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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 롯데의 혼, '탱크' 박정태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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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박정태 일러스트 / 출처=KBO

 

8남매 중 막내 아들

 

1969년, 부산 서구에서 작은 건설사를 운영하던 박 사장의 8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는 앞뒤로 넓은 마당이 있었다. 인심 좋은 박 씨네 집은 이웃들의 사랑방이요 놀이터였다.


“명절이면 동네 사람들이 한복 입고 와서 우리집 뒤뜰에서 널뛰기를 했어요. 어머니가 김장철이면 엄청 많이 해서 동네에 나눠주셨어요. 우리 집에는 TV도 있어서,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인기 프로그램 할 시간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봤죠.”

 

1. 지독한 가난, 그리고 어머니

 

초등학교 입학 무렵,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빚쟁이들에 쫓긴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돼 결국 세상을 떠났다.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단칸방으로 옮겼다. 10가구가 공용 화장실 하나를 쓰던 산중턱 판자촌이었다.

 

“하루는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셨어요. 의식이 없다가 깨어보니 어머니가 울고 계시더라고요. 내가 깨는 거 보고서야 혼절을 하셨죠. 어머니도 같이 가스를 마신 거예요. 이웃이 응급차를 불러줘서 간신히 둘 다 살았어요.”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온갖 허드렛일을 한 뒤 밤늦게 귀가하는 고단한 삶 속에도, 어머니는 막둥이에게 온전한 삶을 만들어주려 애썼다. 몇 달 치 수입을 털어 포수 장비를 구해오셨다. 사고뭉치에 말썽꾸러기였던 아들과 친구들에겐 몰두할 새 놀이거리가 생겼다.

 

“동네야구를 ‘돈내기’로 했어요. 우리는 동전 한 푼이 아쉬웠으니까 죽기 살기로 했죠. 다 이겼어요. 그게 소문이 나서 대연초등학교 야구부랑 시합을 하게 됐어요. 거긴 정식 야구선수들이었지만, ‘깡다구’는 우리가 나았어요. 막판까지 이기고 있었지. 그런데 마지막 회가 되니까 수업 들어가야 한다고 도망가려고 하더라고. 말싸움으로 시작해서 결국 주먹다짐을 했죠. 저는 3학년이었는데, 그쪽 6학년들한테 안지고 바락바락 달라붙었어요.”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 고학년들과 일전을 벌인 소년은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낯선 어른이 집에 찾아왔다.

 

“대연초 최병주 감독님이었어요. 야구 실력이랑 근성을 보니 제가 성공할 것 같았대요. 전날에 저 집에 가는 길을 따라 오셨다가 다시 오신 거예요. 어머니한테 야구 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어요. 어머니는 ‘우리는 형편이 어려워서 야구부 회비도 못 내고, 좋은 음식도 못 먹입니더’ 라고 거절하셨는데, 감독님이 ‘제가 무조건 책임 질 테니 걱정하지 마이소’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셨어요.”

 

그렇게 시작한 야구 선수의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고생하는 어머니 생각에 매일 새벽까지 방망이를 돌렸다. 기량은 빨리 늘었지만 영양과 휴식이 부족해 빈혈에 시달렸고 키가 자라지 않았다. 중학교 친구들과 의리 때문에 명문고 대신 재창단한 신생팀에 진학했더니 팀 성적이 죽을 쑤는 바람에 좀처럼 전국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그 바람에 청소년 대표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때에야 처음 대표팀에 선발됐는데, 명단 발표 닷새 뒤에 합숙소 계단을 헛디뎌 오른쪽 발목이 골절됐다.

 

“프로에서 왼쪽 발목을 다친 건 유명한데, 사실 그 전에 오른쪽 발목이 먼저 부러졌어요. 너무 슬펐어요. 이제 실력이 좀 느는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운이 나쁜지. 왜 더 조심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화가 너무 많이 났어요.”

 

▲ 악바리 하면 박정태, 박정태 하면 악바리로 통한다. / 사진 출처=KBO

 

성공해야 할 이유가 명확했던 ‘악바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긴 재활을 거쳐, 4학년 때 마침내 아마추어 최고의 우타자가 됐다. 당시만 해도 야구선수들에게 해롭다고 알려져 있던 웨이트트레이닝을 앞장서 소화하며 작은 몸의 한계를 근육으로 넘어섰다. 김기태와 함께 아시안게임 대표팀 중심타선을 이뤘고, 마침내 고향팀 롯데 자이언츠의 1차 지명을 받았다. 계약금은 3천 8백만 원. 그 돈으로 사직구장 근처 작은 전셋집을 얻어 그때까지 단칸방에 살던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어머니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도 너무 좋았죠. 첫 효도였으니까.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신 분께 처음으로 보답을 했으니까. ‘박정태, 너 잘했어’라고 스스로 칭찬해 줬어요.”

 

거듭되는 시련을 불굴의 의지로 돌파하는 ‘탱크’의 질주가 시작됐다.

 

2. ‘새로운 롯데’의 얼굴, 우승의 환희

 

1984년, 최동원의 불굴의 역투로 첫 우승을 이룬 뒤, 롯데 자이언츠는 6년 동안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보복성 트레이드로 내쫓은 최동원의 빈자리가 너무 컸고, 육성에 실패하며 선수단이 늙어갔다. 분위기가 바뀐 건 1991년. 4년 만에 돌아온 1984년 우승 사령탑 강병철 감독이 강력하게 세대교체를 밀어 붙였다. 그 선언문이 시즌 개막전 타순이었다. 프로 데뷔전에 나서는 박정태가 1번 타자로 이름을 올렸다.

 

“너무 무서웠죠. 하늘같은 선배님들이 너무 많아서 저랑 (전)준호는 덕아웃에서 숨도 쉬기 어려웠어요. 저희 때문에 경기에 못 뛰게 된 선배들도 있었고… 야구를 악착 같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태는 실력으로 부담감을 이겨냈다. 데뷔 첫 타석 중전안타를 시작으로, 곧장 리그 최고 수준의 중장거리 타자이자 견고한 수비력을 갖춘 2루수로 자리 잡으며 팀의 7년 만에 가을 야구 진출을 도왔다. 데뷔 첫해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한일 슈퍼게임 국가대표에도 선발됐다.

 

▲ 데뷔 첫 해 2루수 골든 글러브를 차지한 박정태 / 사진 출처=KBO

 

특히 부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야구에 임하는 박정태의 자세였다. 야구에 미친 팬들보다 더 야구에 미친 것 같았다. 더 승리를 갈망하는 듯 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투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고, 타석에서 절대로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좀처럼 초구를 치지 않아 불리한 볼카운트에 자주 몰리면서도, 삼진도 당하지 않았다. 데뷔 첫해 박정태의 삼진 비율 6.8%는 ‘불멸의 타격왕’ 장효조(7.3%), ‘악바리’ 이정훈(7.6%)보다도 낮았다. 어쩌다 삼진이나 병살타가 나오면 팬들보다 더 화를 냈다. 분을 못 이겨 덕아웃 벽을 머리를 찧고, 주먹으로 쳤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혼도 많이 났다.

 

“(조)성옥이 형이랑 룸메이트였던 (김)민호 형한테 엄청나게 혼났어요.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스스로 다치냐고. 프로는 몸이 재산인데 스스로 아낄 줄 알아야 한다고. 눈물 쏙 빠지게 혼내고 나면, 경기 끝나고 밤에 부르세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진짜 멋진 선배들이었죠.”

 

박정태의 기량은 이듬해인 1992년 만개한다. 타율과 출루율, 장타율 모두 생애 최고치를 찍으며 팀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그 해 박정태가 친 2루타 43개는, 종전 기록 (1987년 김용철. 32개)을 11개나 뛰어넘은 신기록이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박정태는 3할 타자 5명이 포진한 롯데 타선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12경기에서 팀에서 가장 높은 타율(0.386), 출루율(0.500), 최다안타(17개)를 기록하며 롯데의 예상을 깬 우승을 만들었다. 한국시리즈 최종 5차전은 ‘박정태의 1992년’의 축소판 같다. 1회 우전안타 뒤 팀의 두 번째 득점, 3회 선두타자 안타 뒤 2루 도루에 이은 쐐기 득점을 올려 공격을 이끌었고, 9회말 투아웃에서 강한 땅볼을 잘 잡아 2루 베이스를 밟고 경기를 끝냈다. 1992년 10월 14일.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마지막 순간은 두 손을 치켜들고 펄쩍펄쩍 뛰는 박정태의 함박웃음과 함께 박제돼 있다.

 

“그때는 몰랐죠. 30년 뒤에도 롯데의 마지막 우승 순간으로 불릴지. 그때는 그게 시작일 줄 알았어요.”

 

3. 부상의 시련, 기적 같은 복귀

 

정상에 올랐지만 박정태는 만족을 몰랐다. 내려오지 않기 위해, 혹은 ‘내려가면 어쩌나’는 불안감 때문에 더 연습에 몰두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연습이 자연스러웠던 당시의 기준에도 박정태의 연습량은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코칭스태프가 걱정해 연습을 만류할 정도였다.

 

“1993년에 장효조 선배님이 은퇴하시고 1군 타격코치가 되셨어요. 어느 날 경기 뒤에 평소처럼 연습을 더 하려고 실내연습장에 갔는데 코치님이 앉아 계신 거예요.

 

-연습 하지 말고 집에 가라.

 

-조금만 스윙 하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감독님 명령이다. 가서 쉬어라.”

 

박정태는 인사를 하고 연습장을 나왔다. 밖에서 한 시간쯤 기다리다 다시 실내연습장으로 가 불을 켰다. 장효조 코치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당장 집에 가라.”

 

박정태는 명령대로 연습을 포기하고 쉬었을까?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은 집 옥상에서 스윙했죠.”

 

박정태는 당시의 ‘연습 중독’을 지금은 후회한다.

 

“병이었죠. 장기 레이스에선 절대적으로 불리한 루틴이에요. 체력이 버틸 수가 없거든. 하지만 마음이 불안하니까 하는 거예요. 강병철 감독님이 특히 안타까워하셨어요. 좀 내려놓으라고, 원정 가면 방에 불러서 차 한 잔 따라 주시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셨어요. 그게 참 안 되더라고요. 저는 너무 힘든 삶을 경험해 봤잖아요. 혹시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다치면 어떡하나. 걱정을 연습으로 푸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걱정은 현실이 됐다.

 

1993년 5월 23일. 태평양과 홈경기 7회, 1루 주자로 나가있던 박정태는 김민호의 2루 땅볼 때 2루로 슬라이딩하다 베이스에 발목이 걸렸다. 박정태의 비명 소리가 관중석까지 들렸다. 왼쪽 발목 복합 골절. 다음 날 스포츠신문들의 1면은 고통에 찬 박정태의 얼굴과, ‘선수 생명 위기’라는 굵은 글씨로 도배됐다.

 

“의사 선생님이 복귀가 불투명하다고 했어요. 수술을 다섯 번을 했고, 재활을 서두르다가 골수염이 걸려서 뼈가 썩어서 이식도 했어요. 나한테 왜 또 이런 일이 생길까. 너무 억울했어요.”

 

가장 사랑하는 선수를 잃게 생긴 부산 팬들도 억울했다. 사직구장에서 경기가 끝나면, 많은 팬들이 박정태가 입원한 대동병원으로 문병을 갔다. 병원 앞에 팬들이 길게 줄을 섰고, 박정태의 병실은 팬들이 가져 온 선물과 음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저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팬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그라운드로 돌아가야 했어요. 단 한 게임을 뛰더라도. 1995년 초가 고비였어요. 재활 막바지였는데, 통증이 너무 심하고 다리가 부어서 진도가 안 나갔어요. 그때 (정의윤의 아버지인) 정인교 코치가 강하게 조언하셨어요. 이게 마지막 단계니까, 이겨내 보라고. 통증을 참고 해 보라고. 이 악물고 해 봤는데, 그날은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며칠 뒤에 통증이 가라앉더라고요. 아, 정말 복귀할 수 있겠구나 확신이 들었죠.”

 

1995년 5월 16일. 화요일 경기였지만, 박정태의 기적 같은 복귀를 보러 온 팬들이 사직구장 입장권을 매진시켰다. 박정태는 2년 만의 복귀전을 3안타로 장식했다. 아내와 어머니, 수많은 팬들이 관중석에서 눈물을 흘렸다.

 

정규시즌 타율 0.337로 건재를 과시했지만, 박정태의 1995년은 ‘새드 엔딩’으로 끝났다. OB와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1할도 안 되는 슬럼프에 빠졌고, 최종 7차전 3회 결정적인 실책으로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평소 같으면 쉽게 잡을 타구였는데, 발이 따라가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체력이 떨어진 거였어요. 복귀 첫 시즌이기도 했고, 연습량도 너무 많았고.. 7차전 전날 밤에 심한 몸살이 온 것도 체력 문제였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자책했습니다. 프로라는 놈이, 컨디션 관리를 못해서 제일 중요한 경기를 망쳤으니까요.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4. 고민의 산물, ‘흔들 타법’

 

박정태는 부상 복귀 이후 타격폼으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몸과 배트를 앞뒤로 흔들었다가, 왼손을 배트에서 완전히 뗐다가 붙인 뒤 공을 쪼갤 듯 짧게 끊어 치는 전무후무한 스윙. 지금도 회자되는 ‘흔들 타법’이다.

 

“프로 데뷔 때는 정상적인 스윙이었어요. 스윙 전에 몸에 힘을 빼는 방법을 찾다가, 처음에는 배트를 살짝만 쥐는 걸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아예 왼손을 떼는 데까지 간 거죠. 몸을 앞뒤로 흔드는 건 스윙 전에 릴렉스를 시키는 동시에, 파워를 극대화시키는 동작이었어요. 3년 정도 조금씩 변해가다가 1997년쯤에 완성이 됐던 것 같아요.”

 

롯데 간판스타의 스윙은 특히 부산의 야구 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도자들이 기본에 어긋난다며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박정태 본인도 유소년 선수들을 만날 때마다 ‘내 폼 따라하면 큰 일 난다’고 경고했다. 정석과는 거리가 너무 먼 스윙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박정태 본인이 스윙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흔들 동작’이 아닌 ‘밀어치기’였다.

 

“왼쪽은 아예 안 보려고 했어요. 투수를 보고 치고, 컨디션이 좋으면 우익수 쪽을 노려요. 몸쪽 공도 밀어 쳤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공을 오래볼 수 있고 어깨가 열리지 않으니까. 연습 때도 투수 쪽 망만 맞추려고 했어요. 그게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었어요.”

 

타구 방향 데이터가 없던 시절이라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 박정태가 ‘밀어치기 달인’이었다는 건 모두 느끼고 있던 사실이다. 정확성을 극대화한 박정태의 타법은 대기록을 낳았다.

 

5. 31경기 연속 안타 신기록

 

1999년 5월 5일 한화 전에서 시작된 박정태의 연속 경기 안타 행진은 스무 경기가 넘어가면서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온 야구계가 박정태의 기록 도전을 응원했다.

 

“김명성 감독님이 매일 아침에 말씀하셨어요. 경기 결과 신경 쓰지 말고 안타 치라고. 쓰리볼에서 스윙 안 하고 하나 고르면 덕아웃의 후배들이 난리가 났어요. 안 치고 뭐하냐고. 볼넷으로 걸어 나가면 아쉬워하는 1루심도 있었어요.”

 

기록 행진의 최대 위기는 25경기 째였다. 6월 3일 한화 전에서 7회 4번째 타석까지 안타를 치지 못해 중단 위기에 몰린 상황.

 

“(김)민재가 선수들한테 그러더라고요. 어떻게든 살아나가서 정태 형님 한 타석 더 만들어주자고. 너무 고맙고 미안했죠.”

 

롯데 선수들은 8회에 8명의 타자가 살아나가 박정태에게 한 타석을 더 선물했다. 박정태는 9회 중전안타를 뽑아 후배들에게 보답했다.

 

6월 4일 27경기의 KBO리그 신기록을 세운 박정태는 6월 10일 두산 전 9회, 상대 3루수 홍원기의 기막힌 다이빙 캐치에 걸려 연속 안타 행진을 31경기에서 마감한다. 경기 직후 홍원기에게 감사를 표한 박정태의 인터뷰는 큰 화제가 됐다.

 

“원기가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뭐가 미안하냐. 잘 잡았다, 고맙다고 말해줬어요. 원기가 최선을 다해줘서 내 기록이 더 빛나는 거였으니까요. 팀에 민폐를 더 끼치지 않게 되어 안도감도 들었어요. 후배들은 너무 아쉬워했지만, 저는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어요. 이제 경기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주장 박정태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롯데는 개막 6연승의 기세를 끝까지 이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 가을, 박정태는 신화가 됐다.

 

▲ 잊을 수 없는 1999년 시즌, 미스터올스타로 등극한 박정태 / 사진 출처=KBO

 

“오늘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1999년, 7전 4선승제로 열린 플레이오프에서 롯데는 삼성에 1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렸다. 5차전도 9회초까지 5대 3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선두타자 김대익이 2루타를 치고나간 뒤, 박정태가 등장했다. 당대 최고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상대로 10구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냈다. 다음 타자 호세가 좌중월 끝내기 석점 홈런을 터뜨려 사직구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기세를 탄 롯데는 6차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한 점차 승리를 거뒀다. 10월 20일에 열린 최종 7차전. 이승엽과 김기태의 홈런으로 삼성이 리드를 잡았지만, 6회 롯데가 호세의 솔로 홈런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호세가 그라운드를 돌고 있을 때, 관중석에서 오물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페트병 하나가 호세 옆에 떨어지더니, 삶은 달걀이 호세의 급소에 맞았다. 호세가 흥분하자 관중도 더 흥분했다. 점점 더 많은 오물이 그라운드로 날아들었고, 호세는 방망이를 관중석으로 던졌다. 심판은 호세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롯데 주장 박정태는 격분했다.

 

“이건 홈팀이랑 관중 책임인데 왜 피해를 우리가 보냐는 거였어요. 경기 끝나고 징계를 줘도 되는데, 왜 거기서 퇴장을 주는지 야속했어요. 우리 팀 최용락 매니저는 음료수 병에 머리를 맞아서 찢어졌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왜 경기를 해야 하나. 그래서 나가자고 한 거죠.”

 

주장이 짐을 싸고 철수를 명령하자 선수들도 따랐다. 1루쪽 관중석 앞을 지나 버스가 주차된 1루 파울폴 옆 문으로 향했다. 양상문 투수코치 등 코칭스태프가 박정태에게 제발 경기를 하자고 애원했다. 분을 삭이지 못하던 박정태는 결국 진정하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당시 박정태의 정확한 표현은 사람마다 조금씩 기억이 다르다. 확실한 건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는 거다.

 

“나지막하게 이야기했어요. 선수들 답을 듣지는 않았고, 눈을 다 맞추려고 했어요. 눈빛 보니까 다들 간절하더라고요.”

 

롯데는 주장의 소원대로 거짓말 같은 역전승을 거둔다. 경기 속행 직후에 터진 마해영의 동점 솔로 홈런, 9회초에 터진 대타 임수혁의 동점 투런 홈런, 연장 10회말 실점 위기에서 나온 유격수 김민재의 그림 같은 호수비, 11회초 김민재의 짧은 좌전안타 때 2루 주자 임재철의 이해할 수 없는 홈대시와 삼성의 중계 플레이 실수, 주형광의 마지막 삼진...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과 함께, 이 경기는 롯데 구단 역사상 ‘2대 명승부’로 남아 있다. 당시 선수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박정태의 명령은, 이후 종종 관중석에 플래카드로 걸려 롯데 팬들의 가슴에도 불을 지른다.

 

“그날의 간절함을 지금도 생각합니다. 인생에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경기를 생각합니다. 지금도 제 삶의 바탕이 되는 경기입니다.”

 

*

 

1999년 모든 걸 불태운 듯, 박정태는 다음 해부터 내리막길을 걷다 2004년 시즌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코치로 꾸준하게 경력을 쌓아갔지만, 현역 시절 확실해 보였던 롯데 사령탑 기회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2019년에는 ‘버스기사 음주폭행’으로 큰 물의를 빚었다. 박정태는 남은 삶을, 반성과 속죄로 보낼 생각이다. 자신이 ‘레전드’로 선정됐다는 사실조차 부담스러워했다.

 

“저는 ‘레전드’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교만했던 저를 새로 태어날 수 있게 해준 기사님께는 용서를 받았고 사건 직후부터 호형호제하고 있습니다. 팬들께도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성훈 기자 / SBS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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