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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조선시대에도 파산이 있었을까? 下

엽기 朝鮮王朝實錄

by econo0706 2007. 9. 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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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상단이 ‘판셈에 대처하는 상단의 자세!’를 모두 갖춘 상황! 드디어 무명상단의 행수는 ‘판셈선언’을 하게 되는데,
 
“에, 그래니까 설라무네…험난한 경제위기 속에서 대충 좀 잘 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또 말처럼 잘 안되더만, 이게 다 정부가 경기를 개판 5분전으로 만들어서 그런거야! 우리도 판셈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흑흑흑…결국 우리상단은 문을 닫고, 판셈처리 하려고 합니다.”
 
무명상단의 판셈선언! 이 한마디에 이 무명상단에 채권을 가지고 있던 상단들과 금융권들은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는데,
 
“야이 개눔 자식들아! 남의 돈 빌려가고는 이제와 판셈이라고? 이 자식들아 기본적인 상도의란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내 돈 내놔! 내돈!”
 
그러나 무명 상단은 묵묵부답 ‘판셈고지’를 한 이후 배째라 식으로 버팅길 뿐이었다. 이쯤되면 판셈이 무엇인지 독자제위들도 대충 눈치 챘을 듯한데, 오늘날로 치면 ‘부도선언, 파산선언’ 정도로 해석 되는 일이다.
 
“휴…박원국 저눔시키 저거 상습적으로 판셈하는시킨데...이번에도 낚였구만, 왠지 찜찜해서 돈 빌려주기 싫었는데….”
 
“어쩌냐? 방법이 없는데…. 낚인 건 낚인 거고, 챙길건 챙겨야지.”
 
“저눔시키가 이미 다 빼돌렸을텐데, 뭘 더 챙겨?”
 
“그래도 남은 찌꺼기라도 챙겨야지. 그럼 너는 안 챙기는 걸로 알고 네 몫은 빼도 되지?”
 
“이 자식아, 내가 그렇게 돈 몇푼에 연연하는 놈으로 보인다면! 정말 잘 봤어. 챙길건 챙겨야지.”
 
이리하여 무명상단의 채권자들이 하나 둘 무명상단의 본사로 모여들게 되었는데,
 
“뭐 판셈을 선언했으니 돈 받을 구멍은 다 막힌 거 같고…일단은 뭐 남아있는 거라도 챙겨서 나눠 가집시다.”
 
“박원국 그놈시키가 알뜰하게 다 처분해서 돈 되는 게 있을라나 모르겠네.”
 
“그래도 뼈라도 발라먹어야지 방법이 있습니까? 일단 돈을 제일 많이 빌려준 경상(京商)쪽이 이쪽 본사건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시고, 송상에서 과수원 권리를 가져가면 될 듯 한데….”
 
“등기부 등본 떼보니까, 이미 설정 들어간 상태라 개털이야! 우린 다른 걸로 줘!”
 
“여의나루터에 있는 창고가 있던데, 그거 가져가실라우?”
 
“에이, 그거라도 챙겨야지.”
 
이렇게 무명상단의 채권자들은 서로들 자신의 채권을 내보이며 무명상단의 자산을 분할해 채권의 크기순으로 나눠 가졌던 것이다.
 
“대충 이 정도에서 시마이 합시다. 더 나올 거 같지도 않고…. 박원국이 이눔시키가 상습 판셈범이라서 웬만한 건 다 땅에 파 묻어버렸을 겁니다.”
 
“아니, 그럼 끝까지 추적해서 은닉 재산을 회수해야 하지 않습니까!”
 
“재주 좋으면 그렇게 하슈~. 돈이 썩는 것도 아니니까, 박원국 그놈시키 계속 기다리다가 이쪽에서 지치면 그때서야 나올건데…. 차라리 깔끔하게 시마이하고 그놈시키 다시 나오면 그때 조지는게 더 빠를 거유.”
 
그랬다. 조선시대 판셈은 오늘날의 부도와는 약간 개념이 달랐는데, 일단 판셈선언을 하면 채권자들이 우르르 달려가 판셈을 선언한 사람의 남아있는 재산을 갈라 먹는 것까지는 같지만, 판셈이 끝나는 순간 판셈 선언자의 남아있는 채무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일부러 재산을 은닉한 다음에 고의적으로 판셈을 선언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이구! 이번 판셈은 빨리도 끝났네. 그럼 슬슬 사업을 다시 해볼까?”
 
“행수 어른, 이번에 중국산 모피가 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음, 메이드 인 차이나가 어디 가겠냐? 따오판이 괜히 따오판이겠어? 차라리 양놈들 거 어때?”
 
“뭐 아무거나 어떻습니까? 장사를 다시하면 그게 어딘데요. 그런데 행수 어른 판셈을 이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게 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상도의상….”
 
“지랄을 랜덤으로 떨어요! 인마, 판셈이라는 건 말야. 나 힘들어! 시마이 할래! 미안한데 좀 봐줘라…라고 선언하는 거야 인마. 그걸 또 대충 눈감아주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게 또 한민족의 넉넉한 여유고, 괜찮아. 대충 이렇게 시간 지나면 다들 또 눈감아 줄거야.”
 
“아니 그래도 너무 상습적이라서….”
 
딱 보면, 재산을 은닉하고 고의로 파산을 일으키는 몇몇 악덕 기업주의 모습을 다시 보는 느낌인데, 조선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상식’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이유는 경제 인프라의 미비라 볼 수도 있지만, 거래 당사자간의 상도의를 믿고 ‘오죽하면 저랬겠냐?’라는 동업자 정신(?)의 발로로 판셈이 끝나고 나면 그 이상의 채권은 눈 감아 주는 한민족의 ‘정情’이라는 감성 때문이었다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조선의 경제가 발전하게 되면서 이런 맹점을 악용해 재산을 은닉하고 고의로 판셈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들은 어제 판셈을 하고, 오늘 다시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는 파렴치한 짓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이다. 경제위기를 핑계로 고의로 부도를 내는 악덕 기업주의 모습의 뿌리를 보는 듯 한 느낌이지만, 판셈을 하고 나면 더 이상의 채권채무에 대해서는 그냥 눈감아 주는 미덕…. 경제활동에도 ‘정情’이란 걸 생각하는 모습은 신용불량자의 채권추심에 열을 올리는 이들에게 한번쯤 뒤돌아 볼 만한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 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료출처 : 스포츠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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