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340. 흑산도(黑山島)에서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4. 10. 14:26

본문

정자 광복절인 8월15일 이른 새벽에 우리는 고속관광버스로 남양주시 마재의 다산유적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교사가 33명, 강의할 교수가 6명, 연구소 관계자자가 4명, 취재기자단을 합해 도합 53명의 이른바 ‘중고등교사 실학기행단’이 2박3일의 2천리가 넘는 대장정을 떠난 것입니다. 아침이지만 식을 줄 모르는 더위를 견디며, 차 한 대로는 감당하지 못해 12인승 소형차가 함께 출발했습니다.
 
다산의 유적지인 마재에서 수원의 화성을 거쳐 안산의 성호 이익선생의 유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유물관과 묘소를 살펴보고 예산의 추사 김정희선생의 고택과 묘소도 참배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일로 남행, 전북 부안의 반계 유형원선생의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희대의 명저인 『반계수록』26권의 산실인 ‘반계서당’을 둘러보고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차에 올라 시원하게 뚫린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목포를 향해 달렸습니다.
 
주마간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조선의 3대 실학자인 반계·성호·다산의 꿈과 희망이 서려있는 곳이자 그들의 불행한 일생이 서린 유적지와 유물을 살핀 셈이었습니다. 실학기행의 1차적 목표는 대체로 이룩한 셈이지만,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려 밤이 늦어서야 목포에 도착하여 이름이 난 신안비치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저 절해의 고도 흑산도에서 억울한 유배살이 16년째에 끝내 해배되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이 더 큰 여행의 목적이었기에 우리는 다음날 새벽 목포에서 대형 페리호를 타고 흑산도로 들어간 것입니다. 8월의 하늘은 더위가 식지 않아 불볕더위이자 찜통의 여름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힘은 무서운 것, 바닷바람은 역시 시원하고 깨끗해 배안에서의 여행은 즐겁고 경쾌했습니다. 그날따라 망망대해의 바다도 호수처럼 잔잔하여 정말로 즐거운 항해였습니다.
 
“6월 초엿샛날은 바로 어지신 둘째형님(정약전)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이다. 슬프도다! 어지신 분인데도 그렇게 궁하게 사셨단 말이냐. 원통한 그분의 죽음에 나무나 돌맹이도 눈물을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 하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지금부터는 학문연구에서 비록 얻어진 것이 있다하더라도 누구에게 의논을 하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가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보다 못한 것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98쪽) 두 아들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입니다. 손암이 1816년 6월 6일 세상을 떠났는데 이 편지는 그해 6월 17일자로 명기되어있으니 형님의 별세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보낸 편지로 여겨집니다.
 
목포에서 8시 출발, 시속 60km의 쾌속정으로 2시간이 걸리는 흑산도. 숙소에다 짐을 풀지 못하고 바로 찾아간 손암의 유배지, 사리(沙里)마을을 찾았습니다. “손암은 바다 가운데로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내며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의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여 서로 싸우기까지 하며 자기 집에만 있어달라고 원했다. 그러는 동안 우이도(牛耳島)에서 흑산도로 들어가 사셨는데 약용이 석방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차마 내 아우로 하여금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마땅히 우이도에 나가서 기다려야 되지’라고 말하고는 우이도로 돌아가려 했으나 흑산도 사람들이 놓아주지 않아 몰래 도망쳐 나오다 들켜서는 다시 붙잡혀 갔으며 다시 사정하여 겨우 우이도로 와서 3년이나 기다렸으나 약용이 해배되지 못하자 마침내 아우를 만나보지 못하는 한을 품은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돌아가신 뒤 2년이 지나서야 내가 겨우 율정(栗亭)의 길목을 경유하여 돌아올 수 있었으니(1818) 악한 놈들의 착하지 못함을 쌓아가던 것이 이와 같았었다.”(先仲氏墓誌銘)
 
우리 일행은 흑산도 사리마을의 ‘사촌서당(沙村書堂)이라고 복원된 초가집 마루에 앉아서 다산의 글들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악한 놈들의 착하지 못함을 쌓아가던 것이 이와 같았다(惡人之積不善如是矣).” 얼마나 형님의 죽음이 안타까웁고 애석했으며 그분이 당하던 고통에 마음이 저렸으면 그런 독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인지, 그 대목에서 우리 53명의 실학기행단 모두가 숙연한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불행, 그만한 고통도 이겨내고 천추에 명저로 남을 『현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한 손암 정약전이라는 위대한 실학자를 생각하면서 우리 일행은 손암의 한이 서린 흑산도에서 하룻밤을 묵고, 강진의 다산초당과 해남의 녹우당을 거쳐 17일 밤 늦어서야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강행군을 잘 마친 참가자들의 열성에 경의를 표하며, 아울러 경기문화재단의 도움으로 이번 기행이 이루어졌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빅석무 드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