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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라운지] '거인(巨人)의 추억'

--이용균 야구

by econo0706 2023. 4. 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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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22

 

야구를 기다려 본 적이 있을까. 지하철을 기다리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일요일 아직은 낮 12시. 2시간을 기다려야 시작하는 시구, 팡파르, 플레이 볼, 힘찬 와인드업에 이은 초구. 막대풍선이 맞부딪치며 힘껏 내지르는 소리.

 

2시간 먼저 공항에 나가 그녀 혹은 그가 타고 올 비행기를 기다리는 기분. 그녀는, 그는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생각하는, 첫 마디를 뭐로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우리의 옛날은 어땠을까. 그 짜릿한 첫 키스의 추억을 회상하는. 그것과 비슷할 수 있을까.

 

프리랜서 작가 정범준씨는 2005년 5월15일, “그렇게 2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전날은 롯데의 4-3 짜릿한 역전승. 모처럼 야구와 술에 흠뻑 젖은 채 맞은 다음날 낮 12시. TV 중계를 기다리는 2시간 동안, 정씨는 야구를 떠올렸다. 2시간 동안 지난 23년의 롯데를 추억했다. “사직에 ‘부산갈매기’가 울려퍼지고 관중이 신문지를 흔들고, 파도타기가 ‘열두 번’도 넘게 돌아가는 광경을 보면서 부끄럽지만 눈시울을 붉혔다”(6쪽)는 정씨는 야구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블로그에 글 ‘거인의 추억’을 올렸다.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 저만이 아니었군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추억을 함께하는 이들이 많았고, 용기를 얻은 정씨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3년 만에 책이 나왔다. ‘거인의 추억’(실크캐슬). 부제는 ‘최동원 평전’이다.

 

야구책을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다. 지금껏 감독이나 해외 진출 선수에 대한 책은 나왔어도 ‘평전’ 형식의 야구책은 처음이다. 책에는 팔팔한 최동원이, 고난의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둔 최동원이 있고, 롯데 팬들의 웃음이, 기쁨이, 그리고 지난 몇 년간의 눈물이 녹아 있다.

 

저자는 ‘기록은 연감에 남지만 인상은 가슴에 남는다’(333쪽)고 했다. 그 인상의 추억이 다시 기록으로 남는 게 책이다. 이제 ‘호랑이의 추억’, ‘쌍둥이의 추억’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굴곡 많았던 ‘까치’ 김정수와 ‘야생마’ 이상훈의 연감 기록이 아닌, 그들이 남겨 준 ‘인상’과 ‘추억’을 묶어서 다시 살펴볼 수 있는 팬들의 추억.

 

그래서 다시 떠올려본다. ‘거인의 추억’은 ‘1992년 김민호가 역전 홈런을 날려 해태에 3승2패로 이겼을 때가 더 좋았다’고 했다. 잠실에서 롯데와 해태가 맞붙은 것은 그해 10월4일 플레이오프 5차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맞대결을 올해 다시 볼 수 있다면.

 

2008시즌 4강싸움이 치열하다. 롯데와 KIA의 남은 맞대결은 광주 4경기와 부산 1경기. 광주 1경기와 부산 1경기를 떼어 내어 시즌 막판 잠실에서 2연전을 펼친다면. 16년 전 5차전의 패전투수 이강철은 지금 코치로 남았지만, 그때 그 경기의 세이브 투수 염종석은 아직 마운드에 있다. 추억은 야구를 인생으로 만든다. 그 경기를 보고 싶다.

 

이용균 기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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