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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야구 (10)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5. 2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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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17

 

“그때 사이드암에 가까운 투구 폼이었는데 은사인 한경렬 선생(재일동포 장훈의 나니와상고 선배이며 한국인으로 나니와상고 주장을 지냈다)에게 우타자냐 좌타자냐에 따라 투수판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게 크게 도움이 됐어.” 어우홍 전 감독의 회고다.

 

이런 일화들이 어우러지며 해방 이후인 1940년대 후반, 한국 야구는 빠르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고 1954년 ‘코리아’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1954년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과 일본, 필리핀, 자유중국(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국호, 오늘날의 대만)이 아시아야구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첫 사업으로 그해 12월 마닐라에서 제 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열었다. 한국은 일본에 0-6, 필리핀에 4-5로 지고 대만을 4-2로 눌러 2승1패로 3위를 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 첫 국제 대회다.

 

이후 아시아선수권대회 성적은 프로가 출범하기 전인 1970년대 말까지 야구 팬들에게 최고의 관심사였다.1954년 겨울은 한국전쟁이 휴전된(1953년 7월 27일) 직후였다. 그 무렵 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는 당시 일화에서 알 수 있다. C-46 수송기를 타고 장도에 오른 선수들은 겨울이어서 여름옷을 구할 수 없어 흰 옷감에 물감을 들인 단복을 입고 있었다. 비행기는 계속 남쪽으로 날았고 냉방이 되지 않는 수송기 안에서 선수들은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염색한 단복에서 흰 셔츠로 검은 물감이 배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셔츠가 얼룩덜룩 엉망이 됐지만 비행기에 함께 탄 미군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워 땀을 흘리면서도 단복을 입은 채 견뎠다.급유를 위해 중간 기착지인 홍콩에 내렸을 때 선수단 관계자가 시내에 나가 반소매 셔츠를 사 와 갈아입었다. 한국 선수단은 이 셔츠를 대회 기간 단복으로 삼았다. 주요 국제 대회에 나가는 선수단을 위한 단복 패션쇼를 하는 요즘과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에피소드다.


1954년 제 1회 대회에서 필리핀과 일본에 이어 3위를 한 한국은 이후 3차례 대회에서 2위와 3위를 오갔다. 1959년 도쿄 진구 구장에서 열린 제 3회 대회 1차 리그에서는 일본에 1-20으로 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 경기에서는 좌익수 박현식(프로 야구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이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은 실질적으로 프로인 실업 팀 선수들, 일본은 대학과 사회인 팀 선수들이 출전했다.


야구는 4년 뒤면 제 100회를 맞는, 전국체육대회의 기산점이 되는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여는 등 일제 강점기에도 인기 종목이었다. 우수 선수도 많이 나왔고 박현명(박현식의 형)과 유완식, 김영조 등은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대 중반 시작한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외국으로 진출한 첫 번째 운동선수도 야구에서 나왔다. 주인공은 백인천이다. 백인천이 일본으로 가는 데에는 대한체육회도 관여하는 등 요즘의 시각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다. 야구와 축구, 배구, 골프 등 프로화가 된 종목은 물론 핸드볼과 럭비, 필드하키 등 아마추어 종목 선수들도 아무런 걸림돌이 없이 외국에 나가 활동하기까지 선구자들은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 백인천 사인볼


백인천이 일본에 가려고 했을 때인 1960년대 초반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기 전이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스포츠에서도 매우 제한적으로 교류하고 있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나선 한국은 도쿄에서 두 경기를 모두 치러야 했다.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한국 정부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때 선수단 단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일본 지명,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고 한 말은 유명한 일화다.


또 하나의 사례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인 1960년 11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1962년 칠레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한국과 일본 경기 때 일장기 게양과 일본 국가 연주 문제를 놓고 국무회의에서 경기 개시 직전까지 갑론을박했고 결국 국제 관례에 따라 허용하기로 결정한 일을 들 수 있다. 그만큼 1960년대 초반, 한일 관계는 민감했다.


그런 시기에 백인천이 일본행을 단행하게 된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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