 활약했다. 감각적인 수비는 여전했다. 팀 주장을 맡은 2016년에는 2009년에 이어 다시 득점왕(121개)에 올랐다. 개인 최다 홈런(18개)을 때려내기도 했다. 그는 2006년부터 2016년까지 11년 연속 20 도루 고지를 밟았는데, 이는 KBO리그 최초의 기록이다. 2017시즌 뒤 두 번째 FA를 맞았고 2+1년 35억원에 잔류를 택했다.

 

▲ 한화 시절 정근우, 그 또한 나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 사진 출처=KBO

 

‘악마의 2루수’도 나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발이 느려지면서 놓치는 공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외야수로 밀리기도 하고 1루수로 출장하기도 했다. 2020시즌을 앞두고 2차 드래프트를 통해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결국 시즌 뒤 은퇴를 선언했다.

 

정근우는 “어느 순간부터 공이 오면 불안해졌다. 바운드를 맞추는 능력도, 순발력도, 순간 대처능력도 떨어져서 ‘난 여기까지인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라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이뤘다. 후회 없이 끝까지 해봐서 후련하고, 선수 마지막 해를 2루수로 끝내서 더 좋았다”라고 했다. 그의 프로 16년 통산 성적은 타율 0.302, 121홈런 722타점 371도루. 2루수 부문 통산 타율·안타(1877개)·득점(1072개)·도루 모두 1위다. 통산 WAR로 따지면 그를 따라올 2루수가 없다.

 

국가대표 정근우

 

‘정근우’라는 야구 선수가 더욱 돋보였던 무대는 국제대회였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청소년 대표로 뽑혔고, 대학 시절에도 대륙간컵, 야구 월드컵 등에 출전했으니 그 경험치를 무시할 수 없다. 정근우는 2008 베이징올림픽 예선 1차전 미국전 때 9회말 6-7로 뒤진 상황에서 선두타자 대타로 출전해 좌익선상 2루타를 치고 출루한 뒤 1사 3루에서 이택근의 내야 땅볼 때 홈플레이트를 밟아 동점을 이끌어냈다. 한국의 8-7 역전승 발판을 마련한 안타, 득점이었다.

 

예선 3차전 캐나다와 경기에서는 3회초 결승홈런을 쳐내며 한국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정근우(2안타) 외에 안타를 기록한 한국 타자는 진갑용(1안타) 뿐이었다. 일본과의 준결승 때는 대주자로 나서 기막힌 홈 슬라이딩을 보여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놨다. 한국이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딴 데는 타율 0.310(29타수 9안타), 1홈런 1도루로 활약한 그의 역할이 상당했다.

 

2009 WBC(준우승·타율 0.292),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금메달·타율 0.563) 때도 주전 2루수는 그의 몫이었다. 김성근 소프트뱅크 코치고문은 “WBC 당시 일본 선수단이 정근우를 가장 경계했었다. 일본 코칭 스태프가 정근우의 야구 센스를 엄청 칭찬했다”고 밝혔다. 정근우는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를 뛰고 나면 내가 많이 성장했다고 느끼고는 했다. 그래서 모든 경기에 내 능력치 100%를 쏟아부었다”라고 했다.

 

▲ 정근우는 국가대표팀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담당하였다. / 사진 출처=KBO

 

정근우는 2015 프리미어12 때는 주장으로 후배들을 다독이면서 우승까지 이끌었다. 그는 준결승전 때 일본 선발 오타니 쇼헤이(7이닝 1피안타 11탈삼진 무실점)의 공을 유일하게 때려낸 한국 타자였다. 그리고, 0-3으로 뒤지던 경기를 9회초 4-3으로 뒤집는 역전극의 첫 타점도 만들어냈다. 프리미어12 때 그의 성적은 타율 0.353(34타수 12안타), 9타점 2도루. 정근우는 “최고참으로 대표팀에 뽑힌 게 처음이었는데 주장을 맡으면서 선수들과 잘 소통하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했다”라면서 “나의 마지막 대표팀 성적이 우승으로 끝나서 참 좋았다. 도쿄돔에서 우승 헹가래를 받아본 선수가 누가 있겠느냐”라고 했다.

 

‘근성’으로 표현되는 정근우의 야구 인생

 

그는 아마추어 때도, 프로 선수 때도, 국가대표 때도 더그아웃 리더였다. 추신수, 이대호, 김태균, 이동현, 정상호 등 1982년생 황금 세대가 포진했던 세계청소년야구대회(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우승) 때도 팀 리더는 그의 몫이었다. 정근우는 “운동장 땅 고르기 같은 것을 할 때 먼저 나서서 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식이었는데 경기 때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후배들도 저절로 따라 했다. 주장을 하면서 상처받지 않게 팀을 이끄는 방법을 알게 됐다”라고 했다.

 

정근우의 프로 인생은 ‘근성’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된다. 그 또한 “야구하면서 제일 자부심을 느끼는 게 매 순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나의 최대 무기는 많은 훈련이었다”라고 말한다. 고교 시절 3차례 수술로 굽어 버린 팔꿈치. 손가락이 어깨에 닿지도 않는 현실에서 그는 타고난 야구 센스와 훈련량으로 한계를 깨부쉈다.

 

▲ 언제나 1루까지 전력질주 하던 정근우의 모습 / 사진 출처=KBO

 

김성근 소프트뱅크 코치고문은 “팔꿈치가 안 좋아서 송구 능력에 문제가 있었지만 훈련으로 잘 극복했다. 야수가 3차례 팔꿈치 수술을 한 것도 대단한데 그 과정 속에서 단단하게 야구를 했다는 게 놀랍다”고 했다. 최정(SSG 랜더스)은 “야구에 대해서는 정말 진지하고, 사소한 것 하나 하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던 선배였다. ‘정근우'라고 하면 ‘패기'와 ‘근성'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후배 야구 선수들이 보고 배울 점이 많은 형이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신체적 불리함을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며 2루수로 프로 데뷔해 2루수로 현역을 마감했던 정근우. 그는 “한창 야구를 할 때는 야구가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퇴 뒤 돌아보니 야구가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주고 있었다”라면서 “인원수가 많은 곳에서 경쟁하며 치열하게 살았는데 경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 삶에 대해 배워나가는 과정이었다”라고 말한다. 악바리 근성으로 나날이 배워가면서 하루, 하루 야구라는 삶을 채워나갔던 ‘악마의 2루수’였다.

 

김양희 기자 / 한겨레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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