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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최고 중견수' 이순철, '한석봉식 훈련'으로 날다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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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이순철 일러스트 / 출처=KBO

 

이순철은 왜 외야 전향을 머뭇거렸나

 

1986년 정규시즌 개막을 앞둔 봄날이었다. 해태 선수들이 훈련 중이던 광주구장 1루 더그아웃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흘렀다. ‘코끼리’ 김응용 감독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외야 안나가려면 왜 더그아웃에 앉아있어.” 프로 첫시즌인 1985년을 3루수 겸 1번타자로 뛰며 신인왕을 받은 이순철은 이듬해 시즌 개막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포지션 변경을 주문 받던 중이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3루수 출신 한대화가 그해 3월25일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며 이순철이 자리를 옮겨야하는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었다.


프로야구였지만, 리그의 정서는 완전히 ‘프로화’되지 못했던 과도기였다. 더구나 그곳은 선후배간 위계 질서가 확실한 해태 타이거즈. 이순철은 외야로 나가려니 국가대표 1번타자 겸 중견수로 한 시대를 장식한 김일권 선배부터 보였다.


“그때는 어떻게든 중견수는 안하려고 했어요. 김일권 선배가 계신데, 내가 꼭 그 선배 자릴 뺐으러 가는 것 같더라고요. 선배와 경쟁한다는 게 부담되면서 싫었어요. 저도 나름대로 버텼지만, 감독님도 화가 많이 나셨을 때예요.”


이순철은 탄생 40년이 넘어가는 KBO리그 초창기 최고의 중견수로 통한다. KBO리그 중견수 계보를 만든 첫 주자다. 그러나 그가 중견수로 펄펄 날기 전에는 이같은 ‘산통’도 있었다.

 

축구대표팀 붉은 유니폼 대신 해태의 빨간 유니폼

 

이미 외풍과 변화에는 익숙해 있던 야구인생이었다.

 

광주 서림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야구를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 이상 늦었다. 이순철은 축구부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축구를 했던 몇몇 외가 사촌 형들 영향도 받았다. 전교에서 가장 발이 빨랐던 덕분에 축구를 꽤 잘했다. 그때만 해도 훗날 입을 ‘붉은색 유니폼’이 야구 유니폼이 될 줄은 생각할 수 없었다.

 

축구부가 전격 해체되며 소년 이순철은 새 종목을 찾아나서야 했다. 교내 육상부와 핸드볼부를 잠시 오가던 중에 “야구 한번 해보자”는 야구부 코치의 제안을 받았다. 축구 외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야구를 선택한 배경이었다.

 

첫 포지션은 포수였다. 포수 출신 감독을 따라 포수로 야구를 시작했다. 그러다 빠른 발놀림에 볼 처리 감각이 눈에 띄어 유격수로 발탁됐다. 프로 입단 전까지 가장 자주 섰던 포지션이 바로 유격수였다,

 

전남중에 이어 전남고에서도 유격수로 뛴 이순철이 전국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학년 시절 나선 봉황대기 1회전 때였다. 1회전 상대는 당시 양승호·김정수·김경표 등 고교 스타들이 즐비하던 우승후보 신일고. 신일고의 콜드게임 승이 예상되는 매치에서 대파란이 일어났다. 전남고는 1학년 투수 김태업과 공수겸장 재간둥이 이순철의 활약으로 신일고를 1-0으로 잡으며 대회 최대의 이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전남고 선수들은 운명의 소용돌이를 앞두고 있었다. 학교 야구부가 전격 해체된 것이었다. 당시 이순철은 봉황대기 성과로 유명세를 타며 충청권 명문 천안북일고와 서울 영동고 등 몇몇 학교에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고심 끝에 선택은 고향 팀으로 야구 명문인 광주상고(동성고)였다.

 

광주상고로 전학 이후에 선배 유격수 때문에 좌익수로 잠시 빠졌다가 유격수로 돌아왔던 이순철은 연세대 진학 이후에도 외야수로 나가게 된다. 훗날 해태에서 다시 만나는 선배 유격수 조충열이 4학년으로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철은 연세대 2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처음에는 유격수로 뽑혔다. 그러나 툭하면 외야로 나가다보니 유격수로는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3학년이 되자 한양대 1학년 류중일이 유격수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순철이 대표팀에서 다시 외야로 나가게 된 배경이었다. 어쩌면 외야가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3루수로 적응하자마자 프로입단 1년만에 외야로 이동하게 된 이순철은 2시즌 뒤 선배 김일권이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되면서 붙박이 중견수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다. 조금은 불편했던 2년을 보내면서 중견수로 날아오를 채비도 나름 하고 있던 중이었다.

 

▲ 개막식에서 선서를 하는 이순철 / 사진 출처=KBO

 

눈 감고 타구를 느끼다…빛 보는 한석봉식 훈련

 

이순철은 중견수로 처리가 어려운 타구를 누구보다 쉽게 잡아냈다. 좌우중간의 깊은 타구도 낙구 지점에 어느샌가 먼저 도착해 귀찮은듯 포구한 뒤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야로 공을 던져주는 것이 ‘시그니쳐’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기 싫은 것 같아 보였을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는 노력을 참 많이 했어요. 결국 중견수로 나가면서도 준비를 많이 했어요."

 

이순철은 경기 전 다른 선수들이 타격훈련을 할 때면 중견수 위치로 나가 전광판 쪽을 바라보며 타구 음만으로 타구 방향과 거리를 판단하는 훈련을 했다. 불 끄고 글을 쓰는 ‘한석봉식 훈련’으로 감각을 끌어올렸다. 상대 팀 훈련 시간에도 그냥 쉬는 법 없이 먼발치에서 타자들이 타격하는 것을 관찰했다.

 

“지금은 선수들 타법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우타자가 오른쪽으로 칠 때와 좌익수 쪽으로 칠 때 소리가 달랐어요. 여기에 타자별 습성을 머리 속에 미리 데이터화해 놓으면 타구 방향으로 한 발짝이라도 더 먼저 스타트를 끊는 데 유리했죠.”

 

이를테면 삼성 이만수는 전형적으로 당겨치는 풀히터였다. 삼성 장효조는 결대로 갖다 맞히는 타격이 많은 교타자였다. 또 삼성 김성래는 거포였지만 우중간 타구도 많았다. 이순철은 장효조가 나올 때면 앞쪽으로 스타트할 준비를 했다. 김성래가 나올 때면 해태 투수의 패턴까지 계산에 넣으며 타구 방향을 잡는 데도 변화를 줬다. 또 MBC 청룡 우타자들은 백인천 감독의 영향으로 손목을 많이 쓰는 풀히터들이 많았다. 주포 이광은이 꼭 그랬다. MBC 우타자들이 타석에 설 때면 좌중간을 의식하며 수비하는 횟수가 늘어난 이유였다.

 

이순철은 신인 첫해 99경기에 출전하면서 득점 1위(67)에 오르며 타율 0.304 12홈런 50타점에 31도루를 기록했다. 도루왕 3차례(1988, 1991, 1992)에 안타왕에도 1차례(1992) 올랐다. 골든글러브도 5차례나 수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톱타자로도 홈런 생산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이순철이 키 173㎝의 크지 않은 체구에도 두 자릿수 홈런을 꾸준히 때린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형 타이어를 밥먹듯 때린 효과였다.

 

20홈런 남짓이면 홈런왕이 되는 시대였다. 이순철은 1992년 20(21홈런)-20(44도루) 클럽에 가입하는 등 통산 145홈런을 때렸다. 한방 있는 1번타자였다.

 

“입단 때부터 나무 방망이 적응에 어려움은 없었어요. 어렸을 때 타이어를 많이 쳤던 게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원래 타이어 때리는 훈련은 일본 훈련 문화인데, 특별히 웨이트 기구 등이 없던 시대에 일본에서 야구를 하신 장훈 선배 등이 전수해 주신 거예요. 허리에 대형 타이어를 끈으로 매고 달리기도 하잖아요. 나도 그걸로 힘을 길렀어요.”

 

어쩌면 ‘낭만시대’의 훈련법이다. 집 마당에 대형 타이어를 걸고 200번 이상 스윙을 하며 고무 튕기는 소리를 내도 옆집에서 ‘아이가 운동하나 보다’라는 좋은 마음으로 항의 한번 않던 시절이다. 그때 하루도 쉬지 않고 타이어를 때렸던 것이 이순철의 야구 밑천이 됐다.

 

▲ 역동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던 이순철 / 사진 출처=KBO

 

다시 돌아간다면, 깨고 싶은 ‘완벽주의’

 

기본적인 공수주 능력에 야구 센스가 뛰어난 선수였지만, 타격을 놓고는 미련과 후회가 많았다. 이순철은 그 당시로는 흔치 않은 ‘공부하는 타자’였다. 생각이 많은 타자이기도 했다. 1987년 시즌을 마친 뒤에는 당시 미국프로야구 유명 타격코치 찰리 로가 저술한 ‘3할의 예술(The Art of Hitting .300)’이라는 책을 몇 차례 읽는다. 이순철은 “세로운 세상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타격에 대한 접근법을 새로 정립하면서 훈련량으로 확신을 가져갈 때다.

 

결과는 좋았다. 1988시즌 들어 타율 0.313 13홈런 81득점 52타점에 58도루. 한국시리즈에서도 맹활약하며 최고의 시즌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때 타격에 대한 생각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 이순철에게는 ‘회한’이다.

 

이순철은 훈련 과정부터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좀체 만족을 하지 못했다. 경기별로 성적이 주춤하다 싶을 때면 그저 사이클로 여기고 넘어갔으면 됐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바로 해법을 찾기 위해 바로 움직였다. 호텔방에서 밤 새도록 몇 천번 스윙하느라 잠 한숨 못 자고 경기에 나선 일도 있었다.

 

“선수생활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가 되는 건 ‘나 자신을 너무 학대했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안될까, 하면서 너무 자책을 많이 했어요. 성장 과정에서는 그런 습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성인이 돼서는 경기가 끝나면 그냥 잊어버릴 줄도 알아야하는데 털어버리지를 못했어요. 그런 것들이 타격에 너무 많은 영향을 줬어요.”

 

야구는 7할의 성공, 3할의 실패가 경계를 넘나드는 종목이다. 그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과하게 자책하지 말라”는 얘기는 이순철이 지금도 해설위원으로 현역 선수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조언 중 하나다.

 

이순철은 스스로 ‘조용한 선수’였다고 자신을 돌아본다. 1993년 해태에 입단하며 자기 자리를 위협한 이종범을 두고는 “화려한 야구를 했다”면서도 본인은 다른 스타일의 야구를 했다고 자평한다.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치를 높여서인지 선수생활을 놓고는 늘 겸손해한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한 뒤 1991년과 1993년, 1996년 등 7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섰지만 그에 대해서도 “해태가 여러번 우승했지만, 난 그저 일원이었을 뿐”이라고 목소리를 낮췄다. 팀 고참으로는 억지로라도 목소리를 키워야할 때가 있었다. 사실 이순철은 그 때문에 해태가 아닌 삼성에서 은퇴를 해야했다.

 

▲ 1996년 우승을 차지한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 / 사진 출처=KBO

 

어쩌면 전화위복이 뒨 ‘하와이의 밤’

 

일명 ‘하와이 항명 사건’으로 선수생활 종반기가 바뀐다. 1995시즌을 마치고 선동열이 일본프로야구 주니치로 떠나고 김성한이 은퇴했다. ‘해태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줄기차게 나오는 가운데 스프링캠프지에서 당시 코치진이 훈련 강도를 높인 가운데 ‘군기 잡기식’으로 지나치게 선수들의 일상까지 간섭하면서 코치-선수간 갈등이 증폭됐다. 심지어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선수 방으로 감시의 전화가 걸려오자 고참이던 이순철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프런트 중재자 등의 출현으로 ‘훈련 거부’로 확대되는 일까지는 번지지 않았지만, 이순철은 이 일로 일부 코칭스태프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지금은 이 얘기조차 ‘추억담’이다.

 

“해태가 꼴찌후보다, 그런 얘기까지 돌 때였어요. 코치들이 기강을 잡겠다는 뜻으로 저녁에 숙소 이탈 여부를 보려고 점검하고 했는데, 아무래도 선수들이 인격적인 차원에 받아들이기 힘든 게 있었어요. 내가 최고참으로 건의를 하는 과정에서 일이 커졌고요. 그래도 그 해 다시 우승했어요.”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이순철은 해태 선수로 입지가 좁아졌다. 기량 저하와 함께 출전 기회가 줄어드는 가운데 1997시즌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아픔도 맛본다. 곧바로 해태에서 방출되며 삼성 유니폼을 입는다.

 

이순철은 삼성에서 한 시즌 72경기만을 뛰면서 타율 0.213(160타수 34안타)만을 기록하며 선수생활 마지막을 보냈다. 그러나 이후 삼성에서 2년간 코치생활을 하며 새로운 환경에 눈을 뜬다.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한을 풀지 못한 상태였지만, 1985년 LA 다저스와 교류를 시작한 뒤로 선진 야구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었다.

 

“삼성에서는 새로운 야구를 접했어요. 삼성이 확보하고 있는 야구 책자부터 저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한 구단이에요. 해태에 있을 때는 제 스스로 몸으로 야구를 한 것이었는데, 이런 시스템도 있구나, 이렇게도 야구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론이 뒷받침되면서 지도자로 가는 초석을 다지게 된 시간이었어요.”

 

'거성’이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이순철은 2001년에는 LG로 이적해 코치생활을 이어간다. 선수 시절부터 타고난 감각을 기반으로 학습이 동반되면서 코치로도 빠르게 인정받았다. LG가 격동의 시기로 돌입한 2004년 전격적으로 감독이 된 것도 지도력을 평가받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때 나이 만 43세였다. 더구나 당시 LG는 안팎으로 휘둘림이 많은 팀이기도 했다.

 

“그 때는 몰랐어요. 그 때는 제가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준비가 안돼 있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빨랐어요. 나이가 더 들면 보이는 게 있는데 그 때는 보지 못했던 거죠.”

 

이순철은 계약기간 3년째 시즌에 중도하차 했다. 외국인투수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등 ‘운’마저 따르지 않았다. 그 때의 경험은 선배 야구인 이순철에게는 큰 자산이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적잖이 있었다.

 

“지금 후배들이 감독직을 받아들일 때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아무리 본인이 준비를 많이 했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팀 전력이 약하면 절대 좋은 감독이 될 수 없어요. 덥석 수락했다가 오래 못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을 여러번 봤어요. 그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 지도자 시절의 이순철 / 사진 출처=KBO

 

해설위원 이순철을 찾아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이 많다.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해설을 잘 할 수 있냐”고. 해설위원으로 그만큼 확고한 위치에 오른 이순철 위원의 답은 한결 같다.

 

“딴 거 없어요. ‘야구 많이 봐야 한다’고 얘기해줘요. 이론 공부를 하곤 하지만 이론만 갖고는 안되죠. 해설해야하는 대상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하니 야구를 잘 보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이순철 위원의 해설은 늘 자신감이 넘친다. 빙빙 돌려가는 여느 해설과 달리 직설적일 때도 많다. 그래서 시원하다. 이는 선수생활부터 지도자 생활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여정이 확신으로 자라난 결과로도 보인다. 여기에 야구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사랑이 시너지를 내 ‘이순철만의 해설’을 만들고 있다. 이미 하나의 브랜드처럼 자라나 있다.

 

안승호 기자 / 경향신문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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