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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의 전설, '야생야사' 이상훈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1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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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이상훈 일러스트(출처=KBO)

 

무명의 투수가 세운 14타자 연속 탈삼진

 

1992년 4월 9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춘계대학연맹전. 팀 합숙소 이탈을 자주해서 ‘빠삐용’으로 불렸던 마운드 위 고려대 4학년 투수는 성균관대 타자들을 연거푸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스스로는 “귀신이 들렸던 것 같다”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압도적인 투구였다. 14타자 연속 탈삼진. 엄청난 대기록은 그를 단박에 무명의 아마추어 선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야생야사’ 이상훈은 그렇게 한국 야구사에 등장했다.


당시 그와 같은 학교에 다녔던 강상수 전 LG 트윈스 투수코치는 “집안 사정 때문에 (이상훈이) 3학년 때까지는 방황을 진짜 많이 했다. 3학년 말부터 야구에만 집중했고 그해 겨울부터는 아예 합숙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훈련에만 몰두했다”고 돌아봤다.

 

1990년대 LG 트윈스 신바람 야구의 핵심

 

1990년대 ‘신바람 야구’를 몰고 온 LG 트윈스의 전성시대는 이상훈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대학연맹전의 탈삼진 퍼레이드로 LG에 1차 지명된 이상훈은 신인 최고 계약금(1억8800만원·종전 롯데 박동희 1억6000만원)으로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서울을 연고로 하는 LG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는 신인 지명 때마다 주사위를 굴려서 우선 지명권을 가졌는데 LG가 주사위 대결에서 승리하며 이상훈을 품었다. 이상훈과 스트라이프 유니폼의 인연은 그렇게 주사위로 시작됐다.

 

프로 무대 데뷔전은 씁쓸했다. 1993년 4월10일 광주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 전에 구원 등판해 3타자를 상대했는데 ⅔이닝동안 1피안타 1볼넷 2자책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24경기에 선발 등판해 시속 150㎞ 안팎의 강속구를 앞세워 9승9패 평균자책 3.76의 성적을 냈다. 7월까지 9승을 거두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3연속 완투 후유증 탓인지 한 달여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고 이후에도 승수 추가에는 실패했다. 두 자릿수 승수 달성에 실패하며 최우수신인선수상 또한 놓쳤다. 당시 신인왕은 타율, 출루율, 장타율 1위를 기록한 양준혁(삼성 라이온즈)이 차지했다. 돌이켜 보면 1993시즌은 유독 신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이종범(해태 타이거즈), 김경원(OB 베어스), 박충식(삼성 라이온즈) 등이 이때 프로 무대에 한꺼번에 등장했다. 한국프로야구의 젖줄이 됐던 해라고 하겠다.

 

1995년 좌완 투수 최초 20승 달성

 

이상훈은 프로 2년차이던 이듬해(1994년) 18승8패 평균자책점 2.47의 성적을 올렸다. 승리 1위, 평균자책점 5위, 탈삼진 공동 2위(148개)의 기록이었다.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다. 두 경기에 선발 등판해 12⅓이닝을 투구하면서 3점밖에 내주지 않았다. 이상훈은 신인 때 가을야구 무대(93년 플레이오프)에 처음 올라 4경기 14⅔이닝 14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큰 무대 체질임을 알렸다.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던지는 두둑한 배짱이 그의 최대 강점이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왼팔에 한국프로야구 좌완 선발 투수의 역사가 바뀌었다. 29경기에 선발 등판해 12차례 완투(완봉 3차례)를 기록하면서 좌완 선발 투수 최초로 20승(5패 평균자책점 2.01) 고지를 밟았다. 40년 프로야구 역사상 토종 좌완 선발 20승 투수는 지금껏 이상훈 외에 양현종(KIA 타이거즈)밖에 없다. 양현종이 2017년 20승을 올리기 전까지는 21년 동안 이상훈만이 유일하게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좌완, 우완을 통틀어 순수 선발승으로 20승을 채운 토종 투수도 2016년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상훈 이름 석 자로 새로운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1995시즌 방점은 11월 일본 도쿄 등에서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서 찍혔다. 당시 사령탑을 맡은 김인식 두산 베어스 감독은 리그 다승왕 이상훈을 1차전 선발로 낙점했다. 이상훈은 6회 2사까지 4안타 5탈삼진 무실점으로 김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일본의 톱타자 스즈키 이치로와 대결에서는 내야 땅볼과 우익수 뜬공을 유도해내며 3타수 무안타 완승을 거뒀다.

 

한국은 이상훈에 이어 김용수, 구대성, 선동열이 차례대로 등판하면서 경기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았고 결국 0-0, 무승부로 1차전을 끝냈다. 1차전 MVP는 이상훈의 몫이었다. 이상훈은 “3년차 투수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슈퍼게임 1차전 선발의 중책을 맡았던 터라 아직도 그 경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슈퍼게임 두 차례 등판에서 이상훈은 12이닝 9피안타(1피홈런) 2사사구 8탈삼진 1실점(평균자책점 0.75)의 눈부신 성적으로 ‘일본 킬러’의 탄생을 알렸다.

 

▲ 1995년 한일 슈퍼게임 1차전 MVP 이상훈 / 사진 출처=KBO

 

선발 투수로 맹활약할 시기에 이상훈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루틴(야구 습관)을 지켰다. 선발 등판 전날 고기를 안 먹는 것은 철칙이었다. 등판 다음 날에는 고기 섭취로 영양을 보충한 뒤 웨이트트레이닝과 러닝을 하고, 등판날이 가까워질수록 운동을 가볍게 하면서 음식 섭취량도 줄였다. 이러한 루틴을 지키기 위해 월요일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진짜 기계처럼 살았다”는 그는 “루틴이 깨지면 내가 아닌 것 같았다”라고 했다. 그만큼 야구에 진심이었고 진짜 야구를 잘하고 싶었다.

 

선발에서 구원투수로

 

그의 이런 선발 루틴은 1996년 깨졌다. 1995년 228⅓이닝을 투구하고 슈퍼게임 등에도 등판하면서 무리를 했던지 허리 부상이 왔다. 5월1일 대구 삼성전에 선발 등판했다가 척추분리증으로 강판당했고 이후 어쩔 수 없이 구원투수로 변신했다. 손가락 혈행장애 증세까지 있어서 짧게 투구하는 구원투수가 더 어울리기도 했다. 199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팀 마무리 투수로 변신했다.

 

▲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갈기머리 / 사진 출처=KBO

 

구원투수로서도 이상훈은 훌륭했다. 10승6패37세이브 평균자책점 2.11로 구원왕(47세이브포인트)이 됐다. 피안타율은 0.187에 불과했다. 57경기 85⅓이닝 동안 탈삼진 103개를 엮어내면서 이닝당 평균 1.21명을 타석에서 그냥 더그아웃으로 돌려보냈다. 삼진을 잡을 때마다 그는 마운드 위에서 긴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포효했다. 그가 뒷문을 꽁꽁 잠그면서 LG는 1994년 이후 3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LG 야구 황금기는 그렇게 그의 손으로 완성됐다.

 

삼손의 미국/일본 야구 도전기

 

이상훈은 1997시즌 종료 뒤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LG 구단은 보스턴 레드삭스와 임대 기간 2년에 임대료 250만달러, 연봉 220만달러에 임대 계약을 한 사실을 발표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보스턴과의 독점 계약은 타 구단과 마찰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계약 잠정 유보를 결정했고 1998년 1월24일 사무국은 한국야구위원회에 신분조회를 요청했다. 당시에는 포스팅 제도가 정립되기 전이라서 여러 제약이 있었다.

 

이상훈은 2월에 공개 테스트를 받기 위해 LA에 도착했고 1차 테스트(2월19일)에는 불합격을 받았다. LG는 정삼흠 투수코치를 미국으로 파견하면서까지 2차 테스트에 대비한 훈련을 도왔다. 3월26일 2차 테스트에서 보스턴의 60만달러 포스팅 액수가 발표되자 이상훈은 미국 진출을 ‘잠시’ 포기했다.

 

그는 이후 일본프로야구로 눈을 돌렸고 주니치 드래건스와 협상 끝에 2년간 임대(임대료 2억엔) 조건으로 총액 1억3000만엔(계약금 5000만엔, 연봉 8000만엔)에 대한해협을 건넜다. 선동열, 이종범이 속한 주니치에서 이상훈은 그의 별명을 활용한 ‘삼손 리’라는 등록명으로 활약하며 그 해 11경기에 등판했다. 1999년에는 6승5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83의 성적으로 주니치를 1988년 이후 11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상훈은 이후 주니치 이토 대표에게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통보하고 일본에서 귀국해버렸다. 그는 그렇게 처음 원했던 대로 미국으로 향했다.

 

이상훈은 2000년 1월7일 3년 연봉 총액 450만달러(2000년 85만달러, 2001년 145만달러, 2002년 220만달러), 사이닝 보너스 105만달러, 성적 인센티브 270만달러 등 총액 855만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한국, 일본에 이어 미국 야구까지 진출한 그에게는 ‘풍운아’라는 별명도 생겼다. 이상훈은 2000년 6월30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 구원 등판으로 한국인 선수로는 박찬호, 조진호, 김병현에 이어 4번째로 빅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한국프로야구 출신으로는 최초였다.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모두 등판한 최초의 선수도 됐다.

 

2002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던 이상훈은 2002년 친정팀 LG 트윈스로 복귀했다. 메이저리그 성적은 9경기 등판, 승패없이 평균자책점 3.09였다. 복귀 첫 해 이상훈은 7승2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1.68로 건재를 알렸다. 갈기머리를 휘날리면서 불펜에서 마운드로 뛰어가는 모습도 여전했다. 마운드까지 전력질주하는 바람에 숨이 차서 투구 밸런스를 잡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또한 팬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그의 진심이 관중석 팬들에게 가닿을 것이라고 믿었다.

 

▲ LG 팬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2002년 이상훈, 김성근 감독 / 사진 출처=KBO

 

이상훈은 8번 타자를 상대할 때 포수가 변화구를 요구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폼생폼사’(폼에 살고 폼에 죽는)의 직진 야구 인생은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때도 드러난다. 이상훈은 당시 LG가 9-6으로 앞선 9회말 1사 1, 2루에서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에게 동점 3점 홈런을 얻어맞았다. 바뀐 투수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내주면서 LG의 우승 꿈도 날아갔다.

 

그날 밤, 이상훈은 대구 숙소에서 짐을 싸면서 이승엽에게 전화를 걸어 “잘 쳤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패배의 아픔을 준 이에게 먼저 축하의 말을 할 정도로 그는 대인배였다. 이상훈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내가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그 이상의 능력치는 나한테 없다고 생각했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때 나나 팀은 진짜 최선을 다한 진정한 패자였다”고 했다.

 

2004년 초 라커룸 기타 연주로 촉발된 이슈로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로 트레이드되고 몇 개월 뒤 곧바로 은퇴 선언을 한 것도 결국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이상훈은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은 타자들(LG)을 상대로 공을 던지는데 마음 자세가 프로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한 해를 넘겨 또 LG 타자와 마주했을 때는 그런 기분이 무뎌졌을 수도 있는데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1년을 나 자신을 속이면서 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진짜 창피했다”고 했다. 신념이 생기면 신념대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이상훈이 살아가는 방법이었고 그의 야구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철두철미한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풍운아’ 이상훈

 

이상훈의 선수 시절은 ‘준비’로 시작해서 ‘준비’로 끝났다. 혈행장애, 어깨탈골, 척추분리증 등을 앓았으나 선수 생활을 뒤흔들 치명적인 부상이 없던 것도 철저한 준비 과정 때문이었다고 그는 믿는다. 이상훈은 “감독이 나가서 던지라면 던져야 하는 게 선수 아닌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확실한 무기도 하나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게 프로의 120% 의무 상황”이라고 했다. LG에서 그를 지도했던 김성근 현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고문은 “(이상훈은) 자기 원칙이 확실한 선수였다”라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불만이 없었고 한 번 약속한 것은 절대 어기지 않았다. 정말 미안할 정도로 열심히 던지는 투수였다”라고 이상훈을 설명했다.

 

▲ LG 트윈스, 프로야구 좌완 역사를 새로 쓴 이상훈 / 사진 출처=KBO

 

한때는 ‘빠삐용’이었고, 한때는 ‘야생마’였던 이상훈에게 “야구란 무엇인가”를 물으면 “공을 갖고 노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진짜 잘 노는 것.” 그는 야구를 갖고 진짜 잘 놀았던 야구계 ‘삼손’이었다. 지금은 단정하게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이상훈은 “야구는 내 평생의 친구”라고도 말한다. “월요일까지 야구를 했으니까 매일 만나던 친구였다”라면서 “가끔 다투기도 하고 마음이 다치기도 하지만 결국엔 평생 함께해야 할 친구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더 진심으로 야구를 대했는지도 모른다.

 

은퇴 뒤 밴드 로커, 여자야구팀, 독립야구팀, 프로 구단 코치 등을 거쳐 방송 해설위원이 된 그는 후배들에게 “프로야구 유니폼을 입었다고 다 프로야구 선수는 아니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한다. “1군 엔트리에 들어 1년 내내 같은 위치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아프지 말아야 하고 자기 포지션을 끝까지 지켜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진짜 프로 선수다. 프로 유니폼을 입는 동안에는 진정성 있게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

 

이상훈의 야구 삶은 부러질 지언정 휘어진 적은 없었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직진의 야구인생. ‘왼팔의 레전드’ 이상훈의 삶이었다.

 

김양희 기자 / 한겨레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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