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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연승과 마이웨이…'불사조' 박철순의 날갯짓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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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박철순 일러스트 / 출처=KBO

 

‘불사조’와 ‘My Way’

 

죽어도 부활한다는 전설 속의 불새 ‘불사조’. 이 단어 하나로 설명이 끝나는 레전드가 있다. OB 베어스 박철순이다.


22연승과 KBO 최초 MVP. 1982년 KBO 원년에 가장 먼저 빛났던 별이었다. 그러나 짧았던 영광의 시간 뒤에 찾아온 기나긴 부상과 시련의 나날들. 모두가 “끝났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불사조’처럼 다시 생명의 날갯짓을 했다.


어느 순간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는 박철순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고, 어느 순간 박철순은 불굴의 화신, 도전의 아이콘이 됐다.

 

소인국에 온 걸리버

 

“대학 시절에 박철순 선배와 몇 번 상대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땐 그리 인상적인 투수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원년에 본 박철순 투수는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됐더라고요. 키도 크고, 투구시 팔 아크가 엄청 컸어요. 한 번도 보지 못한 변화구를 던지질 않나. 앞서 다른 팀과 경기할 때 너클볼 던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타석에서 타이밍 맞추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원년에 타자들한테는 큰 벽이었어요. ‘다시 안 만났으면’ 하는 투수였죠.” - 전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

 

“철순이는 부산 동광초등학교 6학년 올라갈 때 야구를 같이 시작한 친구였는데, 어릴 땐 제구가 좋았던 투수였어요. 커서는 상대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원년에 OB에 입단한 박철순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죠. 한국 타자들은 잘 알지도 못하던 체인지업에 너클볼, 팜볼까지 던졌어요. 볼끝도 좋고 구종도 다양하니 타자들이 대응을 못했죠.” - 전 롯데 자이언츠 김용희.

 

“위에서 내리 꽂는 스타일이었잖아요. 그런 각이 치기가 참 어렵거든요. 거기에다가 브레이킹볼이 엄청 좋았어요.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니까. 처음 상대할 때 ‘이건 무슨 볼인가’ 했어요. 나중에 너클볼이라는 걸 알았죠.” - 전 MBC 청룡 이종도.

 

1982년. KBO리그가 출범한 첫해, OB 베어스의 투수 박철순은 ‘딴 세상에서 온 투수’였다. 내로라하는 한국의 타자들도 모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소인국에 온 걸리버’ 같았다.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타자들을 너무나도 쉽게 요리해 나갔다.

 

박철순은 한국으로 오기 전 미국 마이너리그(밀워키 브루어스 산하)에서 2시즌을 뛰었을 뿐인데, 차원이 다른 구종과 구위를 보유한 투수로 변모했다. 여기에 견제와 번트수비 등 기본기도 제대로 갖춘 투수가 돼 돌아왔다.

 

잘 생긴 얼굴에 잘 빠진 몸매. 왼 다리 무릎을 가슴 높이까지 끌어올리는 다이내믹한 하이키킹 투구폼에 팬들은 매료됐다. 폼만 멋진 것이 아니었다. 140㎞ 중후반대의 빠른 공과 움직이는 볼끝. 여기에 체인지업, 너클볼, 팜볼까지. 아직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한 국내 타자들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박철순의 ‘마구’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승리의 요술램프…22연승의 시작과 끝

 

OB 베어스는 1982년 3월 28일 서울운동장야구장(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전을 통해 역사적인 첫 경기를 치렀다. 미국에서 선진야구를 배우고 돌아온 에이스 박철순이 등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박철순은 기대대로 9-2 승리를 이끌며 데뷔 첫 선발등판을 완투승으로 장식한다.

 

첫 승의 기쁨도 잠시, 2연패에 빠졌다. 언론에서 부정적인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파에 대한 기대를 잔뜩 품고 있었던 팬들도 실망했다.

 

그러나 OB 베어스 초대 사령탑을 맡은 김영덕 전 감독은 “감독인 나나 투수코치인 김성근이나 박철순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2연패 뒤 거짓말 같은 22연승 / 사진 출처=KBO

 

“우린 전지훈련부터 쭉 박철순을 지켜봤잖아요. 투구폼도 예뻤고, 공도 빨랐고, 컨트롤도 좋았어요. 당시 국내에서는 보지도 못하던 팜볼이나 너클볼도 던지고…. 2패를 했지만 우리 팀 타선이 터지지 않아 승운이 따르지 않은 측면도 있었고요. 투구내용이 나쁘진 않았어요. 우린 그때도 박철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해내더라고요.”

 

김영덕 감독의 기억처럼 박철순은 그 이후 ‘불패 투수’로 거듭났다. 4번째 등판이던 4월 10일 전주 해태전에서 3이닝 무실점으로 구원승을 올리면서 연승의 자기장을 만들었다.

 

이때부터였다. 등판할 때마다 자석처럼 승리를 잡아당겼다. 호투를 하는 날은 당연히 이기고, 다소 흔들린 날은 타선이 폭발해 이겼다. 박철순이 등판하면 승리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은 다시 승리를 불러왔다.

 

4월 4연승, 5월 7연승, 6월 6연승….

 

원년엔 팀당 한 시즌 총 80경기(전기리그 40경기, 후기리그 40경기)를 소화했는데, 박철순은 전기리그에서만 팀의 40경기 중 24경기에 등판해 17연승 포함 18승2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1.99를 기록했다.

 

OB 베어스는 전기리그에서 29승11패를 기록했다. 당초 잘해야 3~4위권 정도로 평가받던 전력이었으나 박철순이라는 승리의 요술램프를 만나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등판하면 승리가 피어올랐다.

 

당시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후승팀이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하는 시스템.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낸 OB는 전기리그에서 무리한 박철순에게 휴식을 주기로 했다. 한국시리즈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그런데 OB 구단은 후기리그에서도 선전을 펼쳤다. 한 달 가까이 충전한 박철순은 7월 31일 삼미전에 구원등판해 세이브를 올렸다. 후기리그 첫 등판이었다. 그 이후에도 무리하지 않고 꼭 잡아야할 경기에 등판해 세이브와 승리를 번갈아 올렸다.

 

8월 15일 동대문 MBC전 구원등판 후 4.2이닝 무실점으로 19연승과 시즌 20승 고지를 밟았다. 8월 19일 동대문 삼성전에서 완봉승으로 20연승과 21승째를 수확했다.

 

또 다시 3주 가까이 쉬었다. 9월 8일 대구 삼성전에서 2이닝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올린 뒤 9월 11일 대전 롯데전에서는 완투승으로 21연승을 달렸다. 그리고 9월 18일 대전 롯데전 9이닝 무실점으로 역사적인 22연승의 이정표를 세웠다.

 

22연승 열차가 멈춰선 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박철순에게도 마침표를 찍어야할 시간이 찾아왔다.

 

9월 2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더블헤더 제1경기. 원년엔 각 팀이 연고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간간이 특별 홈경기를 치렀는데, 이날 잠실 경기는 롯데의 홈경기였다.

 

3-3 동점으로 진행되던 9회말 1사 1루에서 구원등판한 박철순은 무실점으로 막아놓고 한숨을 돌렸다. 요즘엔 더블헤더 제1경기에서 9회까지 동점이면 무승부로 처리하지만, 당시엔 연장 승부를 벌였다.

 

연장 10회말. 선두타자 박용성에게 안타를 맞은 뒤 계속된 1사 2루. 박철순은 여기서 부산 동광초 2년 후배 김용철에게 끝내기 좌전 적시타를 맞고 말았다. OB 베어스의 3-4 패배. 박철순의 22연승 열차가 멈춰선 순간이었다.

 

2013년 일본프로야구 다나카 마사히로가 24연승을 세우기 전까지, 박철순의 22연승은 단일 시즌 기준으로 세계 최다 연승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888년 팀 키프와 1912년 루브 마콰드 등 뉴욕 자이언츠 투수들이 기록한 19연승이 최고 기록. 그만큼 연승을 이어간다는 건 세계 어디서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철순의 22연승을 신화로 부르고 있다.

 

▲ 82세계선수권 MVP 시절 박철순 / 사진 출처=KBO

 

박철순은 22연승 행진에 마침표를 찍은 뒤 승리 하나와 패전 하나를 추가하면서 첫 정규시즌을 마쳤다. 팀의 80경기 중 36경기(선발 19경기)에 등판했고, 24승(8구원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완투만 15차례였고, 224 2/3이닝을 던졌다. 다승 1위에 평균자책점 1위. 거기에 승률(0.857)도 1위였다.

 

원년에 타자들의 개인 타이틀은 분산됐지만, 투수는 사실상 박철순의 독무대였다. 정규시즌 투수 3관왕을 차지하는 데 적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박철순은 KBO 최초 정규시즌 MVP까지 차지하는 영광의 시간을 맞이했다.

 

쓰러진 술병 같았던 나날들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에 촛불처럼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야구인생이 가시밭길에 놓였다. 부상이라는 불청객이 시시때때로 찾아왔고, 시련이라는 재앙이 삶을 무너뜨렸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2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비롯된 아픔이었다.

 

OB는 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낸 뒤 후기리그엔 마음을 비웠다. 그런데 야금야금, 슬금슬금 승수를 쌓아가더니 후기리그 막바지에 우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9월 29일 대구 삼성전. OB는 시즌 최종전인 이날 에이스 박철순을 선발로 투입했다. 이 경기만 이긴다면 후기리그 우승까지 차지해 원년 한국시리즈를 없애고 초대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박철순은 여기서 이상 신호를 만났다. 운명의 8회말. 무사 1루에서 오대석의 희생번트 타구를 처리하다 허리를 삐끗했다. 허리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경기가 경기인 만큼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다.

 

1-1 동점에서 승부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고, 12회말로 넘어갔다. 박철순은 힘이 떨어져가고 있었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 2사 1·3루에서 삼성 5번타자 함학수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말았다. 완투패로 정규시즌 마지막 투구를 마친 박철순은 화장실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허리가 끊어져도 좋다’며 이를 악물고 던졌는데, 실제로 허리가 망가져 버렸다.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후송돼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10월 5일 시작된 원년 한국시리즈. 박철순은 2차전까지 보이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OB가 1무1패로 밀린 상황. 그런데 3차전을 앞두고 박철순이 동대문 구장에 나타났다. 코칭스태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이 좋아졌다”며 거짓말을 하면서 던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거기서 누구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결국 진통제 주사를 맞은 박철순은 3차전과 4차전에서 팀이 리드할 때 등판해 세이브를 올렸다. 박철순이 돌아오자 OB는 연승 행진을 시작했다.

 

5차전 등판을 거르고 5-4 승리를 지켜본 박철순은 최종 6차전에 선발등판했다. 그리고는 9이닝 완투로 8-3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마지막 타자 배대웅의 타구를 처리하려고 점프를 했다가 착지하는 순간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메이저리그 도전을 멈추고 돌아와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했다는 감격에 마운드에 주저앉은 채 두 팔을 하늘 위로 들어올렸지만, 허리에는 또 다시 충격이 가해진 상태였다.

 

이후부터는 영광보다는 시련의 시간이 길어졌다. 1983년 2월 대만 스프링캠프 도중엔 허리 디스크 증세로 쓰러져 일본 병원으로 후송됐고, 오랜 재활 후 그해 9월 22일 MBC전에 복귀했지만 하필이면 1회말 송영운의 직선타구에 허리를 맞고 쓰려졌다.

 

1984년 미국에서 두 차례 허리수술을 받았지만 하반신이 마비됐다. 머리카락이 다 빠진 채 휠체어를 타고 귀국한 모습을 본 야구 관계자와 팬들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일상생활도 어려워질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쓰러진 술병처럼 우울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기적처럼 일어서서 마운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하늘의 장난은 계속됐다. 1988년에는 속옷 CF 촬영을 위해 점프를 하고 착지하는 과정에서 왼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졌고, 인대를 이어붙이는 수술을 했지만 왼쪽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다시 도전했다.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에 성공해 또 마운드에 돌아와 공을 던졌다. 그러면서 ‘불사조’ 별명을 얻었다.

 

남들은 모두 “끝났다”고 했지만 그는 날개를 접지 않았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부활했다. 1996년까지 15년간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서 버텨냈다.

 

▲ ‘불사조’처럼 돌아와 끝내 95년 OB 우승을 함께한 박철순  / 사진 출처=KBO

 

마이웨이와 마운드 키스

 

박철순은 KBO리그 통산 76승 53패 20세이브, 평균자책점 2.95의 성적을 남겼다. 원년에 기록한 24승을 빼면 사실 나머지 14년간 52승에 불과하다. 한 시즌도 10승 고지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박철순은 우리에게 숫자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존재였다. 그는 끊어진 허리와 발목을 붙잡고 절망 대신 희망을 노래했고, 좌절 대신 도전을 선택했다.

 

▲ 지금 시대에 더 큰 울림을 주는 박철순의 야구 인생 / 사진 출처=KBO

 

그가 마운드에 돌아올 때마다 팬들이 뜨거운 박수로 맞이한 것도, 1997년 4월 29일 ‘마운드 키스’를 하고 떠날 때 팬들이 뜨거운 눈물을 훔쳤던 것도, 단순히 한 야구영웅에 대한 헌사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도전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불사조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는지 모른다.

 

박철순은 ‘KBO 40주년 레전드 40인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랐다. “정말입니까?”라는 말을 되뇌었다.

 

스스로 ‘한물간 스타’, 그래서 ‘잊혀진 인물’이 되지는 않았을까 걱정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먼저 빛났던 별을 빼놓고 어찌 레전드를 논할 수 있을까.

 

“그동안 훌륭한 선수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습니까. 투표를 통해 40인 레전드를 뽑는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저는 잠깐 반짝하고 사라진 선수라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저를 잊지 않고 40인 안에 포함시켜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애들도 좋아할 것 같네요.”

 

말이 나온 김에 그에게 ‘40년 전 박철순을 만난다면 무슨 얘기를 해주고 싶냐’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40년 전 박철순이라…. 우선 고맙다고, 애 많이 썼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 때문에 지금 이렇게 잊혀지지 않고 영광스런 자리에 뽑히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그 시절 프로야구 선수로서 몸 관리를 그렇게 못 한 것은 부끄럽죠. 다른 선수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똑같을 것 같아요. 40년 전 박철순을 지금 만나면 ‘23연승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네요. 하하하. 인생 뭐 있습니까. 한 번 정도는 불살라줘야죠.”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My Way)’ 노래가 잠실구장을 울려 퍼질 때,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우리에게 많은 스토리와 추억을 만들어줬다. 불사조는 마지막 날개를 접었지만, 그의 21번은 영구결번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아직도 날갯짓을 하고 있다.

 

이재국 야구전문기자 / 스포팅제국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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