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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육상 (3)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2. 12. 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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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8. 29.

 

1924년 6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근대식 육상경기 시설을 갖춘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첫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열린데 이어 1925년 5월 25일부터 이틀 동안 훈련원에서 제 2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펼쳐졌다. 그때 훈련원은 경성운동장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그라운드에는 국제 규격의 트랙이 마련돼 있어 대회는 제대로 된 시설에서 열 수 있었다. 이 대회의 대회장은 민족 지도자이자 뒷날 조선체육회 회장이 되는 윤치호가 맡았다.

 

이 대회는 제 1회 대회에서 치른 18개 종목에 해머던지기와 5종경기를 보태 20개 종목으로 펼쳐졌다. 경성운동장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서울운동장으로 불리다가 동대문운동장을 거쳐 2007년 서울특별시의 도심 재개발 계획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대회 달리기 최단거리와 최장거리, 필드 종목의 높이뛰기와 멀리뛰기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100m=강도일(제 2고보, 11초6) *마라톤(16마일)=김수옥(경성공업, 1시간 55분 3초) *높이뛰기=유석남(양정고보, 1m53) *멀리뛰기=권정규(숭실중학, 6m12)였다. 100m는 제 1회 대회보다 0.4초를 단축해 11초대에 들어섰으나 마라톤은 제 1회 대회보다 1마일(약 1.6km)을 늘였을 뿐인데 기록은 24분이나 뒤졌다. 당시에는 풀코스(42.195km)가 아니더라도 장거리 경주를 통상 마라톤이라고 했다. 높이뛰기는 2cm 정도 낮아졌고 멀리뛰기는 26cm 가량 뒤졌다. 그때도 기록 향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1930년대 여자 육상의 강자였던 평양여고 선수들 / ⓒ대한체육회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인이 조직한 조선체육회(1920년 7월 창립)와 일본인이 꾸린 조선체육협회(1919년 2월 18일 결성)가 양립했다. 이 땅에서 열린 첫 번째 육상경기대회가 아쉽게도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했다는 기술한 바 있다.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하는 종합경기대회가 조선신궁경기대회였다.

 

일제의 조선 침탈을 상징하는 사물 가운데 하나인 조선신궁이 1925년 9월 남산에 세워졌다. 때맞춰 준공된 경성운동장에서 그해 10월 제 1회 조선신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 3년 전인 1942년까지 이어졌다. 조선신궁경기대회는 1924년 도쿄 메이지신궁경기장에서 제 1회 대회를 연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조선 지역 대표를 뽑는 선발전을 겸했다.

 

메이지신궁경기대회는 해마다 또는 격년제로 개최됐으며 1932년 제 6회 대회까지 조선 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다가 1933년 제 7회 대회부터 조선 선수들이 출전하게 됐다. 거의 우리 선수들끼리 패권을 다투는 조선신궁경기대회와 달리 메이지신궁경기대회는 우리 선수들과 일본 선수들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1933년 제 7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 육상의 명문 양정고보가 중등부 800m 계주 우승을 차지했다. 2년 뒤인 1935년 제 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는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2시간26분42초의 당시 세계 최고 기록으로 우승했다. <4편에 계속>

 

신명철 기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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