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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미안(未安)과 사과(謝過) 사이

溫故而之新

by econo0706 2007. 2. 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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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도청 한국사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같이 놀던 미국 사내아이가 한국 여자아이에게 발길질하여 울고 들어왔다. 어머니가 달려나가 발길질한 아이에게 어떤 이유에서건 나약한 여자에게 발길질한 것은 잘못이니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한데 이 아이는 게임의 규칙을 어겨 벌칙으로 차인 것뿐이니 사과할 수 없다고 끝내 우기며 사과 받고 싶으면 치안재판소에 고소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과를 잘 하지않는 문화권이 있고, 사과하는 것이 별스럽지 않은 문화권이 있다.

 
도청 추문으로 닉슨이 대통령직을 물러나게끔 압박받고 있을 때, 닉슨의 딸은 "나는 아빠를 믿어요. 그러니까 사과도 사임도 하지 마세요" 했다. 한데 다나카 일본 총리가 오직으로 사임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 그의 딸은 "나는 아빠를 믿어요. 그러니까 사과하고 사임하세요" 했다. 바로 사과를 둔 문화권의 인식 차이가 이렇게 정반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체로 계약(契約)으로 맺어진 이동성(離動性) 서양사회일수록 사과에 인색하고, 인정(人情)으로 맺어진 정착성(定着性) 동양사회일수록 사과에 너그럽다. 지금 전자인 미국과 후자인 중국이 미·중 항공기 충돌로 첨예하게 이 문화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서로 아는 사람끼리 어울려 살아온 동양문화권에서는 사과도 잘 하고 또 용서도 잘 해주기에 사과에 책임이 따르지 않지만, 서양문화권에서는 사과를 하면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잘못하게 된 이유, 그 잘못으로 야기된 손실의 보상, 그것을 되풀이 않는다는 보장 등 뒤치다꺼리가 따라야 한다. 그래서 사과를 좀체로 하지않고, 그걸 끌어내기도 어렵다.
 
외교상 쓰는 유감의 영어 표현에는 그 농도에 따라 4단계로 갈라 볼 수 있다. 가장 농도가 묽은 게 유감으로 예의주시한다는 정도의 'not indifferent'가 1단계요, 미안하다는 정도의 'express concern'이나 'sorry'가 2단계, 그리고 사과나 사죄할 것까지는 없는 유감으로 'regret'가 3단계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뜻이 내포된 'apology'가 4단계다.
 
지금 중국은 'apology'까지 요구하고 있으나 미국에서는 조종사 실종에 한해 'sorry'로 입장을 표명했고, 종전의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의 전례로 미루어 보아 그 이상 유감농도를 높일 것 같지않아, 외교문제뿐 아니라 문화갈등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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