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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라운지] 164경기 연속 무패 투수

--이용균 야구

by econo0706 2023. 3. 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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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7. 01

 

2008년 6월19일. 우리 히어로즈는 진필중을 방출했다. 진필중은 ‘연습생’이라 불리는 신고선수 신분이어서 웨이버 공시가 아닌 신고선수 등록 말소 절차를 거쳤다. 한때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도 리그를 평정했던 마무리투수였지만 옛 추억의 그림자만 남았다. 그리고 이날, 조용히 또 한 명의 투수가 신고선수 등록이 말소됐다.

 

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지난해까지 16년을 뛰었고 234경기에서 1승1세이브2패. 방어율은 4.77이었다. 뛰어난 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숫자. 하지만 그는 프로야구에서 유일한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무려 164경기 동안 단 한 번도 패전을 기록하지 않았다. 태평양과 현대를 거친, 왼손 스페셜리스트였던 김민범이다.

 

물론 상대한 타자가 많지는 않았다. 통산 234경기에서 상대한 타자는 542명, 피안타수는 128개밖에 되지 않았다. 한번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2.3명의 타자와 대결했다. 통산 피안타수가 경기수보다 적은 투수는 김민범 외에 LG 류택현과 마무리투수 삼성 오승환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마운드에 오르고도 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능력이다. 김민범은 99년 9월26일 수원 한화전에서 7회에 등판했다가 2안타로 2실점해 패한 게 마지막이었다. 이후 164경기 동안 김민범은 패전을 모르는 남자였다.

 

김민범은 첫번째 패배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구였다. 볼넷으로 주자를 내보내고 내려왔는데, 문창환이 끝내기 안타를 맞았다”고 말했다. 94년 9월11일이었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유일한 승리의 기억은 “화려하지 않은 야구인생이었지만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라고 했다. 2000년 6월15일 SK전이었다. 4-4 동점이던 7회말 한 타자를 잡아낸 뒤 타선의 도움으로 행운의 승리를 따냈다.

 

패전과 승리를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김민범은 현재 우리 히어로즈 원정기록원이다. 그라운드를 떠나 그라운드 뒤에서 상대 전력을 분석한다. 사실 지난 겨울, 히어로즈 창단 당시 4000만원이던 연봉이 2000만원으로 절반이나 깎였다. 구단이 차라리 직원으로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김민범은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김민범의 강릉고 동기이자 태평양 입단 동기였던 이재주는 KIA에서 올시즌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재주는 이제 정신 차렸나 보다”라며 조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원치 않는 은퇴는 아쉽지 않을까. 하지만 김민범은 “후회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천년만년 선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라고 했다. 무패 기록을 더 늘릴 수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무패 기록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인생에서 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왼손타자 몸쪽을 파고들던 직구보다 더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프로야구 유일의 164경기 연속 무패의 투수. 김민범의 무패 행진은 그래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용균 기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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