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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육상 (2)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2. 9.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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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8. 22.

 

한국인 손에 의해 조직된 육상경기대회는 조선체육협회 주최 대회가 열린 직후인 1920년 5월 29일 서울YMCA 주최 사립중학교연합대회가 최초였으나 그 뒤 대회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1923년 11월 3일 연희전문은 학교 운동장에서 제 1회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와 다음 해인 1924년 조선체육회가 시작한 전조선육상경기대회는 우리나라 육상경기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1920년 7월 출범한 조선체육회는 육상경기대회를 개최할 경기장으로 학교 소유주인 민영휘가 1923년 계동궁의 절반을 사서 마련한 휘문고보 운동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운동장 넓이를 측정해서 그 넓이에 알맞은 트랙을 앉혔으며 설계는 근대 육상경기의 발상국인 영국에 유학했던 서병희가 맡았다.

 

육상경기대회 준비로 조선체육회 사무실인 계명구락부는 한동안 분주했다. 그때까지 조선체육회가 각종 경기 대회를 열어 모아 둔 기금이 5000원 가량 됐다. 조선체육회는 이 돈으로 육상경기대회 개최에 필요한 허들 기구와 필드 종목의 기구 모두를 사들였다. 이때는 경기 단체별 조직이 꾸려지기 전으로 육상경기를 비롯한 모든 종목 경기 단체의 '선사시대(先史時代)' 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100m 직선 코스를 마련하고 트랙은 한 바퀴가 333m였다. 정식 규격인 400m 트랙을 만들지 못한 건 휘문고보 운동장 사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6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근대식 육상경기 시설을 갖춘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첫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의 조직 과정이 대한육상경기연맹의 뿌리에 해당한다.

 

▲ 1923년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의 원반던지기 경기 장면. / ⓒ대한체육회

 

제 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 종목은 *트랙 종목=100m, 200m, 400m, 800m, 1500m, 5000m, 마라톤, 400m 릴레이, 1600m 릴레이, 110m 높은 허들, 200m 낮은 허들 *필드 종목=높이뛰기, 멀리뛰기, 세단뛰기, 장대높이뛰기, 창던지기, 포환던지기, 원반던지기 등 18개 종목이었다. 오늘날의 세부 종목과 큰 차이가 없는 가운데 허들의 종류를 둘로 나눈 게 눈에 띈다. 당시 선수들의 경기력 수준을 고려한 듯하다.

 

그때 참가 자격에는 '평상시 다리 힘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참가할 수 없다'는 제한 규정이 있었다. '다리 힘을 쓰는 직업'이란 인력거꾼, 우편 배달원, 신문 배달원 등을 가리킨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제한 규정이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다리 힘을 쓰는 직업을 지닌 사람이 육상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들은 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프로 선수라고 본 것이다.

 

이 대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400여명의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소속 단체별로 보면 양정고보, 청년학관, 휘문고보, 경성상업, 선린상업, 협성실업, 제 2고보, 보성전문, 중앙고보, 동래고보 그리고 강계, 평양 등지에서 학생들은 물론 은행원과 상인들도 많이 출전했다. 달리기의 최단거리와 최장거리, 필드의 높이뛰기와 멀리뛰기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100m=최응천(숭실고보 출신) 12초0 *마라톤(15마일, 약 24.1km)=강찬격(송도고보) 1시간31분0초 *높이뛰기=김수기(배재고보) 5피트1인치(약 155cm) *멀리뛰기=최삼광(숭실고보 출신) 18피트3.5인치(약 5.48m)

 

100m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이 무렵 상당한 수준의 훈련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언론은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개최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3편에 계속>

 

신명철 편집국장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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