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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by econo0706 2007. 4. 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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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7월 12일, 서울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경상도는 소강상태라는 보도를 보고 안동의 도산서원을 찾았습니다.
 
그 전날 출발한 ‘2006 대학생 실학순례단’과의 만남을 위해서였습니다. 경기문화재단의 재정지원으로 우리 다산연구소가 주최한 첫 번째 대학생 행사여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이 배우는 학생들이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비가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으나, 도산서원에서 강의를 하고 경내를 관람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어서 정말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마침 학생들을 포함 진행요원까지 100여 명에 이르는 대 순례단, 고려시대 공민왕이 피난 왔다가 지은 정자라는 영호루(暎湖樓)를 구경한 뒤 우리가 기다리던 식당에 세 대의 관광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안동 특유의 식당인 ‘헛제사밥’집에서 점심을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퇴계 후손인 이동석·이동수씨가 나와 주셨고 경북청년유도회장인 권석환씨도 나와 함께 자리할 수 있어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식사 후 우리는 도산서원을 찾았습니다. 퇴계학의 전문가인 안동대의 안병걸교수의 강의도 듣고, 필자도 학생들에게 다산학과 퇴계학의 차이에 대한 강의도 했습니다. 조선 5백년, 퇴계야말로 대표적 학자의 한 분임이야 이론이 없습니다. 다만 퇴계의 학문은 주자학의 큰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웠으나, 다산은 분명히 주자학을 넘어 새로운 수사학(洙泗學)의 길을 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산은 30대 중반, 귀양살이나 별반 다름없는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새롭게 『퇴계전서』를 읽으면서 정적(靜的)인 퇴계의 경(敬)사상에 대단한 흠모의 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동적(動的)이던 자신을 반성하는 뜻에서도 퇴계에의 접근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퇴계의 글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고나니 나도 모르게 기뻐서 뛰고 감탄하여 무릎을 치며 감격의 눈물을 펑펑 흘렸다”라고까지 말했으니 어느 정도인가는 짐작할 만합니다.
 
다산이 남긴 시에는, “도산(陶山)이여! 퇴계물(退水)이여! 어디에 있는지, 아스라이 높은 풍모 끝없이 흠모하네”라고 했으니 다산을 공부하려면 퇴계의 도산서원은 반드시 찾아야할 곳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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