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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야구 (15)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5. 17.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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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 22

 

야구의 경우 프로화 과정에서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브라질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2002년 한일 대회에서는 4강의 성적을 올렸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2년 런던 대회까지 7회 연속 본선에 올랐고 런던 대회에서는 숙원인 메달(동)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로 향상된 기량을 바탕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9전 전승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대항전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는 2006년 제 1회 대회 4강과 2009년 제 2회 대회 준우승의 빛나는 성적을 올렸다.

 

국내 프로 야구는 1982년에 출범했는데 그 이전에도 프로화 움직임이 있었다. 고교 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1975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재미 사업가 홍윤희 씨는 국민의 여가 선용을 위해 프로 야구가 필요하다는 뜻을 갖고 귀국해 야구인들의 의견을 타진했다.홍윤희 씨는 1982년 3월 27일 국내 프로 야구가 출범하자 이틀 뒤인 3월 29일(월요일) 글쓴이가 일하고 있던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실에 ‘프로 야구 출범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국제 전보를 보냈다.

 

그때 일화 한 토막. 전보에 보낸 이가 ‘윤희홍’으로 돼 있어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호헌 사무차장에게 “윤희홍 씨가 누구냐고?”했더니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 맞다. 그 양반이네”하며 무릎을 쳤다. 윤희홍이 아니고 홍윤희였던 것이다.아무튼 홍윤희 씨는 국내 야구인들과 접촉한 결과 좋은 반응을 얻자 프로 야구 출범을 추진하기로 하고 우선 필요한 추진 경비 20만 달러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가 1976년에 다시 입국해 가칭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각종 자료를 수집해 청사진을 만든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는 1976년 2월 이 내용을 발표했다.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는 홍윤희 씨를 회장으로 김계현 한국전력 감독, 이호헌 한국실업야구연맹 사무국장, 장태영 상업은행 감독, 박현식 제일은행 감독 등 8명의 준비 위원들로 구성됐다. 야구 역사에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 봤을 이름들이다. 박현식 감독은 뒷날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사령탑을 맡았다.

 

▲ 1981년 12월 11일 열린 사단법인 ‘한국프로야구위원회’창립 총회에서 서종철 총재가 취임사를 읽고 있다. 한국 프로 야구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날을 기념해 골든글러브 행사가 2013년까지 해마다 이날 개최됐다.

 

그때 프로 야구 추진 계획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1976년에는 당시 실업 야구를 하고 있던 10개 팀을 5개 팀씩 동해 리그와 서해 리그로 나눠 전국 시도에 고루 배치하고 팀당 130경기를 가져 리그 1위끼리 코리안시리즈를 치르고, 1977년에는 첫해 성적을 토대로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에 본거지를 둔 6개 프로 구단을 만들어 페넌트레이스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1978년에는 서울과 전주에 1개 팀씩을 만들어 8개 구단으로 리그의 뼈대를 완성한 뒤 1979년에는 한국과 미국, 멕시코, 일본이 참여하는 월드시리즈를 추진하며 프로 야구 추진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인 1980년에는 한국의 8개 팀과 일본의 12개 팀이 모두 참가하는 동북아시아 리그를 창설하려고 했다.

 

2015년 현재 10개 구단이 벌이고 있는 KBO 리그는 기본이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과 아시아 시리즈 그리고 프로 축구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 리그 등의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듯한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마무리하기로 돼 있던 1980년, 이 땅에는 프로 야구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 시기상조라는 대한야구협회 반대에 부딪혔고 정부에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정국에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친 이듬해인 1981년 봄 정부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일부 스포츠 종목의 프로화 문제가 거론됐다.

 

이후 가장 먼저 야구의 프로화 작업이 결심을 맺어 1981년 12월 11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프로 원년 6개 구단 대표들이 모여 4성 장군 출신의 서종철 씨를 초대 총재로 추대하고 사단법인 ‘한국프로야구위원회’를 창립했다. 당시에는 KBO의 우리말 표기에 프로가 들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서종철 총재는 요즘도 프로 야구 관련 기사에 이따금 나오는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꿈을 키워 주며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밝고 건강한 여가 선용을 약속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문구로 대표되는 취임사를 읽었다. 이 취임사는 1970년대 인기 스포츠 전문지인 야구 기자 출신인 김창웅 초대 홍보실장이 작성했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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