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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역사에 가장 '폭발적인 첫 5년' 박재홍과 마법의 링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0.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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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박재홍 일러스트(출처=KBO)

 

스테인리스 링을 낀 채 티배팅

 

1996년 봄, 현대 유니콘스에 합류한 뒤 타격훈련을 하는 박재홍을 본 팀 선배들과 코칭스태프는 하나 같이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수십년 야구를 한 그들에게도 신인의 훈련 장면은 굉장히 낯설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재홍이는 왜 저렇게 쳐? 이상하네.” 선배 야수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갸우뚱하며 한 마디씩을 거드는 사이 이선웅 타격코치가 박재홍에게 물었다. “재홍아, 그거는 왜 계속 끼고 치는거니?”

박재홍은 나무 방망이 헤드 중심에 스테인리스로 제작한 링을 끼고 티배팅을 했다. 또 토스 배팅을 했다. 쇠 링을 끼우고 빈스윙을 하는 타자들은 당시에도 흔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기 중 타석에 들어서기 전 대기 타석에서 헤드 무게를 느끼기 위해 잠시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박재홍은 훈련 과정에서 실제 공을 때릴 때도 방망이에서 링을 빼지 않았다.

 

본인은 알았을까? 첫 해에 대기록이 나올 줄

 

그때만 해도 그의 곁에 있던 선배들과 코칭스태프는 물론 박재홍 본인조차 짐작조차 못했다. 그 해 바로 그의 방망이로부터 KBO리그 최초의 30(홈런)-30(도루)이라는 엄청난 기록이 나올 것으로는 누구도 내다볼 수 없었다.

 

박재홍은 KBO 리그 중견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 지금도 그 때 쓰던 스테인리스 링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박재홍은 “그게 바로 나를 밥 먹고살게 해 준 보물”이라고 했다.

 

보물은 보물이었다. 1986년 광주 무등중학교 1학년 박재홍은 광주 북구의 철공소 곳곳을 수 없이 들락거렸다. 방망이에 끼우는 링이 제품화되지 않던 시절이다. 당연히 시중에서 구할 수 없었다. 방망이에 꼭 맞는 크기와 무게의 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직접 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14살 박재홍의 하루 일과였다.

 

“철공소 찾아다니면서 직접 맞췄는데 여러 번 실패했어요. 그러다 이제 됐다 싶었는데, 자꾸 쓰다 보니 그만 쇠에 녹이 스는 거예요. 그래서 스테인리스로 다시 제작했어요. 한 열 개 만들어 크기 별로 해보고, 제대로 된 것 하나 나오기까지 과정이 꽤 길었습니다.”

 

프로 입단 이후 팀 내에서부터 화제가 됐던 그 링은 박재홍에게는 ‘마법의 링’과 다름 없었다. 1986년 제작돼 박재홍이 2012시즌 이후 은퇴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링은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제가 꼭 직접 챙겼어요. 프로에서는 현장 보조원들이 그런 장비를 챙겨주기도 하지만, 그 링 만큼은 어느 누구한테도 맡기지 않았어요.”

 

▲ 1996년 프로무대 데뷔 때부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박재홍 / 사진 출처=KBO

 

광주 서림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무등중학교를 거치며 훈련법과 타법의 골격이 갖춰지는 과정에서 고 최양식 감독을 은사로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링을 끼우고 토스 배팅을 하는 훈련부터 최 감독의 지도에서 비롯됐다.

 

박재홍은 김병현·김종국 등 다른 선수들도 여럿 길러낸 최 감독과 인연이 깊다. 박재홍이 무등중에 진학하자 최 감독도 서림초등학교를 떠나 무등중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남다른 훈련 내용뿐 아니라 움츠리듯 방망이를 들고 서 있다가 폭발하듯 움직이는 박재홍 특유의 스윙도 태동된 시점이다.

 

괴력의 신인, ‘미래의 스윙’을 하다

 

박재홍은 최 감독으로부터 그때만 해도 사실상 금기시되던 ‘어퍼 스윙’을 배웠다.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직선 타구를 많이 만들어내려는 목표점을 갖고 레벨 스윙 또는 다운 스윙을 강조하던 시절이다. 박재홍은 달리 배웠다. 방망이 헤드가 처치듯 한차례 내려간 뒤 퍼올리는 단순한 어퍼스윙은 물론 아니었다.

 

박재홍은 방망이 헤드를 최대한 살려놓고 그대로 돌린다. 히팅 포인트에 이르기 전까지 힘 전달을 위해 방망이 헤드를 최대한 살려두되 뒤에 남겨두는 게 핵심 포인트다. 이 대목에서 박재홍이 슬쩍 내놓은 타격 이론 강의 한 대목.

 

“타격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방망이 헤드를 남겨놔야하는 점이에요. 헤드가 히팅포인트를 지나가는 순간 공이 맞는 면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 스윙의 생명력도 끝나는 거죠.”

 

박재홍은 그 시절 굉장히 이상한 훈련을 했다. 그러나 본인도 모르게 시대를 앞서 갔고 있었다. ‘미래의 스윙’을 하고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KBO리그에서도 타자들 사이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맞는 면의 확보다. 헤드를 최대한 뒤쪽에 남겨둬야 공을 때릴 수 있는 시간적·공간적 면을 지킬 수 있다. 이 시대 리그 간판타자인 키움 이정후와 안타 생산력이 으뜸인 두산 외국인타자 호세 페르난데스가 바로 맞는 면이 가장 넓고 깊은 타자들이다. 여기에 어퍼스윙 계열이 일으킨 ‘뜬공혁명’으로 각 리그 프로야구는 뜨거운 가운데 박재홍의 그 당시 스윙은 시대를 초월해 현재의 트렌드와 닿아있다.

 

박재홍은 어린 시절부터 300번 스윙을 한다면 200번은 방망이 헤드에 링을 달고 돌렸다. 박재홍은 “무거운 링을 끼어 있는 헤드는 앞으로 빨리 내고 싶어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치다 보니 헤드를 최대한 뒤에 두는 스윙이 몸에 익었다”고 말했다.

 

박재홍은 현대 입단 뒤 영상 하나를 보고 그간의 훈련법을 또 한번 확신했다. 당시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뛰던 스즈키 이치로가 자신과 똑같이 링을 방망이에 끼운 채 각종 타격훈련을 하는 모습을 영상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박재홍이 힘을 키울 수 있던 또 하나의 동력은 일상의 훈련이었다. 박재홍은 키 176㎝로 야구선수로 큰 체구가 아니다. 처음 야구를 할 때도 크지 않았다. 어떻게든 파워를 늘려야 했다. 일상에서 할 수 있는 훈련법을 찾았다. 박재홍은 악력과 팔뚝 힘을 기르기 위해 체력 단련 기구를 끼고 살았다. “아령이나 덤벨을 그냥 매일 밥먹듯 했다”고 말했다,

 

박재홍은 무등중 3학년이 되면서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광주일고 진학 이후에는 임선동(휘문고) 조성민(신일고) 등과 함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초고교급 스타로 자라난다.

 

쿠바보다 강했던 리틀쿠바의 전설

 

‘리틀 쿠바’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대표팀에서 함께 뛰던 친구들로부터였다. 임선동과 조성민 그리고 박찬호(공주고) 등은 1991년 미국 LA에서 열린 한미일 청소년야구대회 대표팀에서 함께 한 친구들이었다. 대학 진학 후에도 그 때 멤버들과 각종 국제대회 대표팀에서 동행하는 동안 선수들 사이에서 “재홍이는 꼭 쿠바 선수 같다”는 말이 나왔다.

 

국제대회가 열렸다 하면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이던 쿠바의 빨간 유니폼이 곧 공포이던 시절이다. 특히 쿠바 타자라고 하면 폭발적인 스윙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던 때다. 친구들 눈에는 그 당시 박재홍이 꼭 그랬다.

 

스윙 스피드를 물리적으로 입증할 기회도 있었다. 1994년 IBAF(국제야구연맹) 주최로 세계올스타와 쿠바 대표팀이 경기를 벌인 일본 도쿄돔. 한국 일본 미국 대만 캐나다 등 각국 아마추어 간판선수들과 쿠바 대표팀이 맞붙는 대회였다. 한국 대표로는 3명이 발탁됐다.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박재홍과 임선동, 그리고 심재학(고려대). 박재홍은 당시 소집 기간에 타구 스피드를 측정하는 이벤트를 했는데 세계올스타 선수 중 단연 1위를 했다.

 

박재홍은 프로 입단 첫해인 1996년 프로야구에 큰 바람을 몰고 온다. 30홈런-36도루라는 큰 족적을 남긴 그 해는 사실 스프링캠프조차 가지 못하고 준비한 시즌이었다.

 

고교야구 선수 대부분이 대학 진학 뒤 프로행을 살피던 시절이다. 박재홍 또한 1991년 해태 1차 지명을 받은 상태로 이듬해 연세대에 진학했다. 연대 졸업 뒤 선택은 실업야구 현대 피닉스(현대건설 야구단). 한 해는 더 아마추어에서 뛰면서 그 해 열리는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요량이었다. 그러나 현대가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 태평양을 인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로야구 현대가 해태에 10승 투수 최상덕을 내주면서 박재홍 지명권을 가져오는 트레이드를 추진한 것이었다.

 

지금보다 선수의 선택권이 적었던 시절이다. 구단이 거의 완벽히 주도권을 쥐고 있던 때다. 김용휘 당시 현대 단장이 직접 움직이며 적극적인 설득에 나섰고, 올림픽을 고집했던 박재홍 역시 긴 고민을 끝내고 마음을 바꾼다. 박재홍 영입을 위해서는 아마추어 현대에 내줘야 할 위약금이 필요했던 것도 작용했다. 당시 현대와 해태의 자금력 차이는 너무도 컸다.

 

30-30, 호타준족의 눈높이를 바꾸다

 

복잡한 프로 입단 절차를 거친 박재홍은 미국 플로리다 전지훈련을 떠난 1군 캠프에 합류하지 못했다. 인천고에서 2군 선수들과 훈련하며 1996년 개막을 준비했다. 그 때만 해도 프로 첫 시즌 30-30은 꿈도 꾸지 못했다.

 

“첫 해라도 타율 2할8푼에 15홈런 정도는 때리고 도루는 20개 이상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사실, 대학 시절 대표팀에서 함께 뛰었던 이종범 형이나 류지현 형이 프로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나도 어느 정도는 하겠다는 짐작은 했죠.”

 

박재홍 스스로 기대 이상이었지만, 사실 더욱 놀란 것은 현대 코칭스태프였다. 당시 김재박 현대 감독은 박재홍을 1번타자로 낙점하고 개막부터 중용했다. 3루수가 주포지션이지만 외야까지 가능한 박재홍을 외야수로 이동시킨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 개막 이후 홈런을 펑펑 때리자 한 달도 되지 않아 타순이 1번에서 3번으로 바뀌었다.

 

▲ 1996년 신인왕을 차지한 박재홍. 그 옆은 MVP 구대성 / 사진 출처=KBO

 

리그 전체가 박재홍이란 새 브랜드로 달아오르던 시즌이다. 박재홍만의 타법 하나가 주목 받았다. 반보라도 포수 쪽으로 더 물러나 타격하려는 대부분 타자들과 달리 박재홍은 타석 앞쪽에 스탠스를 잡았다. 스트라이드를 하는 왼발 뒷꿈치가 타석 앞선에 걸치듯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박재홍은 “홈플레이트를 품고 친다는 생각이었다. 이 또한 과거 최양식 감독님께 배울 때부터 해온 것인데 그럴 경우 인플레이 타구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컸다”고 말했다.

 

사실, 따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스탠스였다. 투수 쪽으로 다가가 타구 인플레이 확률을 높이는 이점보다 투수 쪽에서 멀리 떨어져 조금이라도 볼을 더 오래 보는 이점이 많다는 게 대부분 타자의 생각이기 때문. 박재홍 스스로 스윙 스피드에 자신이 넘쳤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박재홍 입단 첫해에는 타석 위치를 놓고 당시 쌍방울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의 어필도 있었다. KBO는 미국과 일본 사무국에 관련 문제를 문의했으나 마땅한 답을 듣지 못했다. 두 리그에도 사례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재홍처럼 입단 시점부터 불기둥처럼 뜨겁게 솟아오른 선수는 없었다. 박재홍은 홈런왕과 타점왕까지 차지한 1996년에 이어 1998년에도 30홈런-43도루로 기록하더니 2000년에도 32홈런-30도루를 올려 통산 3번째 30-30을 첫 다섯 시즌에 기록한다. KBO리그 통산 30-30은 8차례 나왔다. 그 중 30-30을 두 번 이상 기록한 선수도 박재홍이 유일하다.

 

▲ 1996년 30-30을 달성한 박재홍 / 사진 출처=KBO

 

한 시즌 팀 당 126경기만 치르던 시절이다. 입단 이듬해인 1997년에는 허리 부상으로 96경기만을 뛰고도 27홈런을 뿜어냈다. 그럼에도 그 해 홈런왕 삼성 이승엽(32개)에게 홈런 5개만 뒤진 시즌이었다. 도루 또한 22개 기록한 시즌으로 부상만 아니었다면, 홈런왕에 도전하며 또 하나의 30-30을 기대할 수 있던 해였다. 박재홍은 1999년에는 최소경기(400경기) 100홈런 기록도 세웠다. 국내 선수로는 여전히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홈런타자로 도루까지 하는 선수들이 사라져가는 시대다.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라면 체력 관리 차원에서라도 도루를 자제하는 시대다. 그 시절, 박재홍은 그런 계산 따위는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야구장 나가서 뛰는 게 즐거웠다. 야구에 미쳐서 살았던 것 같다”고 그 때를 돌아봤다.

 

다시 돌아간다면, 마법의 링과 함께 다른 반지도…

 

폭발적인 기세가 프로 입단 여섯시즌째인 2001년부터 점차 꺾이기 시작한 것도 물불 가리지 않고 뛴 후유증 때문이었다. 박재홍은 도루할 때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자주 했다. 몸을 던지며 상체가 땅에 떨어지면서 어깨에 충격이 오기 시작했다. 오른쪽 어깨 관절 와순이 파열됐다. 결국 2000년 수술대에 오른다.

 

2003년 ‘정성훈+10억원’에 KIA로 트레이드 된 뒤로는 햄스트링이 찾아왔다. 그 해도 타율 0.301 19홈런 66타점으로 활약했지만, 너무도 화려한 시작을 했던 터여서 웬만큼 잘 해서는 잘 하는 것 같지 않았다. 2004년에는 왼손바닥(유구골) 골절로 프로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미국의 배리 본즈 같은 거포처럼 방망이 손잡이 아래의 노브를 감싸듯 잡았던 손바닥이 누적 피로 속에 골절된 것이었다.

 

박재홍은 FA 일수를 채우지 못한 가운데 투수 김건한(김희걸)과 트레이드로 KIA를 떠나 프로 출발선이었던 인천 연고의 SK로 돌아온다. SK 첫해 타율 0.304 18홈런 63타점 22도루 살아나지만 프로 시절 후반부는 전반부만큼 화려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2007년 이후로 SK 우승 역사의 밀알이 되며 야구인생의 다른 시각을 배웠다. 개인훈련을 많이 하는 스타일인 가운데 2007년 김성근 감독을 만나서는 훈련량이 더 늘었다. 당시 일생에 없던 훈련량을 경험하던 젊은 선수들보다 훈련량이 많을 정도였다,

 

“제가 했던 야구와는 다른 야구를 많이 했죠. 제 야구인생에서 다른 경험을 한 시간입니다. 과정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시간’도 있었다는 게 긍정적 차원에서 또 다시 보이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홈런을 묻자 두 장면을 언급한다. 우선은 입단 첫해인 1996년 30호 홈런. 29호 홈런을 때리고 집중 견제에 시달리며 슬럼프에 빠져있던 9월 3일 잠실 LG전에서 김용수를 상대로 아홉수에서 벗어나며 포효했다. 또 하나는 통산 300호 홈런이다. 2012년 이만수 감독 시절로 출전 기회가 적을 때다. 그해 10월3일 잠실 LG전에서 7번타자 우익수로 출전 기회를 잡았고, 상대 선발 벤자민 주키치로부터 좌월 투런홈런을 때렸다. 300호 홈런은 잠실구장 외야 담장 위 노란 난간 위를 맞고 넘어갔다. 그날 이후 정규시즌 종료까지 잔여 3경기만 남겨둔 상황. 어쩌면 운명 같은 홈런이었다.

 

박재홍은 그해 최종 전 10월6일 문학 롯데전에서 중전안타로 프로 3000루타도 기록한다. 박재홍의 프로 마지막 타석이었다. 프로 통산 300홈런에 267도루. KBO리그 대표 호타준족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2012년은 제5대 선수협회장으로 활동하던 시즌이기도 했다. 판공비로 2군 선수들 방망이를 마련해 돌리는 등 미담을 남긴 회장이었지만, 제10구단 창단 문제로 전장의 한복판에 있던 회장이기도 했다. 10구단 창단을 위해 리그 중단과 올스타전 보이콧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현 10구단 체제의 길을 마련하는 그라운드 밖 업적도 남겼다.

 

박재홍에게 물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 어디로 돌아가 무엇을 해보고 싶냐’고.  “신인이던 96년으로 돌아가고 싶네요. 처음부터 다시 하라면 부상관리도 하면서 더 오래 잘 하고 싶어요. 시대가 지금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지금 시대에 그만한 성적을 낸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솔직히 들어요. 무엇보다 그 때로 돌아가면 말이죠. 지금처럼 노총각으로 있지는 않겠죠.”

 

안승호 기자 / 경향신문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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