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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철쇄(鐵鎖) 나무”

溫故而之新

by econo0706 2007. 2. 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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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도청 한국사덕수궁 돌담길은 바로 한국 근대사의 파노라마라 해도 대과는 없다.

 

우리나라에 사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 모습을 똑같이 옮겨놓는 이 괴술을 두고 유언비어가 파다했다. 그 중 가장 설득력있었던 것이 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인 납치하여 솥에 삶아 말려서 가루를 낸다.

 
그 가루가 사진약이 되어 사람 모습을 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이 덕수궁 돌담길에 아이들이 가지못하게끔 길을 막곤 했던 것 같다. 당시 각국 공사관이 우리 외부아문에 이 어린이 유괴설을 두고 잦은 항의를 하고 있음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 깊숙이 자리잡은 미국공사관 정문은 한때 해병대 정복을 입은 흑인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흑인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지라 팔도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더욱이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귀여워한 흑인병사는 낯선 캔디를 던져 유인하기에 이 덕수궁 돌담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이들이 서있는 공사관 정문 앞 100m 앞에 새끼줄을 쳐놓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기에 흑인병사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어르면 그 100m 앞 인산이 돌산 무너지듯 무너져 흩어지곤 했다고 당시 이 인근에 살았던 프랑스학교 교사 에밀 마아텔이 회고하고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반신불수로 만든 을사강제조약이 맺어지던 날 전후 일본군의 총부리 앞에 호곡의 대열이 땅을 치고 울었던 돌담길이기도 하다. 남산에 야포부대가 일제히 포문을 덕수궁으로 향하게 하고 일본 육군 제13사단 무장병력을 덕수궁 둘레에 깔고 이토와 하세가와가 조종한 을사오적이 깊숙이 박혀있는 덕수궁 중명전에서 나라를 팔아먹고 있을 때 일이었다. 이렇게 한많은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80년대 후반 학생들이 반미운동의 일환으로 미국 대사관을 비롯, 공관들을 기습하자 관저가 있는 이 돌담길 일부가 통행금지되었고, 관저인근의 나무들에 월담을 방지하고자 쇠가시 돋친 철쇄를 나무 밑둥에 씌웠었다. 그것이 근간에 문제되어 풀어주고 있다. 나무가 철쇄의 상처를 입고 자라는 덕수궁 돌담길은 한국 근대사의 뒤란을 이렇게 아로새기며 역사 속으로 돌아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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