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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야구 (12)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5. 20.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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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 01

 

백인천은 병역의무를 고려해 계약 기간을 2년으로 했고 계약금 150만 엔, 연봉 8만 엔을 받기로 했다. 요즘의 화폐 가치와 비교하기 어렵지만 당시 전체 선수단의 중간급 대우였다. 이후 1982년 국내에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돌아올 때까지 백인천은 일본에서 19시즌 동안 활약했다. 1975년에는 타격 1위를 차지했고 일본 리그 통산 타율 2할7푼8리 209홈런 776타점을 남겼다.백인천이 경동고 시절과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활약상을 발판으로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할 무렵 우리나라 스포츠는 민족상잔의 비극적인 전란을 딛고 아시아 무대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 1963년 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박영길(가운데) 등이 우승트로피를 들고 있다.  / ⓒ 한국야구사

 

축구가 1960년 효창운동장에서 제 2회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연데 이어 야구는 1963년 서울운동장에서 제 5회 아시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그해 2월에는 서울시가 옥외 경기장인 장충동 육군 코트 자리에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8천여 명 수용 규모의 장충체육관을 완공해 농구와 배구 등 실내 스포츠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로부터 조금 뒤이긴 하지만 요즘 철거 논란이 일고 있는 태릉선수촌이 1966년 문을 열었다. 한마디로 196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시기다.


그런 가운데 야구가 드디어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1954년 출범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은 물론 필리핀과 대만(당시에는 자유중국이라고 불렀다)에도 뒤지며 2위와 3위, 꼴찌를 오갔다. 한국은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재일동포 출신 투수 신용균(뒷날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등 프로 야구 지도자로 활동한다) 등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을 5-2, 3-0으로 꺾는 등 5승1패로 1954년 대회 창설 이후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신용균 외에 김응룡, 박영길, 김희련 등 이 대회 우승 멤버는 야구 올드 팬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이어 국내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단체 구기 종목 선수권대회에서 거둔 두 번째 우승이었다.

 

▲ 1975년 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의 기념촬영. / ⓒ 한국야구사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야간 조명 시설이 들어서는, 야구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경사가 있었다. 이 대회 우승에 크게 기뻐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1966년 9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야간 경기를 할 수 있는 조명 시설이 완공됐다. 점등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참석하기도 했으니까, 당시로서는 야구장 조명 시설 완공이 국가적인 행사였다. 이후 한국은 1971년 제 9회 대회와 1975년 제 11회 대회(이상 서울)에서 다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1975년 제 11회 대회 우승을 계기로 한국 야구는 드디어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글쓴이는 최근 강병철 전 롯데·한화 SK·감독을 만났는데 그때 일을 특별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7승1무로 성적도 좋았거니와 대회 직후 한국 야구 사상 첫 세계 규모 대회인 제 2회 대륙간컵대회(캐나다)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강 전 감독은 김호중 이선희 강용수 박상열 우용득 박해종 김봉연 김재박 배대웅 김우열 윤동균 이해창 박영길 등과 함께 야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체력 훈련을 받았다. 야구 선수는 중량 운동을 하면 근육이 딱딱해진다고 웨이트트레이닝을 기피하던 시절이다.


야구는 1920년 전국체육대회의 효시가 되는 전조선야구대회를 여는 등 한국 스포츠의 선구적인 종목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트레이닝 방법 등 스포츠 과학 분야에서는 다른 종목에 비해 많이 뒤진 상태였다. 야구 대표팀은 태릉선수촌의 각종 시설을 이용해 체력을 강화하는 한편 기술 훈련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했다. 태릉선수촌에는 당시에도 야구장이 없었고 이후에도 건립되지 않았다. 태릉선수촌을 대체한 진천선수촌에는 야구장이 있다.

 

▲ 1975년 2회 대륙간컵대회(캐나다)에 출전하기 전 친선경기를 치른 강명철(오른쪽) 감독  / ⓒ 한국야구사

 

한국 실내 스포츠의 메카, 장충체육관 중·장년 스포츠 팬들에게는 김기수의 프로 복싱 세계 타이틀매치와 김일의 프로 레슬링 경기, 박신자의 여자 농구 경기 등으로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최근 새 단장을 한 장충체육관은 한국 실내 스포츠의 메카다. 1960년대 이전에도 체육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YMCA, 평양 숭실전문학교 등에 실내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규격에 맞는 실내 코트가 없어서 농구 등 실내 경기 대부분을 옥외 시설에서 치렀다. 해방 이후 몇몇 학교가 체육관을 지었으나 역시 경기를 하기에는 미흡했다.장충체육관은 원래 그 자리에 옥외 코트가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들이 스모(일본 씨름) 경기장을 세우려고 확보해 놓은 터였다. 해방 이후 그 자리에 서울시의 협조로 옥외 농구 코트가 들어섰고 한국은행이 농구대를 기증했다. 이후 민간 차원에서 실내 코트 건설 움직임이 있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무위로 돌아갔고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끝난 뒤 옥외 코트이긴 하나 마루가 깔리고 관중석이 설치된 경기장이 육군의 주도로 건립됐다.‘다시 보는 대한늬우스’에 이따금 등장하는 마루가 깔린 옥외 코트에서 펼치는 농구 경기가 열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극난(남자), 양우(여자) 등 대만팀 초청 국제 경기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 이름이 육군체육관이다. 지붕이 없는 옥외 경기장인데도 ‘집 관(館) ’자가 들어간 체육관이라고 이름을 붙인 게 특이하다.

 

당시 나라의 경제력으로 볼 때 큰 규모의 체육관을 짓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 1960년 3월 서울시는 900여만 원의 예산으로 기공식을 한데 이어 총 공사비 9,200만 원을 투입해 1963년 2월 1일 국제적으로 손색없는 장충체육관을 완공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열기 위해 만든 효창구장 건설에 2억3천만 원이 들었으니 당시 체육관 건립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장충체육관이 필리핀의 원조로 건립됐다는 일설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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