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야구 (11)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5. 21. 16:35

본문

2015. 08. 25.

 

또 하나의 예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인 1960년 11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1962년 칠레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한국과 일본 경기 때 일장기 게양과 일본 국가 연주 문제를 놓고 국무회의에서 경기 개시 직전까지 갑론을박했고 결국 국제 관례에 따라 허용하기로 결정한 일을 들 수 있다. 그만큼 1960년대 초반, 한일 관계는 민감했다. 그런 시기에 백인천이 일본행을 단행하게 된다.

 

그 같은 시대에 백인천이 일본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의 천재성을 대변한다. 백인천의 일본행은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인 1962년 1월 확정됐다. 그 무렵 반일 감정은 요즘 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만 엄청난 반일 감정의 벽을 뚫고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건 당시로서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백인천은 그때 경동고를 졸업한 지 1년이 된 성인 야구로는 햇병아리 선수였다.

 

▲ 백인천 감독의 경동고 시절 ⓒ 백인천 감독

 

고교 최강 경동고의 중심 타자였던 백인천은 3학년 때인 1960년 10월 일본 원정에 나섰는데 8차례 경기를 치르면서 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국내에서 고교 선수가 홈런을 치는 것 자체가 화제였던 시절이다. 홈런 가운데 하나는 도쿄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열린 일본대학 제2고와 경기에서 나왔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진구 구장에서 나온 두 번째 홈런이었다. 도쿄 6대학 리그 경기, 프로 야구 경기 등이 열리는 곳에서 한국의 고교 야구 선수가 홈런을 터트렸으니 일본 야구 관계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 밖에 없었다.

 

3학년일 때 이재환(투수), 오춘삼(내야수) 등과 함께 경동고를 전국 최강으로 이끈 백인천은 고교 졸업 후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요즘으로 치면 프로 팀이라고 할 수 있는 실업 팀인 농업은행에 입단했다. 농업은행에 입단하자마자 1961년 5월 벌어진 실업 야구 1차 리그 개막전에 선발 마스크를 썼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고졸 신인이, 그것도 포수가 프로 야구 시즌 개막전에 선발로 출전한 것이다. 게다가 우승 팀인 교통부와 경기에서 실업 야구 데뷔 홈런을 기록했다. 이어 실업 야구 신인으로 1962년 1월 대만에서 벌어진 제 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표 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국은 대만과 공동 2위를 했고 백인천은 필리핀과 경기에서 이 대회의 유일한 홈런을 기록했다.

 

MBC 청룡 감독 시절의 백인천 ⓒ 백인천 감독

아시아선수권대회 출전 선수단은 일본을 거쳐 귀국했는데 선수단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 신문에 백인천이 일본 프로 구단과 입단 계약을 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한신 타이거스와 다이마이 오리온스(지바 롯데 오리온스 전신) 등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도쿄 6대학 리그의 명문 메이지대학은 백인천에게 입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 신문에 난 내용은 도에이 플라이어즈가 백인천과 계약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터지면 일단 부인하는 게 일반적인데다 당시는 두 나라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기 전이고 한국 선수의 일본 진출은 매우 민감한 일이었다. 홍명보가 1997년 일본 프로 축구 벨마레 히라쓰카로 이적할 때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떠올리면 1960년대에는 어땠을지 대충 상상이 될 듯하다. 도에이 구단은 일단 백인천과 계약 사실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백인천은 귀국한 뒤 도에이 구단의 초청장을 받았고 이 사실을 대한야구협회에 알리고 일본 진출을 선언했다. 초청장은 당시에는 외국으로 가기 위해 매우 중요한 서류였다. 아무튼 이제 공은 대한야구협회로 넘어갔다. 여론은 찬반 양론으로 갈렸고 당시 분위기는 국가 대표 선수가 외국, 특히 일본에 가면 매국노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였다. 이는 1970년대 후반 차범근이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밖에 병역 문제 등을 고려해 대한야구협회는 일본행 추천을 보류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등 사회 유력 인사들이 백인천의 일본행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분위기 바뀌었고 1962년 2월 대한체육회 이주일 회장이 백인천의 일본행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체육 관련 부처였던 문교부도 1년 뒤 귀국 조건으로 백인천의 일본행을 승인했다. 이후 백인천의 도에이 입단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90년 LG트윈스 창단해 우승 축승회 / ⓒ 백인천 감독

백인천은 병역의무를 고려해 계약 기간을 2년으로 했고 계약금 150만 엔, 연봉 8만 엔을 받기로 했다. 요즘의 화폐 가치와 비교하기 어렵지만 당시 전체 선수단의 중간급 대우였다. 이후 1982년 국내에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돌아올 때까지 백인천은 일본에서 19시즌 동안 활약했다. 1975년에는 타격 1위를 차지했고 일본 리그 통산 타율 2할7푼8리 209홈런 776타점을 남겼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스포티비뉴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