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전준호, 통산 549도루에 빛나는 '전설의 도루왕'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9. 23:13

본문

▲ KBO 40주년 특집 전준호 일러스트(출처=KBO)

 

‘대도’를 기억하는 그 장면

 

1995년 4월 16일. 인천 도원구장에서 롯데와 태평양이 맞붙었다. 4대 1로 끌려가던 롯데가 8회초 선두타자의 안타로 기회를 잡았다. 태평양 투수 안병원은 다음 타자에게 초구를 던지기 전, 1루로 견제구부터 던졌다.

다음에도 투구 대신 견제구. 또 견제구. 또 한 번. 또 한 번. 관중석이 술렁였고 소수 롯데 팬들의 욕설도 들려왔다. 안병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또 1루 견제구. 7번째. 8번째. 9번째. 멀찌감치 리드하고 있다가 9번 연속 1루 베이스로 다이빙해 기진맥진한 1루 주자의 유니폼은 흙투성이가 됐다.

 

1. 잡고 싶은 투수, 잡을 수 없는 도둑

 

“저는 그때 리드를 베이스로부터 다섯 발이나 나갔거든요. 리드를 줄이라고 9번이나 견제하는 거예요. 안병원 그 친구도 참 황소고집이었지요.”

 

주자는 리드를 줄였을까?

 

“천만에요. 계속 다섯 발씩 나갔죠. 기싸움에 질 수는 없잖아요.” 안병원이 결국 포기하고 초구를 던지는 순간, 주자는 2루를 향해 출발했다. “지금 안 뛰면 또 계속 견제구 날아와서 고생할 것 같더라고요.”

 

결과는 여유 있는 세이프. 전준호가 그 당시 투수들에게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아무리 기를 써도 잡기 힘든 무서운 도둑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장타와 효율이 대세인 현대 야구에서, 도루는 사라져가는 기술이다. 1982년 2.92개였던 경기당 도루는 갈수록 줄어 올해는 그 절반도 안 되는 1.22개로 감소했다. 2015년 박해민 이후 아무도 한 시즌 60도루 고지를 밟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전준호의 KBO 통산 도루 기록 549개는, 규칙과 장비의 변화 등으로 경기의 양상이 바뀌지 않는 한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전준호의 야구인생에는, 이밖에도 곱씹을수록 믿기 힘든 전설적인 대목들이 넘친다.

 

▲ 1995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전준호,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 / 사진 출처=KBO

 

2. 동네 야구 천재, 마산의 에이스가 되다.

 

초등학생 시절, 전준호는 야구선수가 아닌 육상선수였다. 발이 워낙 빨라 100미터와 200미터, 멀리뛰기 종목의 학교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방과 후에는 동네 야구를 평정하는 왼손 에이스로 변신했다. 그러던 6학년 2학기 어느 날, 친구의 낯선 모습을 목격한다.

 

“야구는 저보다 못하는 친구였는데, 마산중학교 야구부 유니폼을 입고 온 거예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입단 테스트를 받고 합격해서 받아왔다는 거예요. 당장 저도 달려갔죠.”

 

전준호는 달리기, 던지기, 방망이 모두 정식 선수 뺨치는 실력을 뽐냈다. 한방에 입단 테스트를 통과한 전준호는 더 당돌해졌다. 다음날에는 마산중의 라이벌인 마산동중 야구부로 향했다. 이번에도 당연히 합격.

 

“그때는 마산동중 야구부가 조금 더 ‘명문’ 취급을 받았거든요. 어린 나이에 자존심은 세서 마음에 드는 학교를 골라서 간 거죠.”

 

정식 선수가 되자마자 전준호는 에이스로 활약했다. 마산동중, 마산고 시절 팀의 거의 모든 경기를 책임졌다. 일찌감치 영남대로 진로도 정해졌다. 그런데 너무 많이 던진 어깨가 탈이 났다. 하필 고3때 팔이 고장난 심각한 위기. 하지만 전준호는 불안하지 않았다.

 

“솔직히 타자가 더 재미있었거든요. 스피드랑 콘택트 능력에 자신도 있었고.”

 

대학 입학 후 타자로 전업하자마자 뛰어난 외야수로 변신한 전준호는, 졸업을 앞두고 실업야구 명문 포항제철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 당시 프로 최저연봉보다 높은 15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좋은 조건이었다. 고향 팀 롯데에서는 신인 지명을 할 경우 입단을 할 거냐고 물어왔다. 전준호는 포철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답했다. 그런데 롯데가 예상을 깨고, 신인 지명 3명 중 한 명으로 전준호의 이름을 불렀다. 전준호는 고민 끝에 ‘실업 야구->샐러리맨’의 안전한 길 대신, 험악한 프로의 정글을 택했다.

 

“고민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뛰었어요. 단 1년이라도 최고의 무대에서 승부를 걸어보는 거니까요.”

 

3. 개막전에 출전한 신인, 3안타와 첫 도루

 

1991년, 롯데 외야에는 김응국과 유두열, 조성옥과 최계영 등 스타급 선수들이 즐비했다. 갓 입단했고 국가대표 경력도 없는 전준호가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시범경기 성적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전준호로서는 1군 엔트리에 포함돼 대구 개막전으로 가는 원정버스에 탑승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대주자나 대수비 요원이겠구나 생각했어요. 개막 전날 마음 편하게 잠도 잘 잤죠.”

 

그런데 개막전 당일 공개된 선발 라인업에는 ‘7번 우익수 전준호’가 적혀 있었다.

 

“강병철 감독님은 전날 결정하고, 유두열 선배한테 양해를 구했다고 하더라고요. 삼성 선발이 사이드암인 김성길 투수니까, 왼손 타자이고 선구안도 괜찮은 전준호를 선발로 쓰겠다고. 저한테는 긴장해서 잠 설칠까봐 말씀을 안 해주신 거였어요. 라인업 보는 순간 너무 놀라서 심장 박동수가 치솟더라고요.”

 

전준호는 3회, 프로 첫 타석에 들어섰다. 구름 위를 걷는 듯 제정신이 아니었던 전준호에게, 그해 16승-18세이브를 올리게 될 김성길의 예리한 커브가 날아들었다.

 

“어떻게 쳤는지 모르겠는데, 방망이가 나가 있더라고요. 타구가 완전히 빗맞았는데, 유격수였던 류중일 감독님 뒤에 떨어지는 행운의 안타가 됐어요. 그때서야 긴장이 풀리더라고요."

 

전준호는 데뷔전에서 3안타, 도루 1개의 맹활약을 펼친다. 이후 19년 동안 쌓아나갈 2018개의 안타, 549개의 도루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강병철 감독은 다음날 더욱 과감한 선택을 한다. 주전 중견수 최계영 대신, 전준호를 1번 타자 중견수로 투입한 것이다. 입단 동기 박정태와 전준호를 앞세워 세대교체를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두 신인은 그해 롯데의 7년 만의 가을야구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 나란히 타율 3할을 넘기며 3할 타자 5명이 포진한 ‘소총 부대’의 핵심 역할을 맡는다. 전준호가 1번, 박정태가 3번 타순을 맡은 롯데 타선은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한 시즌 1200안타를 돌파(1213안타)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롯데가 정상에 오른 마지막 시즌, 생애 처음으로 3할-100안타-30도루를 돌파한 전준호는 다음해, ‘인생의 은인’을 만난다.

 

4. 알바레스와 만남, ‘역대 최고 대도’의 탄생

 

"쌍방울 레이더스에 계셨던 조 알바레스 코치님이 새 주루코치로 오셨어요. 훨씬 더 공격적으로 도루를 노려도 된다는 마음가짐부터 심어주셨어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신 거죠. 상황에 따른 리드와 슬라이딩 방법까지 디테일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른손투수일 때는 다섯 발, 왼손투수일 때는 여섯 발을 리드해야 11걸음 만에 2루에 도착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 미국으로 스프링캠프를 갈 때마다 메이저 구단들이 베이스러닝을 가르치는 매뉴얼을 구해서 봤어요. 알바레스 코치님이 가르쳐주신 거랑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 방법이었던 거죠. 그렇게 훌륭한 스승을 일찍 만났으니, 저는 엄청난 행운아였습니다.”

 

알바레스 코치의 지도로 도루 능력을 한 단계 끌어올린 전준호는 1993년, ‘세기의 대도’로 거듭난다. 직전 시즌(33개)의 두 배가 넘는 75개의 도루를 성공하며 생애 첫 도루왕에 오른 것. 시즌 막판, 신인 이종범이 한 경기 6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무시무시한 추격전을 펼쳤지만 끝내 전준호가 두 개차로 도루왕 타이틀을 확정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70도루를 넘긴 선수가 두 명이나 나온 시즌은 그 해가 유일하다. 한 시즌 70도루의 벽을 넘어선 선수는 전준호와 이종범 둘 뿐이다.

 

▲ 최다경기 출장 달성 당시의 전준호 / 사진 출처=KBO

 

간판스타 박정태의 부상으로 롯데가 다시 하위권으로 추락한 1993년, 전준호의 경이적인 도루쇼는 사직구장 팬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당시 지방 버전을 따로 인쇄했던 스포츠신문들의 ‘부산 경남판’ 1면에는 전준호의 도루 개수가 찍혔다. 도루를 보여 달라는 염원을 담아, 팬들은 전준호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뛰라!!!”

 

“무조건 뛰어야 할 분위기였어요. 저도 뛰고 싶었고. 그때 사직구장 인조잔디는 안 미끄러져서, 긁히면 화상을 입는 재질이었거든요. 온몸이 화상이었어요. 막판에는 무릎, 팔꿈치, 엉덩이가 다 까지고 온통 화상이니까, 슬라이딩을 할 수 있는 부위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몸을 던져 굴렀어요. 너무 아픈데도 팬들이 좋아해주시니까 저도 신나게 뛰었죠.”

 

전준호는 방위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1995년, 69개의 도루로 다시 한 번 도루왕에 오른다. 그해 롯데는 김응국이 31개, 공필성이 22개, 심지어 거포 마해영까지 16개의 도루에 성공하는 등, 무려 8명이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한다. 1995년 롯데의 팀 도루 220개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2021년 팀 도루 1위 삼성이 기록한 116개의 2배 가까운 엄청난 기록이다. 도루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로 볼 때, 이 또한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5. 도루왕의 무기는, ‘발이 아닌 눈’

 

대기록의 비결을 물을 때마다, 전준호는 단호하게 말한다. “도루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발이 아니라 눈입니다. 투수의 습관 파악이 관건입니다.”

 

예를 들어보자. 역사상 최고의 투수 선동열은 주자 견제도 일품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도루하기 가장 까다로운 투수 중 한 명이었다는 게 당시 선수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전준호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견제가 어마어마하게 빨랐습니다. 그리고 1루 주자가 가장 열심히 보는 턱과 목의 동작이 독특했어요. 타자에게 투구를 할 때 나오는 미세한 턱의 반동이 있거든요. 그런데 선 감독님은 그 반동 뒤에 투구가 아니라 1루 견제를 할 때가 있었어요. 딱 보크에 안 걸릴 정도로 애매하고 미세한 그 목 반동 때문에 처음에는 뛰기가 힘들었죠. 역동작에 걸린 것도 아니었는데, 견제구가 일찍 도착해 꽂힌 1루수 미트를 제가 밟아서 아웃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전준호는 결국 해법을 찾아냈다.

 

“타자에게 투구를 할 때는 세트포지션에서 왼쪽 어깨를 열어놓고 1루 주자를 시선에 담으시더라고요. 견제할 때는 반대였어요. 눈이 3루 쪽을 보고 있어요. 1루에 신경 안 쓰시는 척 하는 거죠. 그걸로 견제구와 투구를 구분하고 나서는, 도루가 조금 수월해졌죠.”

 

왼손 투수도 전준호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

 

“(태평양의 왼손 에이스) 최창호 선배님은 견제하시기 전에는 포수만 보고 있어요. 투구할 때는 1루 주자를 보고 계셨어요. 견제 동작도 별로 안 빠르셔서, 리드를 엄청나게 멀리 할 수 있었어요. ‘반칙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요. 1루에 나가기만 하면 뛰었던 것 같아요.”

 

견제하려는 의도를 숨기고픈 투수의 욕망이, 주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힌트라는 거다.

 

“투수들은 습관을 잘 못 고쳐요. 무의식이거든요. 제가 현역 때 투수들에게 발견하던 버릇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투수들이 많아요. 가령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투수는, 가끔 포수한테 공을 받고 나서 주자를 안 쳐다봐요. 그러면 무조건 견제구가 와요. 포수한테 공 받고 주자를 보면서 투구판을 밟는다? 그럼 견제 안 하는 거예요. 그때 도루하면 돼요.”

 

아무리 관찰해도 투수의 습관을 찾을 수 없다면?

 

“포수를 보면 됩니다. 포수들은 투구를 받기 위해 하는 준비 동작들이 있어요. 견제구 사인을 내고 나면 그 동작들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아요. 힘드니까. 그리고 직구와 변화구의 준비 동작이 다른 포수들이 있어요. 직구일 때는 양쪽 코너 쪽으로 더 많이 움직이고, 변화구 때는 움직임이 적어요. 변화구 타이밍에 맞춰 뛰면 도루 성공 확률이 높아지죠.”

 

철저한 관찰과 학습으로 노하우를 쌓아가던 전준호에게, 뜻밖의 시련이 닥친다.

 

6. 충격의 트레이드와 부진, 그리고 부활

 

1996년 부상과 부진을 겪은 전준호는 겨우내 부활을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시범경기부터 맹타를 휘둘렀다. 희망에 부푼 시즌 개막 직전, 김용희 감독이 감독실로 불렀다.

 

“표정이 너무 안 좋으셨어요. 오늘 트레이드 결정이 났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롯데 외에 다른 팀에서 뛰는 건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충격이 너무 컸지요. 현대로 트레이드 되고 바로 다음 주에 사직구장에서 3연전이 있었어요. 부산 개막전이라 만원 관중이 들어오셨어요. 제가 1회초 첫 타석에 들어서는데, 팬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거예요. 눈물이 멈추지를 않더라고요.”

 

트레이드의 충격으로 전준호는 1997년, 생애 최저 타율의 부진에 빠진다. 하지만 이듬해 곧장 반등에 성공한다. 혹독한 동계훈련을 거쳐 1998년 0.321로 타율 2위에 오르며 현대의 첫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2004년까지 7년 사이에 한국시리즈에 4차례 진출해 모두 우승하는 ‘현대 왕조’의 주역으로 맹활약한다.

 

▲ 2004년 현대 우승의 주축이었던 전준호 / 사진 출처=KBO

 

흥미로운 건 이 시기 대부분, 전준호의 도루 숫자는 예전만 못했다는 거다. 이건 팀 타선의 스타일에 맞춘 결정이었다.

 

“롯데는 소총 부대였잖아요. 단타가 많았고, 한 베이스를 더 따내는 주루 플레이가 중요했어요. 하지만 현대는 아니죠. 거포들이 즐비했으니까, 위험을 감수하고 뛰기보다는 안전하게 살아있는 게 유리했죠. 무리하게 2루로 안 뛰어도, 장타 때 홈에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꼭 한 점이 필요한 순간에만 뛰었으니까 도루가 줄었죠.”

 

도루를 자제했지만, 주루 능력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현대 왕조’가 위용을 떨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38개의 3루타를 기록했다. 정수근(37개), 이병규(22개) 등 창창한 후배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베테랑이 이 기간 가장 많은 3루타를 친 것이다. 전준호의 통산 3루타는 딱 100개. 통산 2위인 정수빈(73개)을 넉넉하게 제치고 1위다. 이 또한 난공불락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전준호가 홈으로 썼던 구장들의 특성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기록이다. 사직-도원-수원-목동구장은 펜스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구장들이다. 3루타는 잠실, 고척돔처럼 펜스가 멀리 있는 구장에서 많이 나온다. 즉 전준호는 3루타를 치기에 불리한 구장들만 홈으로 쓰면서도, ‘3루타의 신’이 된 것이다.

 

“많은 선수들은 외야에서 수비가 매끄럽지 않을 때 3루를 노리죠. 하지만 저는 타구가 좌우중간이나 우측 라인 쪽으로 간다 싶으면 항상 첫발부터 3루를 생각하고 뛰었습니다. 처음부터 3루가 목표인 거랑, 중간에 기어를 바꿔서 속도를 올리는 거랑은 천지차이거든요.”

 

어느덧 35살이 된 2004년, 전준호는 녹슬지 않은 스피드로 또 하나의 신화를 쓴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진 능력을 한 번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캠프 때부터 준비를 제대로 했어요. 줄넘기를 하루도 안 빠지고 했고, 웨이트도 순발력 운동에 집중했어요. 계속 하다보니까 예전의 세포가 살아나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경쟁자들이 김주찬, 정수근 같은 엄청난 후배들이었는데, 한 번 이겨보고 싶었어요.”

 

2004년, 전준호는 53개의 도루로 9년 만에 도루왕에 복귀한다. ‘35세 도루왕’은 지금까지도 ‘최고령 도루왕’ 기록으로 남아 있다. 프로야구 역사에서 35세 이상 선수의 시즌 도루 2위 기록은 1989년 김재박의 39개다. 즉 아무도 40도루도 넘보기 힘든 35세의 나이에, 나 홀로 50도루를 넘어버린 거다. 이 또한 ‘불멸의 영역’으로 오래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2004년 가을, 전준호는 녹슬지 않는 도루 실력으로 명장면을 연출한다. 2004년 한국시리즈 7차전 1회, 2번 타자로 나와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한 전준호는 브룸바의 중전안타 때 3루에 도달한다. 그리고 경기 전의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제가 3루에 있었고 1루 주자가 브룸바였어요. 삼성 투수는 전병호였는데, 제가 견제 습관을 알고 있었어요. 견제가 느린 편이기도 했고. 또 1루수 양준혁은 왼손잡이잖아요. 홈 송구를 하려면 몸을 틀어야 해서 정확도가 떨어져요. 경기 전에 브룸바에게 미리 1-3루 상황이 되면 리드를 많이 하라고 얘기해 뒀어요. 도루는 하지 말고, 견제구를 유도하라는 거죠. 평소에 전혀 리드 안 하던 브룸바가 갑자기 한 발 더 나가 있으니까, 당연히 견제를 하게 돼 있죠. 전병호가 발을 드는 순간 바로 홈으로 스타트 했어요. 넉넉하게 세이프됐죠.”

 

주장 전준호가 앞장서 투지를 발휘한 현대는 삼성과 9차전 혈투 끝에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한다. ‘현대 왕조’의 마지막 우승 트로피를 받아든 선수는 최고참 김동수와 주장 전준호였다.

 

7. 은퇴 뒤에도, 질주는 계속된다.

 

준수한 활약을 이어가던 전준호는 2008년, 서른아홉의 나이에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6년 만에 타율 3할을 넘기며(0.310)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통산 2천 안타, 통산 2천 경기,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 통산 100개의 3루타를 모두 달성한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된 2009년 막판, 통산 550번째 도루(이후 KBO의 기록 정정으로 한 개가 빠졌다)를 달성하고 그라운드를 떠난다. 히어로즈 팬들이 자발적으로 은퇴식을 열어 ‘철인’을 아름답게 떠나보냈다.

 

▲ 통산 550도루를 달성한 전준호

 

그렇게 질주가 끝난 걸까? 그렇지 않다.

 

위에 설명한 것처럼, 역대 한 시즌 팀 최다 도루 기록은 1995년 롯데의 220개다. 2위는? 2015년 NC의 204개다. 두 팀은 공통점이 있다. 전준호가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95년은 선수로, 2015년은 1루 코치로.

 

▲ 그의 도루 능력은 NC를 다른 팀으로 만들었다. / 사진 출처=KBO

 

“박민우, 김종호, 나성범이 다 잘 뛸 때라 가능했지요. 저는 제가 파악한 정보들을 선수들에게 전달해주려고 했습니다. 투수들의 습관을 파악해서 심플하게 전해줬죠. 또 1루 코치박스에 나가있을 때는 투수나 포수의 동작을 보고 변화구인 것 같으면 ‘칫!’하고 신호를 줬습니다. 테임즈가 그 전이나 그 후로 미국에서 한 시즌 도루 15개 이상 한 적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2015시즌에는 40개를 했지요. 제가 주는 정보와 사인이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루왕의 노하우는, 그라운드를 떠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듯하다.

 

이성훈 기자 / SBS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