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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성호(星湖)와 순암(順菴)의 묘소에서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7. 10.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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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6월 24일 토요일, 우리는 제3회 실학산책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영·정조 시대, 이른바 문예부흥기의 대표적 역사학자 순암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태생지이자 살았던 곳이며 묘소가 있는 광주(廣州)의 텃골, 영장산(靈長山)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을 찾았습니다.
 
33명으로 구성된 산책단은 먼저 순암이 심었다는 아름드리 세 개의 당산나무를 구경하면서 우선 그 장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옆에「이택재」(麗澤齋)가 덩실하게 서있는데, 바로 250년 전에 순암이 연구하던 서재이자 후학을 가르쳤던 서당입니다. 오랜 풍우에 시달렸고 몇 차례 보수는 했지만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순암의 흔적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근기(近畿)실학의 대가들이 배출되었음을 생각하면 만 가지 감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3백 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 산등성이에 있는 순암 부부가 모셔진 묘소에 이르러 우리 일행은 대학자의 영혼에 묵념을 올렸습니다. 큰 인물의 산소인 이유인지 역시 명당임에 분명한 산세였습니다. 텃골은 600년 광주안씨(廣州安氏)의 고기(古基)로 유서깊은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산(安山)으로 옮겨 성호 이익선생의 묘소에도 참배하고 기념관에 들러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많은 유품이나 유물들을 관람했습니다. 성호의 큰 제자는 많기도 했지만 순암으로 이어지는 한 파와 또 다른 제자 녹암 권철신(權哲身:1736-1801)으로 이어지는 한 파가 대표적입니다. 후자는 정약전· 정약용의 학문으로 연결됩니다.
 
성호야말로 다산이 평생 숭모하고 존경하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었으며, 다산은 성호라는 호수를 삼켜 다산이라는 큰 바다를 이룬 분이었습니다. 순암과 다산의 관계를 보면, 다산이 순암을 일생에 단 한 차례라도 직접 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산의 저서에는 순암의 저서들을 여러 곳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순암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서학(西學)을 철저히 반대했던 순암은 서학을 수용하고 창의적으로 계승하려던 녹암 권철신과 입장은 달랐지만, 순암의 지혜가 대단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호·순암·녹암 등의 학문을 종합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여 대학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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