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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무대포 정신? 上

엽기 朝鮮王朝實錄

by econo0706 2007. 9. 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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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포라는 말을 한번쯤 쓰거나 들어봤던 기억, 다들 있으실 것이다. 그리고 ‘막무가내’, ‘앞뒤 분간 없이’라는 뜻의 이 무대포라는 말이 실상은 일본말이란 것도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원래 무대포란 말은 없을 무(無)에 철포(鐵砲 : 일본말로는 ‘뎃뽀’ 우리나라에선 ‘조총’)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무대포란 말이 실질적으로 쓰이게 된 계기는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전국통일의 마침표가 되어준 나가시노 전투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독자제위들의 기억 속에는 ‘가케무샤’란 영화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천하통일을 위해 최고의 군사력을 조련했던 다케다 신겐은 조총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기마대 앞에서는 힘을 못쓸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조총 봐봐. 그게 쏘면 쏜다고 다 맞나? 안 그래? 그리고 말야…그게 설사 맞는다 치자고, 그게 사정거리가 얼마나 되겠어? 유효 살상거리가 길어봐야 100미터야. 확실히 맞힐려면 50미터는 되야 한단 말야. 그럼 뭐야? 한번 쏘고 나면? 그 다음은 걍 말에 밟혀 죽는게 다라니까!”
 
이리하여 다케다 신겐은 풍림화산(風林火山)이란 부대를 조직하게 되는데, 풍風과 화火는 기마대로 전선을 휩쓸고, 림林은 보병대로 기병대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남아있는 잔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산山은 다케다 신겐의 본대였던 것인데, 문제는 다케다 신겐이 천하통일의 꿈을 다 이루지도 못하고 죽으면서 일이 묘하게 꼬였던 것이다.
 
“야야…잘 들어, 괜히 나 죽고 나서 깝치지 말고…앞으로 3년간은 내가 죽었단 말…절대 꺼내지 마 알았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란 말야, 이시키들아!”
 
이러면서 다케다 신겐은 죽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나서, 신겐의 아들인 다케다 가쓰요리와 오다 노부나가가 맞붙게 된게 나가시노 전투였다. 풍림화산(風林火山)을 믿고 돌진하는 신겐의 기마대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대였으니,
 
“야야, 한발씩 쏘고 재장전 하다가는 택도 없어. 있는 대로 철포를 다 모아서 삼선사격을 하는 거야! 첫줄 놈 쏘고 나면 뒤로 빠져서 재장전 하고, 둘째 줄이 쏙, 둘째 줄 빠질 때 셋째 줄, 셋째 줄 쏘고 나면, 다시 첫 번 쏜 놈들이 다시 쏘고…이렇게 가면 아무리 기마대라도 박살날거야!”
 
오다 노부나가는 이런 생각으로 3천정의 조총을 끌어 모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승을 하게 된다. 이런 오다 노부나가도 혼노사의 변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던 것이다.
 
“일본이노 살길은 조선정벌 밖에 없으므니다! 조선놈이노 무대포(無鐵砲)이므니다! 나가시노에서 처럼 개박살을 내면 되므니다!”
 
이리하여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전하! 왜놈들이! 왜놈들이!”
 
“워~워~ 진정하라니까, 왜 그래? 왜놈들이 또 노략질이라도 했대?”
 
“그…그것이 왜놈들이 동래성과 부산성을 함락하고는…도성으로 쳐들어 오고 있답니다!”
 
“뭐…뭐야? 이런 젠장찌게 같으니라고…동래성부사는 뭐하고 앉아있었대? 이것들 또 근무 안서고 농땡이 친 거 아냐?”
 
“그…그것이 왜놈들이 조총을 쏘면서 덤벼드는 통에…항전은 했었지만, 신무기에 밀려서리….”
 
“이것들을 그냥… 어이 사돈! 사돈이 힘 좀 쓰지 그래?”
 
선조의 사돈, 바로 신립장군이었다. 이 당시 신립은 꽤 빵빵한 가문내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의 장인이 임진왜란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권율이었고, 그의 동서가 바로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였으니, 병권에 있어서는 끗발 날리는 일가였었던 것이다.
 
“그까이거 뭐 제가 이탕개의 난 때 오랑캐 놈들 밀어낸 것 처럼 확 쓸어버리겠슴다.”
 
“그래, 그래 역시 사돈 밖에 없다니까…. 사돈만 믿을게, 내가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자리 줄테니까, 가서 저 문어대가리 놈들 확 밀어버려 알았지?”
 
이리하여 보무도 당당히 군대를 이끌고 왜놈들이 설치고 있는 남쪽땅으로 내려가려 하였으나, 웬걸…군사가 모여야지, 먼저 출발한 이일은 데리고 갈 군사 300명이 없어서 쩔쩔매다가 가서 해결한다고 먼저 출발한 걸 보면, 이 당시의 제승방략(制勝方略 : 원래 조선초기 군사제도는 진관체제라 하여 각고을의 수령이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직접 방어에 나섰으나, 병력수가 줄어들자 유사시 각 고을의 수령은 병력을 모아 놓으면 서울에서 지휘관이 내려와 이 병력을 훈련시켜서 전투를 벌이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것이 제승방략제도였다) 제도가 얼마나 허망한 제도였는지를 보여주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립은 이리저리 군사를 모아 8천명의 기병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
 
“신립장군, 거시기 내려가면 왜놈들의 조총을 조심하시오. 그게 장난 아니라드만….”
 
“조총이 뭐 쏘면 쏘는 족족 맞는답니까?”
 
류성룡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은 신립…신립의 무대포 정신은 왜놈들을 막아설수 있을까? 초특급 대하 울트라 역사사극 ‘무대포 정신?’은 다음회로 이어지는데…커밍 쑨! 
 

자료출처 :스포츠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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