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338. 다산과 서학(西學) 1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4. 10. 14:29

본문

정자 어떤 독창적인 학자라도 배우지 않고서 처음부터 독창적인 학설을 주장하는 일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아무리 뛰어난 천재적인 학자라도 선진(先進)학자나 동시대의 새로운 학설에 영향 받지 않고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거나 주장한 바가 없는 새로운 학설을 창안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같은 고경(古經)을 읽고도 독창적인 해석을 하는 수야 있지만, 전혀 근거도 없는데, 불쑥 새로운 논리나 학설을 펴는 경우는 절대로 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다산은 자신이 직접 기록한 내용으로 보거나 또 당시의 여러 사정으로 보아, 23세이던 1784년 4월 15일(음력) 이후에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등의 책을 보았던 것이 사실로 확인됩니다. 이때부터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통해 서양철학에 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천주교에도 깊이 빠져 신앙생활에도 열성을 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는 제사를 폐한 일이 일어나면서 당사자들이 참형을 당하고 천주교에 대한 나라에서의 금함이 강화되었습니다. 유교주의로 마음이 굳어져서 제사를 지내는 습성에서 제사를 폐해야 참다운 신자가 된다는 천주교 교리에 문제를 삼아 다산은 천주교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을 자신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미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기술에 관한 책이나 과학사상에 관한 책들이 국내에 많이 들어와 있었고 궁중의 도서실에도 많이 보관되어 있었기에 벼슬하던 시절에 다산은 서양의 책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산의 사상에는 서양의 사상이나 논리는 무조건 배타적으로 반대했던 전통의 유학자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논리가 포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서양의 책을 접하지 못했던 21세이던 1782년에 지은 「술지(述志)」라는 제목의 다산 시를 읽어 보면 그때 벌써 당시의 주되는 학문이던 성리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이면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기본유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대와 역사를 바르게 읽었던 다산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새로운 학문으로 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박석무 드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