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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축탁축(淸蹴濁蹴)] '동남풍'을 기다린 김도훈의 화공, SPL을 휩쓸다

--최규섭 축구

by econo0706 2022. 9. 1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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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30.

 

중국 후한 말인 208년, 양자강 남안의 적벽에 대풍운이 일었다.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 적벽대전(赤壁大戰)이었다. 조조ㆍ유비ㆍ손권이 통천하(統天下)의 웅지를 불태우며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벌였다.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화북을 평정한 조조는 “천하지주(天下之主)는 오직 나뿐”이라고 호언하며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진에 나섰다. 유비와 손권은 손을 맞잡고 10대 1도 되지 않는 절대적 병력의 열세를 딛고 조조에 맞섰다.

위-촉-오 삼국이 솥발처럼 벌여 서는[鼎足·정족] 형세를 이룬 계기가 된 적벽대전은 역사적 의의는 차치하고라도 볼거리가 많아 지금까지 오래도록 회자해 오고 있다. 각종 계책이 난무하고 현란함마저 자아낸 흥미진진한 대회전이었다. “병(兵)은 궤도(詭道)”란 말을 실감케 하듯, 채중과 채화의 사항계(詐降計), 방통의 연환계(連環計), 황개의 고육계(苦肉計)와 역(逆)사항계, 제갈량과 주유의 화공계(火攻計) 등 그야말로 숨 막히는 지모의 대결이 펼쳐졌다.

 

/ [사진] 라이언시티 SNS


승패의 운명을 가른 요소는 절대적 차이를 보인 병력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방책이 승패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중에서는 화공계는 화룡점정이요, 백미였다. 중국 전쟁사 가운데 가장 극적인 승리로 평가받는 화공법이 나왔다. 압권의 연출자는 제갈량이었다.

천문 지리에 능통했던 제갈량은 북서풍이 부는 초겨울에도 동남풍이 이는 시기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극적 요소가 필요했다. “하늘에 빌어 동남풍을 부르겠다,”라고 말한 제갈량은 제단을 쌓고 기도해 신비스러운 색채를 더했다.

정말 때아닌 동남풍이 불었다. 각종 화약 물질을 쌓은 황개의 배는 순풍에 조조 선단 쪽으로 내달렸다. “하늘은 나를 택했다. 이제 승리만 남았다.”라며 황개의 투항을 즐기려던 조조에게 청천벽력으로 다가선 질주였다. 쇠사슬로 묶인 조조 선단은 움쩍 한 번 못하고 화염에 휩싸였다. 100만 대군은 궤멸됐고, 그들이 흩뿌린 피는 적벽의 노을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병가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손자의 설파가 다시금 가슴속을 파고드는 순간이다. “불을 지르는 데 때가 있고, 불을 일으키는 데 날이 있다.”(손자병법 화공편)

숱한 명문 클럽 제안 뿌리치고 ‘축구 변방’ 택한 그의 결단 배경은?

충격적이었다. 지난해 말 우승한 명장이 사령탑에서 물러난다는 뉴스는 한국 축구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은 김도훈 울산 현대 감독(이하 당시)이었다. 2020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를 평정하며 명장의 반열에 올라선 그는 울산과 ‘아름다운 이별’ 수순을 밟았다.

▲ 2020년 ACL 우승컵을 들고 있는 김도훈 감독 / 프로축구연맹

 

9승 1무의 매우 빼어난 전과를 거두며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음에도 그는 별달리 연연하는 빛을 보이지 않은 채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길을 택했다. 그리고 초야에 묻혀 칩거에 들어갔다. 인천 유니이티드(2015~2016년)와 현대(2017~2020년)에서 6시즌 동안 감독으로서 쉼 없이 달려온 승부 세계에서 벗어나 휴식의 달콤함을 즐기며 새로이 웅비할 힘을 길렀다.

올 5월, 그는 다시 한번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일반적 예상을 깨고 아시아에서 축구 변방과 다름없는 싱가포르의 한 프로팀 지휘봉을 잡은 그의 결단에 따른 당연한 경악이었다. “중국과 베트남 등의 여러 클럽이 ACL에서 우승한 김도훈 감독을 사령탑으로 영입하려 한다.”라는 설들이 무성하게 퍼져 가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던 반응이었다.

그가 시기를 기다렸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자신의 축구 철학을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지도력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팀을 기다리는 데 투자한 5개월여였다. 그가 앞으로 2023년까지 2년 반 동안 동행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손길을 마주 잡은 클럽은 라이언 시티 세일러스다.

“축구는 지구촌에서 가장 널리 즐기는 스포츠다. 그런 보편성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더 나아가 발전하는 데 작은 밀알이 되고 싶었다.”

축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흠씬 배어나는 용단 배경이다.

5개월 만에 이룬 SPL 평정, 그다음 시기와 길은?

김도훈 감독은 역시 명장이었다. 지난 10월 10일 2020 싱가포르 프리미어리그(SPL·전 S리그)에서, 라이언 시티를 정상으로 이끌었다. 종반부까지 앞서 나가던 니가타 싱가포르(승점 46)를 제치고 역전 우승(14승 6무 1패·승점 48)의 감격을 안겼다. 지난해 SEA그룹이 기존 홈 유니이티드를 인수해 새롭게 출범한 라이언 시티로선 첫 우승 과실이다. 사령탑 취임 뒤 패배를 모르며(6승 4무) 올린 수확이어서, 그에게도 무척 뜻깊은 결실이다.

K리그에서 덕장으로서도 이름을 떨친 그는 여전히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 때문에, 각종 컵 대회가 열리지 않아 SPL에 전력을 쏟을 수 있었던 요인이 컸다.”라고 우승 비결을 밝히는 데서 읽을 수 있는 그의 겸양지덕이다.

▲ 2020년 FA컵 결승(준우승)서 김도훈 감독 / 대한축구협회

 

그는 권위를 앞세우지 않는 감독이다. 선수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도록 사기를 북돋우는 데 초점을 맞추는 지도자다. “감독과 선수가 한마음 한뜻을 이룰 때, 승리할뿐더러 어떤 목표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지도 철학에 공감하고 잘 따라 준 선수들이 고마울 뿐이다.”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한다[同甘共苦·동감공고].’라는 그의 마음가짐이 빚어낸 지도력은 극대화한 효과로 나타났다. 그 결과물은 SPL 패권은 물론 싱가포르 국가대표팀 편성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싱파가포축구협회가 오는 12월에 열릴 AFF(아시안축구연맹) 선수권 대회(일명 AFF 스즈키컵)를 앞두고 1차 구성한 국가대표팀에, 라이언 시티에서 14명이 뽑혔을 정도다. 그야말로 ‘라이언 시티 = 싱가포르 국가대표팀’ 등식이 성립한다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그가 가르친 라이언 시티가 놀라운 경기력으로 최강에 자리매김했음을 방증하는 일례기도 하다.

“선수들의 배우려는 열의가 굉장히 뜨겁다. 그만큼 섭취력도 좋을 뿐만 아니라 성장 속도도 빠르다. ‘늘 도전하는 마음으로 발전을 꾀한다.’는 좌우명에 걸맞은 열매맺이를 보면서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가 앞으로 어떤 시기에 또 어떤 도전의 길에 나설지 궁금하다.

 

최규섭 /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자료출처 :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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