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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야구 (9)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5. 2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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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11

 

글쓴이는 최근 어우홍 전 MBC 청룡·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거의 모든 야구 팬들은 어우홍이라고 하면, 1982년 9월 서울과 인천에서 열린 제 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지도자로 기억한다.

 

194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학생 야구 투수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경남중학교의 장태영, 광주서중학교의 김양중과 명승부를 펼친 뛰어난 투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야구 팬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어우홍 전 감독이 부산 동래중학교(당시 학제는 중·고등학교 통합 과정)에서 야구를 할 때인 1940년대 후반, 활발하게 움직이던 학생 야구 관련 내용을 소개한다.1949년 10월 1일 제 3회 전국지구대표중등학교야구쟁패전(꽤 긴 대회 이름인데 황금사자기대회다)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개막했다.

 

이 대회는 장태영이 이끄는 경남중학교의 3연속 우승이 최대 관심사인 가운데 경남중과 경기중, 광주서중, 동래중, 인천 동산중, 대구 능인중, 군산중 등 7개 학교가 출전했다.개막식에 참석한 인사들을 보면 당시 학생 야구가 요즘의 프로 야구보다 더 큰 관심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익희 국회의장(대한체육회장), 임병직 외무부장관(대한야구협회장), 김효석 내무부장관, 안호상 문교부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존 무초(한국 현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초대 주한 미국 대사) 그리고 주최사인인 동아일보의 최두선 사장 등이 개막식에 자리를 함께했고 최두선 사장이 시구한 공을 무초 대사가 받았다. 무초 대사도 마크 리퍼트 현임 주한 미국 대사만큼이나 야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 올해 황금사자기가 열린 서울 목동야구장. 예전에는 전국지구대표중등학교야구쟁패전으로 불렸다. / ⓒ 스포티비뉴스

 

동래중학교는 이 대회 2회전에서 그해 6월 열린 제 4회 청룡기대회 우승 팀인 광주서중학교을 2-1로 꺾었다. 어우홍과 김양중이 연장 12회까지 피나는 투수전을 펼쳤고 동래중학교는 12회 말 박래용의 스퀴즈번트로 결승점을 뽑았다. 제 4회 청룡기대회 결승전에서 연장 11회 접전 끝에 광주서중학교에 1-2로 져 3연속 우승에 실패해 설욕을 벼르던 경남중학교으로서는 김이 빠지는 노릇이었다.동래중학교는 준결승에서 동산중학교를 3-0으로 눌렀는데 이 경기에서도 어우홍이 완투했

 

다. 10월 4일 열린 결승전에서 동향의 라이벌 동래중학교와 경남중학교가 맞붙었다. 어우홍과 장태영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동래중학교는 5회 말 선두 타자인 5번 타자 어우홍의 중월 2루타와 이승우, 박래용의 적시타를 묶어 3-0으로 앞서 갔다.장태영은 6회 말 어우홍에게 또다시 2루타를 내주고 우익수로 갔고 정만오(뒷날 프로 야구 초창기 기록원으로 활동한다)가 마운드에 올랐다. 이후 경남중학교는 7회 초 1-3으로 따라붙었고 9회 초 무사 만루에서 정상규가 주자 일소 2루타를 때려 4-3으로 역전한 뒤 7-3으로 이겨 이 대회 3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그때 사이드암에 가까운 투구 폼이었는데 은사인 한경렬 선생(재일동포 장훈의 나니와상고 선배이며 한국인으로 나니와상고 주장을 지냈다)에게 우타자냐 좌타자냐에 따라 투수판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게 크게 도움이 됐어.”어우홍 전 감독의 회고다.이런 일화들이 어우러지며 해방 이후인 1940년대 후반, 한국 야구는 빠르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고 1954년 ‘코리아’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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