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02. 관우를 사랑했던 임금 下

엽기 朝鮮王朝實錄

by econo0706 2007. 9. 6. 15:55

본문

난데없는 관왕묘 제사의 정례화 앞에서 조정 대신들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쉬파, 제사를 지내도 왜 하필 관우냐고, 그 자식 소설로 뻥튀기 된 거야. 실제로는 별거도 아닌 놈인데….”
 
“이게 다 전하의 꼼수라니까….”
 
“꼼수?”
 
“그래, 네들도 관우가 유비한테 충성했듯이 나한테 충성해라,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그랬다. 동서붕당이 다시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 임금의 왕명(王命)보다 당명(黨命)에 더 충실했던 당시 분위기 앞에서 숙종은 관우를 데려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는 숙종 이후의 임금들에게도 유효한 ‘신하 관리책’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꼼수든 뭐든 간에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끄고 보자고, 자 어쩔 거야? 왕이 하자는대로 하는 거야?”
 
“그럼 뭐 방법 있어? 심심하면 환국(換局 : 조정을 싹 물갈이하는 것, 정권교체로 보면 될 것이다.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인과 남인세력을 통째로 바꾸며 자신의 왕권을 키워 갔다. 이때의 키워드가 바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이었다)이다 뭐다 해서 사람들 때려잡는 게 취미인 사람한테…. 괜히 꼬투리 잡히지 말고, 대충 하자는 대로 하자고.”
 
이리하여, 숙종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지방의 관왕묘에 정기적으로 향축을 하도록 명하게 된다. 이때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고을의 수령이 되었고, 향축일은 매년 경칩과 상강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 정도 해서 숙종의 관우사랑이 끝났으면, 이야기는 ‘숙종이란 임금이 한때 관우를 좋아했었다’ 정도로 끝이 나겠지만, 숙종의 관우 사랑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야야, 저번에 영의정이랑 좌의정 얘들이 세트로 ‘관왕묘의 참배는 수읍(手揖)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 거 같거든? 관우가 어떤 애였냐? 일단 네들이 조선왕조실록 뒤져서 관우한테 한 행례의절(行禮儀節)을 좀 찾아봐. 옛날 사람들이 틀린 일 한 거 봤어? 선조들이 했던 거 따라 하면 다 맞는 일일 테니까, 우리도 그거 찾아서 해보자고.”
 
숙종의 연이은 폭탄선언!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옛 기록을 찾아 그 예에 따라 관왕묘를 참배하겠다는 말…. 솔직히 옛 기록을 몰라서 그랬을까? 숙종도, 숙종의 신하들도 예전 임진왜란 시절 선조가 관왕묘에 사배례(四拜禮)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숙종은 관왕묘에 절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것이다.
 
“저기, 전하… 찾아보니까, 선조대왕께서… 관왕묘에 4번 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 절하셨는데 내가 절을 안 하면 이게 얼마나 불효겠냐? 오케이, 앞으로 나도 관왕묘에 가서 절을 할 테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지?”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제 대신들이 들고 일어날 차례였다.
 
“와, 아무리 우리 임금이지만, 진짜 개념을 가출시켜 버렸구만, 선조 때 절한 건 명나라 떼놈들이 옆구리 찔러서 억지로 절한 거 아냐? 그걸 들고 나와서는 뭐? 불효라고? 지랄을 랜덤으로 떨어요!”
 
민족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 좌의정 서종태는 총대를 메기로 작정을 한다.
 
“전하, 전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피차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슴다. 툭 까놓고, 선조대왕이 절하고 싶어서 절했습니까? 명나라 떼놈들이 옆구리 찔러서 억지로 절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세상을 살다보면 거기에 맞는 ‘급’이란 게 있잖습니까. 전하는 왕인데, 관우는 일개 장수에 불과하잖슴까? 급에 맞춰 살아야죠. 안 그래요?”
 
“야, 너 말하는 거 듣다보니까 살짝 기분 나빠지려 한다? 관우가 나중에 무안왕이 된 거 알지? 그리고 축문에도 감소고우무안왕(敢昭告于武安王)이라고 되어 있어, 선조야 뭐 어쩔 수 없이 했다지만, 나는 하고 싶거든? 그리고 네가 뭐? 급이 안 맞다고? 관우도 왕이고, 나도 왕인데 무슨 급이 안 맞냐?”
 
보면 알겠지만, 숙종… 관우 엄청 좋아했던 모양이다. 숙종의 이런 관우 사랑은 숙종 개인적인 취향도 취향이었지만, 당대의 정치상황이 붕당정치의 격변기였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 있는 관우를 끌어와 현재하는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모습… 그것이 숙종이 바랐던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숙종의 모습은 이후 조선의 왕들에게도 면면히 전해져 왔는데, 가장 압권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이었다. 나라가 망하기 바로 직전인 1901년 고종은 관우의 힘을 빌려 나라를 살려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서울에 북묘와 서묘를 짓고, 지방에는 전주, 하동에 관왕묘를 짓더니, 관왕의 호를 지어 바쳤다. 이래저래 관우는 한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던가 보다. 
 

자료출처 : 스포츠칸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