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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4)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8.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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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24.

 

제 4회 전조선축구대회는 11월 21일부터 사흘 동안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소학단이 신설했다. 이 대회를 앞두고 조선체육회는 참가 규정을 고쳤다. '청년단은 3개월 이상 그 단체에 적을 두어야 출전할 수 있고 소학단과 중학단의 경우 그 학교에 1년 이상 재학해야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개정 골자였다.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아다니며 선수로 뛰는 '떠돌이 선수', '집시 선수'들이 뜻있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어 이런 제한 규정이 생긴 것이다. 뒷날 유급생 출전 제한과 시도 간 전학 금지 등 여러 규정이 마련된 것과 비교해 보면 90여년 전에도 부정 선수 문제는 골칫거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체육회는 제 5회 전조선축구대회를 1924년 10월 30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부터 그동안 인력 부족으로 학생들에게 맡겼던 선심을 심판 수를 늘려 심판들이 보기로 하는 발전을 보였다. 또한 관중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우승 팀을 알아맞히는 예상 투표를 실시해 1등 1명에 10원, 2등 5명에 5원 그리고 3등 3명에게는 동아일보 3개월 무료 구독권을 내걸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첫 스포츠 경기 결과 알아맞히기 현상 투표로 알려져 있다.

 

이 대회에는 여성 팬들이 몰려 눈길을 끌었다. 불교농민강습회에 참가했던 여성 회원들이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 차림으로 나타나 불교청년회팀을 응원했으며 기생들이 화제의 경기를 보기 위해 나타나기도 했다. 신여성의 등장 등 시대의 흐름을 나타낸 일이었다.

 

조선체육회는 제 6회 전조선축구대회를 1925년 4월 28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었다. 이 대회부터 전문단이 청년부에서 떨어져 나와 전문학교팀들끼리 경기를 갖게 됐다. 전문단에는 보성전문과 숭실대학, 연희전문, 수원고등농업, 세브란스의학전문, 법정대학, 법학전문 등 7개 팀이 출전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학부가 신설된 것이다. 보성전문은 고려대, 연희전문은 연세대, 세브란스의학전문은 연세대 의대 전신이다.

 

▲ 1926년 8월 도쿄 유학생팀이 평양 광성고보 운동장에서 광성고보와 친선경기를 갖고 있다. / ⓒ 한국 축구 100년사

 

1925년 9월 조선신궁 완공에 때맞춰 준공된 경성운동장(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다 2000년대 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에서 그해 10월 제 1회 조선신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일본이 패망하기 3년 전인 1942년까지 계속됐는데 1924년 도쿄 메이지신궁경기장에서 시작한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조선 지역 대표를 뽑는 선발전을 겸했다.

 

손기정이 2시간26분42초의 세계 최고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 1935년 제 8회 메이지신궁대회 축구 일반부에서 김용식과 김영근, 이유형, 이영민, 채금석 등이 활약한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이는 그 무렵에도 우리 축구 실력이 일본에 앞서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1939년 제 10회, 1940년 제 11회 메이지신궁대회 축구 일반부에서는 함흥축구단이 잇따라 정상에 올라 우리 축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제 11회 대회 축구 중등부에서는 중동중학이 패권을 차지했다. 당시 학제로 보면 고등부 우승을 우리가 차지한 것이다.

 

1941년 제 12회 메이지신궁대회 축구 일반부에서는 평양의 일곡(日穀)이, 중등부에서는 보성중학이 우승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제 13회 메이지신궁대회 축구 일반부에서는 일본 선수들이 섞여 있는 조선 대표 병우가 정상에 올랐다.

 

1930년대 전반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 함흥축구단 등 도시 축구 3강의 대항전과 각종 축구 대회에서 벌어지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연보전(오늘날의 연고전)이 많은 축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축구는 우리가 일본을 압도하는 종목이라 일본인들이 즐기는 야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서울과 평양의 축구 대항전인 경평축구전은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열렸으며 서울과 평양, 함흥 세 도시가 참가한 축구 3도시 대항전은 조선축구협회 주최로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개최됐다. 정기 대항전뿐만 아니라 각종 축구 대회에서 서울과 평양, 함흥이 맞붙는 경기에는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고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대결도 마찬가지였다.

 

신명철 편집위원 sports@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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