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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닭'에서 '팔색조'로, 변신의 귀재 조계현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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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조계현 일러스트 / 출처=KBO

 

변신의 귀재

 

언론과 야구 팬은 투수 조계현(58)을 ‘싸움닭’, ‘팔색조’로 기억한다. 빠른 볼을 앞세워 마운드에서 늘 당당하고 타자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지 않던 조계현의 기질에선 싸움닭의 이미지가 겹친다. 또 그의 변화무쌍한 변화구를 보노라면 다양한 색깔의 깃털을 간직한 참새과의 산새 팔색조가 떠오른다. 조계현은 “두 별명 모두 시대에 걸맞은 애칭”이라며 무척 좋아한다. 싸움닭에서 시작해 팔색조로 끝난 변신의 귀재답다.

 

초등학교 유급부터 시작된 엘리트 야구 인생

 

조계현은 1989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던 해와 2001년 두산 베어스에서 은퇴하던 해에 모두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낀 행운아다. 1980년대 중후반 1차 전성기에 이어 1990년대 다시 돌아온 해태의 2차 전성기를 이끈 핵심 투수였고, 특히 ‘국보급 투수’ 선동열(59)의 일본 진출 전후 해태의 격변기인 1993~1996년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조계현이 KBO 리그에서 뛴 13년간 남긴 통산 성적은 126승 92패, 17세이브, 평균자책점 3.17. 1994년에는 등판한 27경기 중 절반이 넘는 14경기를 완투하는 등 통산 64번이나 완투해 이 부문 역대 순위 공동 8위를 달린다. 완봉승도 19번이나 거둬 이 부문 단독 4위인 조계현은 ‘견고한 두뇌파 투수의 전형’으로 KBO리그 40년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군산 남초등학교-군산남중-군산상고-연세대 출신인 조계현은 엘리트 야구 인생을 살았다. 그는 “직구와 커브만 던졌던 초등학생 때 가장 야구를 잘했다”며 “볼이 아주 빨랐다”고 회고했다. 탄탄대로의 시작은 군산남초 6학년 때인 1976년 대한야구협회장기 전국초등학교야구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투수 겸 주장 조계현의 추억담이다.

 

“노찬엽(현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 코치)이 있던 한양초등학교랑 첫 판에서 붙었어요. 마운드에 서 있는데 저쪽 애들은 쇠(알루미늄) 방망이를 들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나무 방망이로 쳐야 하는 것 아니냐, 이거 반칙아니냐고 심판한테 따졌어요.”

 

조계현의 팀은 학교에서 일하는 아저씨가 대패로 깎아준 한 자루와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두 자루 등 나무 배트 세 자루를 들고 서울 대회에 참가했다. 모든 면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지금보다 훨씬 더 했던 시절이다. 돈이 없어 구하지 못한 ‘쇠방망이’에 뭇매를 맞아 중반까지 끌려가자 조계현이 더그아웃 앞에서 ‘집합’을 걸었다.

 

“전교생이 나와 역전에서 성대하게 환송회도 해줬는데 한 경기는 이겨야 할 것 아니냐고 독려했죠. 다시 파이팅 외치고 나서 그 경기를 6-4로 뒤집어버렸어요. 이후 경기에서는 내가 한 점도 안 줘 우리가 처음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죠.”

 

학교는 영웅을 중학교에 순순히 보낼 생각이 없었다. 조계현은 졸업식 당일에야 ‘강제 유급’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교장 선생님과 아버지가 짜고 벌인 일로, 조계현은 다쳐서, 환경이 불우해서가 아니라 야구를 잘해서 6학년을 한 번 더 다녔다. 그 시절엔 그런 일도 가능했다. 유급한 바람에 조계현에게 야구를 권했던 친구 백인수(개명 전 백인호) 전 KIA 타이거즈 코치가 졸지에 선배가 되면서 ‘족보’는 이상하게 꼬였다.

 

혹사로 절단난 팔꿈치…잃어버린 6년

 

고교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1981년, 조계현은 군산상고 입학과 동시에 에이스로 그해 대통령배 고교대회, 이듬해 청룡기,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며 특급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연고 구단인 해태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로 오라고 러브콜을 보냈지만, 조계현은 중학교 2학년 때 ‘연고전’을 보고 파란색의 매력에 푹 빠져 동경의 대상 연세대로 진학했다.

 

조계현은 “고 2때를 돌아보면 내가 생각해도 참 잘 던진 투수였다”며 “시속 150km짜리 빠른 볼도 던지고, 내 마음대로 코너워크도 해가면서 던졌으니 굉장히 좋은 투수였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1982년 봉황기 우승 후 일본에서 열린 한일 고교대회에 출전한 조계현은 투수 생명의 큰 위기를 맞았다. 이미 혹사로 지친 팔꿈치가 한일 고교대회 세 경기 등판 후 적신호를 알려왔다.

 

팔꿈치 내측 측부인대(MCL·Medial Collateral Ligament)가 끊어졌다.

 

“MCL이 끊어지면 변화구를 던지려고 팔꿈치를 좌우로 틀 때 손목을 지지해주는 역할을 못해 공이 헛돌아요. 슬라이더나 커브를 던질 수도 없고, 오로지 직구 밖에 못 던지는 거죠. 그런 예전의 감각을 상실한 상태로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실업에 몸담은 1년을 합쳐 6년간을 보냈어요.”

 

스트레스가 심했던 조계현은 연세대 3학년 시절 타자로 변신했다. 투수로서 생명은 끝났으니 야구 선수로 먹고 살려면 방망이라도 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대회에서 홈런도 곧잘 칠 정도로 타격 실력이 괜찮았다. 수준급 투수가 별로 없던 당시 연세대에서 에이스로 통했던 조계현은 프로행을 대비해 자구책으로 양수겸장의 카드를 마련했다. 해태는 조계현을 1988년 1차 지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치러진 야구에 참가하느라 실업팀 농협에 몸담은 조계현은 농협지점장의 꿈을 접고 1989년 해태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발을 내디뎠다. 타자를 버리고 조건이 좀 더 나았던 투수로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생존을 장담할 순 없었다.

 

해태 입단과 함께 7년 만에 되찾은 ‘감각’

 

갑자기 깨닫는 ‘돈오’의 순간이 조계현에게 우연히 찾아왔다. 1989년 해태에 입단해 투수들과 펑고(코치가 쳐주는 타구를 받는 수비 연습)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펑고를 하는데 볼을 잡은 다음에 다들 천천히 툭툭 던지더라고요. 6년간 던지는 감각이 없던 상태라서 나도 천천히 던져볼까 했는데 연습 사흘째인가? 볼을 던지니 ‘딱’ 걸리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곤두서면서 코치한테 바로 가서 (불펜에서) 공을 던져보겠다고 했죠.”

 

직업 야구 투수로 뛰어보지 않은 사람은 ‘걸린다’는 느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공을 제대로 손목으로 채는 느낌, 또는 손목, 팔꿈치, 어깨 등을 활용해 최전성기에 던지던 온전한 느낌 정도로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고교 시절 대표팀에서 조계현과 배터리로 호흡을 이룬 적이 있던 포수 장채근(58)이 불펜에서 공을 받았다. 장채근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볼 같지는 않지만, 볼이 미트로 밀고 들어온다. 이제는 볼이 좀 걸리는 것 같다”고 조계현에게 희망 섞인 소감을 전했다.

 

▲ 1989년 조계현의 모습 / 사진 출처=KBO

 

7년 만에 볼다운 볼을 던진 조계현은 감각을 찾은 기쁨에 그날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89년 2월에야 팀에 합류한 조계현은 동계훈련을 제대로 못 치렀는데도 그해를 174이닝을 던져 7승 9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2.84의 준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프로 2년 차인 1990년에는 30경기 중 10경기를 완투하고 5번의 완봉승을 따내는 등 14승 13패, 평균자책점 3.28을 올려 타이거즈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

 

10종 변화구의 탄생…기교파 전성시대의 신호탄

 

데뷔 4년째인 1992년, 조계현은 어깨 건초염을 앓은 선동열을 대신해 마무리로 뛰었다. 10승 6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94로 뒷문도 잘 잠갔다. 다만, 남들보다 늦은 25세에 프로에 온 조계현은 이미 4년간 연평균 160이닝을 던져 앞날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시즌을 앞두고 겨울이면 해마다 찾는 전남 완도 근처 여서도에서 변신을 모색했다. “뭔가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되겠다고 여러 생각을 하다가 컨트롤과 타이밍 조절에는 자신 있으니 변화구를 늘려보자. 직구 구속을 줄여 체력을 안배해보자란 결론을 내렸죠.”

 

조계현은 동계 훈련에서 시속 145km를 던지던 직구의 구속을 140km로 줄였다. 대신 130km대 다양한 변화구를 연마해 제구를 다듬었다. 손가락의 타고난 감각 덕분에 스트라이크존 내외곽으로 공 한 두 개 빼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타자를 슬슬 구슬리다가 몸 쪽에 145km짜리 빠른 볼 하나 딱 박는 전술로 조계현은 오래 던지는 기교파 또는 두뇌파 투수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1993년 17승 6패, 평균자책점 2.15, 1994년 18승 5패, 평균자책점 2.61, 1995년 9승 6패, 평균자책점 1.71, 1996년 16승 7패, 평균자책점 2.07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1993~1994년 2년 연속 다승왕, 1995년 평균자책점 1위 타이틀이 따라왔다. 조계현은 1993년부터 4년간 완투 39번, 완봉승 12회를 이뤘으며 연평균 181이닝을 던졌다.

 

▲ 기교파 투수의 전성시대를 연 조계현 / 사진 출처=KBO

 

조계현은 직구를 합쳐 10개의 구종을 연습도 아닌 실전에서 던졌다. 그 중에서도 다음 선발 등판 이틀 전에 벽에 공을 던져 느낌이 좋은 구종과 상대 팀 공략 비법에 맞는 구종을 추렸다. “직구, 커브, 슬라이더, 싱커, 팜볼, 너클볼, 포크볼, 스플릿 핑거드 패스트볼(스플리터), 투심 패스트볼, 서클 체인지업을 던졌습니다. 포크볼과 스플리터는 던질 때 손가락 너비와 손목의 각도, 힘을 주는 지점에 따라 하나씩 변형 구종이 더 생겼어요. 타자들은 무슨 공인지 잘 몰랐을 겁니다. 땅볼 타구가 그렇게 나오는데 완투를 많이 해도 경기 끝날 때까지 체력이 남아있더라니까요.”

 

LG 상대 2년간 12연승…쌍둥이 잡은 팔색조

 

조계현은 LG 트윈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조계현은 1993년 4월 11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린 홈경기부터 1995년 4월 25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방문 경기까지 무승부 한 번을 포함해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구가했다. 이 기간 LG 투수 중 김태원이 4번, 정삼흠이 3번, 김기범과 이상훈이 각각 2번, 인현배가 1번 조계현과 선발로 붙어 졌다. 특히 1993년 7월 18일~8월 24일 김태원과의 세 차례 연속 선발 대결에서 조계현은 전승을 거뒀다. 두 번은 완봉승이었고, 한 번은 8이닝 무실점 승리였을 정도로 LG 타자들은 조계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계현의 연승 행진에 제동을 건 이는 ‘야생마’ 이상훈(52)이다. 조계현은 이상훈과 잠실구장에서 펼쳐진 1995년 8월 18일 방문 경기에서 8이닝 1실점(비자책점)으로 호투하고도 0-1로 팀이 진 바람에 패전 투수가 됐다.

 

이상훈은 완봉승을 올리고 조계현은 완투패를 당한 세기의 투수전은 요즘에는 보기 어렵다.

 

“고등학교 때부터 잠실구장에만 가면 내용이 좋았어요. 운동장이 넓어서 홈런 맞을 걱정도 없었고요. LG 타선이 아주 좋아서 나는 굉장히 어렵게 던졌는데 결과는 좋았어요. LG 타자들이 마치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고 해야할까. LG를 상대로 잘 던진 영문을 나도 잘 모르겠고, 12연승을 한 줄도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연투가 왜 그리 많았냐고요? 우리는 마운드에 올라가면 무조건 완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던졌는데 그런 생각을 버리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두산에서의 마지막 값진 우승을 기억하며

 

해태 시절 연봉 협상을 하다가 대만프로야구의 후한 대우에 대만 진출을 검토하기도 했던 조계현은 1996년 해태가 자신과 이강철을 묶어 LG 이상훈과 트레이드를 추진할 것이라는 신문 보도가 나오자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100승 투수가 데뷔 4년 차 이상훈 한 명과 팀을 맞바꾸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조계현은 털어놨다. 구단은 약속대로 1997년 시즌이 끝난 뒤 조계현을 삼성 라이온즈로 현금 트레이드했다. 그러나 삼성에서 조계현은 전성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좋은 시설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무리하게 하다가 몸이 망가졌다.

 

시속 140km 이상의 구속이 나오지 않으면 마운드에 올릴 수 없다는 삼성 구단의 내부 방침도 조계현의 의지를 꺾었다. 해태에서 다승왕을 할 때도 직구 구속이 140km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해명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삼성에서의 2년을 마무리하고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조계현은 2000년 두산으로 옮겨 선수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해태 시절 수석코치로 조계현을 잘 아는 김 감독은 하던 대로, 기교파로 타자를 상대하라고 배려했고, 조계현은 2000년 7승 3패를 올리며 부활했다. 2001년에는 3승 5패, 평균자책점 5.28로 부진했지만, 김 감독의 배려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가 선수로서 마지막 우승을 경험했다.

 

“(해태에서) 워낙 많이 우승했잖아요. 그런데 진짜 나는 두산에서 우승할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팀에 기술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삼성에서) 잘렸을 때 인생의 팀을 만나서 2년 동안 우승도 준우승도 했으니 엄청나게 감사한 팀이죠. 새로운 팀에서 후배들을 이끌면서 우승을 이뤘다는 생각도 들고, 우승하고 나서 마음 편하게 선수 생활을 접을 수 있었어요. ”

 

장현구 기자 / 연합뉴스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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