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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야구 (13)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5. 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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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 08

 

1975년 제 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을 계기로 한국 야구는 드디어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글쓴이는 최근 강병철 전 롯데·한화 SK·감독을 만났는데 그때 일을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7승1무로 성적도 좋았거니와 대회 직후 한국 야구 사상 첫 세계 규모 대회인 제 2회 대륙간컵대회(캐나다)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강 전 감독은 김호중 이선희 강용수 박상열 우용득 박해종 김봉연 김재박 배대웅 김우열 윤동균 이해창 박영길 등과 함께 야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체력 훈련을 받았다. 야구 선수는 중량 운동을 하면 근육이 딱딱해진다고 웨이트트레이닝을 기피하던 시절이다.

 

1975년 8월 캐나다에서 열린 제 2회 대륙간컵 대회에 출전한 한국은 캐나다 일본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A조에서 들었다. B조는 미국 이탈리아 콜롬비아 니카라과로 편성됐다. 대회 는 조 구분 없이 돌려 붙은 뒤 각 조 상위 2개국이 4강에 올라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 첫 경기에서 홈팀 캐나다에 2-4로 졌다. 이어 콜롬비아에 12-7로 크게 이겼으나 3차전에서 푸에르토리코에 1-4로 패했다. 일본과 맞붙은 4차전에서 한국은 재일동포 출신 김호중이 4회 밀어내기 볼넷으로 내준 점수를 끝내 만회하지 못하고 0-1로 분패했다. 5회 마운드에 오른 이선희는 무실점으로 역투했는데 일본이 한국 왼손 투수에 약하다는 징크스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봐도 크게 무리가 없다.

 

한국은 이후 미국에 2-5로 진 뒤 이탈리아에 11-4, 니카라과에 5-2로 승리해 3승 4패로 니카라과와 A조 공동 3위가 됐다. 이 대회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8-0으로 꺾고 우승했다.

 

한국은 4강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윤동균과 박해종이 3할4푼8리(23타수 8안타)로 타율 공동 7위에 오르고 김호중이 1.38로 평균자책점 3위에 랭크되는 등 개인 성적에서 여러 선수가 10걸 안에 들며 세계 무대에서도 선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대회를 앞두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 루키팀과 3차례 친선경기를 치렀다. 한국 야구와 다저스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제 2회 대륙간컵대회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한국은 2년 뒤인 1977년 이 땅에 야구가 들어온 지 73년 만에 드디어 세계 정상에 서게 된다. 야구의 국내 도입 연도는 오랜 기간 1905년이 정설로 돼 있었으나 최근 들어 1904년이 맞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고 대한야구협회는 2013년 12월 이를 공식화했다.

 

그해 1월 니카라과에서 제 3회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가 열렸다. 대륙간컵 세계대회가 이름을 바꾼 대회였다. 한국은 9개국이 출전한 대회 예선 리그에서 숙적 일본에 0-1로 졌으나 개최국 니카라과를 8-1로 크게 물리치는 등 5승3패를 기록해 8전 전승의 미국에 이어 2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 첫 경기에서 미국에 0-2로 졌으나 니카라과를 13-3, 7회 콜드게임으로 물리친 데 이어 콜롬비아를 4-1로 제치고 상승세를 타더니 푸에르토리코와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4-2로 이겨 3승1패로 최소한 3위를 확보했다.

 

한국은 5차전에서 일본과 다시 만나 이선희가 완투하며 3-2로 승리해 미국과 4승1패로 공동 1위가 됐다. 한국은 일본전에서 5회 초 2사 1, 3루에서 배대웅의 좌전 적시타로 선제점을 뽑았다. 일본은 이어진 5회 말 곧바로 동점을 만들었으나 한국은 6회 초 2사 후 김봉연이 좌월 솔로 홈런을 날려 다시 2-1로 앞서 나갔다. 한국은 9회 초 1사 1, 3루에서 9번 대타 김정수가 우전 적시타를 터뜨려 승부에 쐐기를 박는 듯했다.

 

▲ 신세대 팬들로서는 찾아 볼 길이 거의 없는,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훈련하고 있는 1970년대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

 

◆ 국내 야구 도입 시기 논란 1905년 VS 1904년

 

야구가 이 땅에 들어온 과정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오늘날의 서울YMCA)의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종전의 정설이었다. 1999년 발간된 ‘한국야구사’도 대체로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대체로’라는 표현을 한 이유는 이 땅에 야구를 퍼뜨린 게 일본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국야구사’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1873년 미국에서 야구를 들여왔고 한반도를 침탈하는 과정에서 개항장과 철도 요충지 등에 야구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인천에서 ‘야구 놀이’를 했다고 돼 있기도 하다.

 

‘한국야구사’가 인정한 기록은 1905년이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돼 왔다. 2009년 9월 간행된 ‘서울 YMCA 체육 운동 100년사’에는 야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1905년이 아니라 1904년으로 돼 있다. 이 책에서는 야구의 국내 도입 시기와 관련해 “우리나라에 야구가 들어온 해가 1905년이라고 주장하는 국내 학자들은 일본인 오시마가 쓴 ‘조선야구사’를 인용하고 있다. 오시마는 한국의 야구 도입을 메이지 37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메이지 37년을 서력으로 환산하면 1904년이 된다. ‘1905년을 주장하는 국내 학자들이 메이지 37년을 서력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1년 차이가 난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904년 도입 주장은 꽤 오래전에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의 일장기 말살 사건의 주인공인 동아일보 체육부 이길용 기자가 쓴 ‘조선 스포츠사-특히 한말 전후를 기록한다’에 야구는 YMCA가 창립된 다음 해인 1904년에 들어온 것으로 돼 있다. YMCA 연구자인 전택부 선생은 생전에 "야구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04년쯤이다. 미국 예일대학교 출신이며 만능 운동선수인 필립 질레트가 1901년 내한했을 때 YMCA에는 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에 경신중학교에서 일시 귀국해 있었던 김일, 한민제 등 일본 유학생들과 야구를 한 것이 한국 야구의 효시"라고 밝힌 적이 있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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