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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승과 우승 사이' 김시진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7.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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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김시진 일러스트 / 출처=KBO

 

김시진의 1984년 한국시리즈

 

“뭐? 또 던지겠다고? 너, 그러다 큰일 나. 다리 못 쓸 수도 있다고.” 한양대학교병원 정형외과 의사가 소리쳤다. 의사는 김시진이 한양대 선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한 사이였다. 김시진은 고집을 피웠다. “형, 그러면 누가 던져요?” 김시진이 그럴 만큼 1984년 한국시리즈는 기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규시즌 막판 ‘져주기 게임’까지 하면서 삼성은 한국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선택한 터였다. 그러나 두 팀은 4차전까지 2승 2패로 맞섰다. 롯데 에이스 최동원이 괴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져주기’와 불운…놓쳐버린 우승

 

당시 김시진은 최동원과 ‘맞짱’을 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투수였다. 1958년생인 두 투수는 한국 야구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처음 우승한 19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 때부터 끈끈한 친구였다. 동시에 라이벌이었다.

 

84년 정규시즌 다승왕 최동원(27승)에 이은 2위(19승)가 김시진이었다. 두 투수는 나란히 한국시리즈 1,3,5,7차전 등판이 예정돼 있었다. 대구가 연고인 삼성, 부산이 뿌리인 롯데가 맞붙은 한국시리즈는 영남의 맹주를 가리는 전쟁이었다.

 

한국시리즈 첫 등판을 앞두고 김시진은 대구시민운동장을 향해 운전했다. 동네 골목에서 서행하던 중 어린아이가 보여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아이는 무사했지만, 뒤따르던 아이가 멈춘 자동차 옆에 부딪혔다.

 

김시진은 아이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모든 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병상을 뜨지 못했다. 의료진이 “아이는 괜찮으니 어서 야구장으로 가서 경기를 준비해라”고 했다. 그래도 김시진은 아이 부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이 어머니에게 사과하고 나서야 병원을 떠났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나선 한국시리즈 1차전. 김시진은 3이닝 4실점(3자책)으로 무너졌다. 롯데는 최동원의 완봉 역투로 4-0 승리를 거뒀다.

 

3차전에서 김시진의 삼성과 최동원의 롯데는 8회 말 2사까지 2-2로 맞섰다. 팽팽한 긴장감은 공 하나로 깨졌다. 롯데 홍문종의 타구가 김시진의 왼발 복사뼈를 강타했다(이 뼈는 아직도 갈라진 채로 있다). 김시진은 들것에 실린 채 마운드를 떠났다. 삼성은 9회 말 롯데 정영기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져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몰렸다.

 

▲ 불운이 계속된 김시진의 1984년 한국시리즈 1차전 / 사진 출처=KBO

 

삼성 김일융이 4차전 선발승, 5차전 구원승을 거두며 전세를 뒤집었다. 부상 중인 김시진이 기어이 6차전에 나가려고 하자 의사가 절대 안 된다고 뜯어말린 것이다.

 

“그 때는 개인의 건강이나 성공보다 팀 우승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였어요. 그땐 동원이가 정말 대단했잖아요. 제가 동원이를 너무 잘 알죠. 안경 쓰고 학구적으로 보이지만, 아주 독한 친구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피칭을 하고 있었어요. 그 때 최동원인들 괜찮았겠습니까? 우리 둘 다 그렇게까지 던지지 않았으면 선수 생활을 더 오래 했을 텐데….”

 

6차전 선발로 나선 김시진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피로한 팔로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다 1-0이던 4회 말 3실점하며 역전을 허용했다. 그리고 5회 초 최동원이 등판해 5이닝 무실점으로 구원승을 거뒀다. 김시진의 첫 한국시리즈는 2패(3경기)로 끝났다. 최동원은 7차전 완투승으로 시리즈 4승(5경기)을 거뒀다.

 

역사는 승자독식의 기록이다. 주인공의 신화를 거꾸로 읽으면 누군가의 좌절이다. ‘최동원 시리즈’는 김시진과의 대립구도 덕분에 비로소 완성됐다.

 

85년은 '시진의 시즌’

 

다 잡은 우승을 놓친 삼성은 충격과 좌절에 휩싸였다. 동시에 그 악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도 그만큼 강하게 싹텄다.

 

“팀 미팅 때 누군가 그랬어요. ‘85년에는 전·후기 리그에서 다 1위에 오르자. 그러면 한국시리즈를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말이에요. 나도 속으로 ‘그러면 되겠다’ 싶었죠.”

 

삼성 구단은 더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85년 2월 한국 프로야구 팀 최초로 미국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장소는 플로리다 주 베로비치의 다저타운. 삼성 선수단은 LA 다저스와 합동 훈련할 기회를 얻었다. 토미 라소다 감독 등으로부터 메이저리그(MLB) 시스템을 배울 기회였다. 당시 다저스의 최고 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김일융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줬다. 그걸 김시진도 어깨너머로 배웠다.

 

“발렌수엘라가 같은 왼손 투수라고 일융이 형에게만 알려주는 거예요. ‘오른손 투수도 똑같이 하면 되느냐’면서 나도 들이댔죠. 요즘 많이 던지는 서클 체인지업은 아니었고, 검지와 중지를 벌려서 던지는 스플리터였어요."

 

발렌수엘라 덕에 김시진 피칭의 완성도는 더 높아졌다. 그가 던진 시속 140㎞ 초중반의 패스트볼은 당시에는 상당한 강속구로 평가 받았다. 날카로운 슬라이더도 직구만큼 많이 던졌다. 여기에 ‘드롭(drop)’이라 불린 커브와 체인지업까지 효과적으로 섞었다.

 

게다가 김시진은 정확했다. 투수는 언제라도 스트라이크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변화구를 유인구로만 던지는 게 아니라 여러 로케이션으로 구사할 줄 알았다. 바깥쪽 높은 공을 던진 다음에는 몸쪽 낮은 코스를 찔렀다. 몸쪽 높은 공 다음은 바깥쪽 낮은 코스였다. 이른바 ‘대각 투구’를 자유자재로 할 만큼 그의 제구는 탁월했다.

 

“80년대에는 스피드건이 귀했어요. 국제 대회에 나가야 구속을 제대로 측정했지. 그래서 공 스피드는 별로 신경 안 썼어요. 그건 동원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1985년 미스터올스타 김시진, 그 해는 김시진의 해였다. / 사진 출처=KBO

 

김시진은 85년 269⅔이닝을 던지며 25승(김일융과 공동 1위)을 거뒀다. 평균자책점 2.00으로 선동열(1.70), 최동원(1.92)에 이어 3위였다. 세이브도 10개(구원 5위)나 올렸다. 삼진을 201개 잡아 최동원(161개)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투구의 양과 질에서 단연 최고였다. 그의 투구에는 다른 투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제구가 뛰어난 데도 그해 볼넷을 121개나 허용했다. 땅볼보다 뜬공이 많은 것도 특이했다.

 

“마운드에 서면 전 삼진이나 볼넷을 의식하지 않았어요. 타자를 잡고, 실점을 억제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전 그때 다른 투수들과 달리 하이 패스트볼을 많이 던졌어요. 그래야 떨어지는 변화구가 잘 먹히니까. 높은 공을 건드리는 타자들은 대부분 뜬공으로 아웃됐죠.”

 

완성도 높은 기교파 투수

 

김시진에게 안타는 ‘타자에게 빼앗기는 것’이었다. 반면 볼넷은 ‘투수가 내주는 것’이었다. 득점권에 주자가 나가 있고, 상대 타자가 강하다면 굳이 정면승부를 하지 않았다. 어려운 공을 던져서 타자를 유인했다. 볼넷을 허용해도 다음 타자를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큰 키를 활용해서 위력적인 공을 던졌어도 김시진을 기교파 투수로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투구에 대한 이해, 상대에 대한 분석이 뛰어났다. 그는 등판 전 투구 시나리오를 상세하게 그렸다. 그리고 매 이닝이 끝날 때마다 상황에 따라 게임 플랜을 수정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 1985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김시진 / 사진 출처=KBO

 

85년 50승을 합작한 김시진과 김일융을 앞세워 삼성은 정규시즌에서 77승(1무 32패)을 거뒀다. 당시 삼성의 승률(0.706)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전·후기 리그를 모두 우승한 삼성은 정말로 한국시리즈를 없애 버렸다.

 

85년 김시진은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정규시즌에서 눈부신 성적을 올렸고, 올스타전 1·3차전에서 6이닝 무실점 호투하며 투수로는 처음으로 ‘미스터 올스타’에 등극했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그의 몫이었다. 김시진이 모두를 압도한 시즌이었다. 최고의 시즌을 보낸 김시진은 역설적으로 한국시리즈에 등판할 수 없었다.

 

삼성을 통합 우승으로 이끈 김시진은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유력 후보였다. 팀 동료 장효조(타격 1위, 홈런 3위)와 이만수(홈런 공동 1위, 타점 1위)가 경쟁자였다. 한 팀에서 강력한 후보가 3명이나 나오자 투표인단의 표가 분산됐다. 결국 해태 김성한(홈런 공동 1위)이 MVP를 차지했다.

 

86년 김시진은 196⅔이닝을 던지며 16승(5위)을 거뒀다. 직전 시즌 무리한 탓에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마침 KBO리그에 ‘선동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선동열은 그해 24승을 거두고 해태를 한국시리즈로 끌고 왔다.

 

해태는 선동열을 1차전 선발로 내세웠다. 삼성은 1차전 양일환, 2차전 김일융에 이어 3차전과 5차전에 김시진을 투입할 예정이었다. 광주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앞서 훈련을 마친 김시진은 유니폼을 벗은 채 구단 버스에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7회 말 삼성 투수 진동한이 관중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자 비상이 걸렸다. 버스에서 쉬고 있던 김시진이 급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그답지 않게 제구가 흔들린 끝에 삼성이 3-4로 역전패했다. 김시진은 선발로 등판한 나머지 두 경기에서 모두 패전 투수가 됐다.

 

최동원과 맞붙은 ‘100승 경쟁’

 

불운이 또 다가왔다. 새 시즌도 또 시작됐다. 87년은 김시진과 최동원의 라이벌전이 다시 뜨거워진 시즌이었다. 83년 프로에 데뷔한 두 투수는 네 시즌 만에 77승(김시진), 75승(최동원)을 거뒀다. 다섯 시즌 만인 87년 KBO리그 최초의 ‘100승 투수’에 나란히 도전한 것이다.

 

김시진은 10월 3일 OB전에서 시즌 23승째를 거둬 100승을 꼭 채웠다(이 가운데 OB에 26승을 거뒀다. 김시진은 커리어 내내 롯데보다 OB에 강했다. 84년 삼성이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OB가 아닌 롯데를 선택한 건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두 번째 다승 타이틀도 따냈다.

 

그러나 김시진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를 다시 만나 1차전과 4차전을 모두 졌다. 86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 1패를 기록한 뒤 해태에 3연패를 당한 삼성의 트라우마가 87년에도 이어졌다. 삼성 선수들 모두 우왕좌왕하다 패퇴했다.

 

이렇게 김시진의 한국시리즈는 끝났다. 세 차례의 한국시리즈에서 총 8차례 등판, 승리 없이 7패(평균자책점 5.44)만 기록했다. 김시진에게도, 삼성에도 잔혹한 가을이 이어졌다. “팬들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핑계를 대면 안 되지만, 한국시리즈에 가면 늘 팔이 아팠어요. 그래도 어쩝니까? 던져야죠.”

 

김시진은 씁쓰레 웃었다. 그의 오른팔은 아직도 잘 펴지지 않는다. 팔꿈치 뼛조각이 생겨 우측 뼈에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그의 팔을 수술할 수 없었다.

 

88년 김시진은 144⅓이닝 동안 11승 평균자책점 3.49에 그쳤다. 최동원도 그해 83⅓이닝만 던지며 7승 평균자책점 2.05를 기록했다. 영남의 두 거인이 스러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삼성과 롯데가 내린 결정은 충격적이었다. 그해 11월 22일 삼성은 김시진 외 3명을 롯데에 주고 최동원 외 2명을 데려왔다. KBO리그 역사상 가장 놀라운 트레이드였다. 팀을 위해 온 몸을 던진 그 시절, 두 투수가 느꼈을 상실감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김시진과 최동원 모두 은퇴를 생각할 만큼 괴로워했다. 그러나 다른 수가 없었다.

 

김시진이 롯데 유니폼을 입고 등판한 정규시즌 첫 경기는 89년 4월 14일 OB전이었다. 시즌 첫 등판에서 그는 무려 14이닝을 던졌다. 팔이 계속 아팠는데도 롯데는 그를 교체하지 않았다. 219개의 공을 던지고 기록한 완투승이 김시진에겐 마지막 불꽃이었다.

 

가장 먼저 100승을 달성했으나 우승을 끝내 한 번도 하지 못한 김시진은 92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통산 124승 73패 16세이브 평균자책점 3.12를 남겼다.

 

투수 코치로 네 차례나 우승

 

그라운드를 떠난 김시진은 투수 전문가로 거듭났다. 태평양 투수 코치를 시작으로 96년 현대 피닉스(실업)에서 2년간 일하다 98년 현대(프로) 코치를 맡았다. 그의 지도 아래 김수경이 98년, 조용준이 2002년, 이동학이 2003년, 오주원 2004년 신인왕에 올랐다. 김시진이 이끈 선수들은 한국시리즈에서 지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더 효율적이었고, 더 강했다. 그가 투수 코치로 있는 동안 현대는 네 차례(98, 2000, 2003, 2004년)나 우승했다. “전 그저 능력 있는 투수들을 만났을 뿐입니다. 김용휘 사장님이 선수 스카우트를 주도해주셨고, 김재박 감독님이 마운드 운영에 전권을 주셨어요. 게다가 선수들이 잘 따라주니 좋은 성적이 난 거죠.”

 

화려한 코치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2007년 현대 감독에 올랐다. 그러나 현대는 1년 후 해체됐다. 2009년부터 4년 동안 넥센을 이끌었고, 2013년 롯데 감독으로 3년 계약을 했다. 그리고 두 시즌 만에 자진 사퇴했다.

 

▲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 사진 출처=KBO

 

김시진의 지도자 생활은 선수 생활과 꽤 닮았다. ‘투수 김시진’은 정규시즌 최고의 피칭을 보여주다가 한국시리즈 문턱을 넘지 못했다. ‘코치 김시진’은 모든 영광을 누렸으나, 감독이 되어선 가을 야구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만의 문제가 아닌 선수단 구성, 구단의 외압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그는 “결국 모든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시진도 ‘우승 투수’였다

 

김시진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야구 인생의 모든 길목에서 최동원과 만났다. 그가 이끈 삼성은 ‘국보 투수’가 이끌던 해태에 매번 밀렸다. 그래서 그에게는 우승의 기억도, 심지어 한국시리즈 1승의 기록도 없다.

 

김시진이 추억하는, 그러나 다른 이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최고의 경기가 있었다. 85년 9월 17일 롯데를 상대로 완투승(시즌 24승째)을 거둔 경기다. 삼성이 통합 우승을 확정한 날이다. “아주 난리가 났어요. 선수들은 환호하고 헹가래하면서 1년 전 패배한 한을 풀었죠. 그런데 저는 운동장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더그아웃에서 조용히 짐을 챙겼죠. 물론 너무나 기뻤습니다. 감격적이었죠. 하지만 혼자 있고 싶었어요. 84년 상처를 조용히 치유해야 했거든요.”

 

팬들과 미디어는 단기전에 더 열광한다. 그래서 KBO리그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준, 그래서 한국시리즈를 없앤 85년 삼성을 추앙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래도 김시진은 이 날을 야구 인생 최고의 경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순간, 김시진은 대한민국 최고였기 때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했기 때문이다.

 

김식 기자 / 일간스포츠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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