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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중] 나를 바꾼 '아버지의 조언, 어머니의 눈물'

--이현중 농구

by econo0706 2022. 9. 1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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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3. 10

 

엄마의 눈물

NBA 글로벌 아카데미 합류가 결정된 뒤부터는 설렘의 연속이었어요. 실력을 키울 좋은 기회잖아요. 건방지다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삼일상고에서 뛰는 동안에는 경기에 나가서 열심히 하지 않아도 이긴 적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자만에 빠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죠.

호주행은 그런 저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기회였습니다.

처음 호주에 간다는 소식이 나왔을 때 주변의 말들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 NBA Academy 시절 / 사진 = 이현중 선수 제공 

 

“무조건 나가서 도전해라.”

“너 절대 못 한다. 해외 생활이 만만한 줄 아냐.”

그렇게 긍정과 부정의 목소리가 교차했죠.

농구대잔치 일정까지 마치고 2018년 1월에 모든 것을 정리했어요.

 

호주에서의 첫 일주일은 엄마, 누나와 함께 지냈는데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어요.

숙소에서 첫 날 밤을 자는데 옆방에서 선수들이 낯선 언어로 떠드는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오더군요. 다 친한 사이가 되긴 했지만 그때는 낯설고 어색하고 무서웠죠.

아, 이제 엄마 없이 여기서 지내야 하는 건가? 어린 마음에 울컥해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도 저는 NBA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었어요.

결국 엄마가 돌아가는 날에 저는 폭탄발언을 하고 말았어요.

“엄마, 나 못하겠어.”

자퇴까지 하고 온 마당에 엄마 입장에서도 날벼락 같은 말이었겠죠.

 

마는 나와 함께 울어주셨어요. 그때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내 꿈을 믿고 내 마음대로 하게 해주셨는데, 더 이상 실망시키면 안 되겠다고요.

 

그때부터는 꾹 참았어요. 덕분에 지금까지도 가져온 습관인데요. 경기력이 안 좋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부모님께 티를 잘 안 냈어요. 걱정하실까봐요.

 

 
 

▲ NBA Academy 시절 동료들과 / 사진 = 이현중 선수 제공

 

WHAT’S UP?

 

호주에서의 첫 3개월은 좌충우돌이었어요.

한국에서 배운 영어랑 현지 영어가 많이 다르더라고요.

제가 아는 인사는 ‘Hi’, ‘Hello’, ‘Good morning’ 이런 건데, 그 친구들은 절 보고 ‘What’s Up?‘ 그러는 거예요.

‘멘붕’이 왔죠.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래서 처음에는 무시하고 지나갔어요. 아마 애들도 저를 이상하게 봤을 거 같아요.

경기장에서 코치님 지시도 못 알아들었어요. 평상시 같으면 알아들었을 텐데 초반에는 너무 긴장해서 속으로 ‘뭐지? 뭐지?’ 하면서 당황한 모습을 보였던 거 같아요.

지옥이 따로 없었죠. 솔직히, 지금도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못한다고 할 거 같아요. 그래도 사람이 지내다 보니 적응은 하게 되더라고요. 국제 학생들이 힘이 많이 됐어요. 특히, 아르헨티나 친구들이 제게 도움을 많이 줬죠. 다가와서 말을 걸어주고 챙겨주고…. 저도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원래 저는 방안에만 있는 성격이었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먼저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어요. 호주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멋있는 단어가 들리면, 휴대폰에 옮겨 적기도 했답니다. 또 쉴 때도 영어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기도 했어요.

그렇게 3개월이 지나니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농구를 잘 하게 됐다기보다는, 편하게 지내게 됐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호주에서 끝까지 적응하지 못한 게 있어요. 바로 식사였죠! 호주 다이닝 룸은 정말 맛이 별로였답니다. 호주 친구들조차 맛이 없다고 할 정도였죠.

엄마 음식 생각이 많이 났지만, 다른 옵션이 없었어요.다행히 라면 포트를 하나 가져가서, 라면 끓여먹고 3분 카레와 햇반을 즐겨먹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소극적이다 보니, 그런 모습을 보이면 부끄럽기도 해서 얼른 거실에서 데운 뒤 방에 가져와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먹곤 했어요. 그게 소소한 재미였어요.

 

▲ 이현중 선수의 트레이드마크이자 가장 큰 무기인 '슈팅' / 사진 = 이현중 선수 제공

 

나의 무기는 슈팅!

아빠가 호주 출발 전에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네가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지만, 외국에서는 안 될 거야. 그러니까 너만의 무기가 있어야 돼.”

그 말씀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저는 슛이 제 무기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기이니까 안고 가자고 결심했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저보다 크고 윙스팬도 좋은 애들이 점프도 잘 뛰고 슛도 잘 넣더라고요. 그런 친구들이 드라이브인 해서 덩크슛까지 꽂는 걸 보니까 위축이 되더라고요.

가뜩이나 영어도 못 알아 듣겠는데, 같은 포지션에서도 저보다 훌륭한 선수들이 많으니 코치들이 절 안 뛰게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슛 연습에 더 매진했어요.

사실 제 지금 폼은 한국에 있을 때 기틀을 잡았습니다. 동계 훈련 때였는데요. 동계훈련 하루 만에 코치님께서 화가 나셨는지 ‘뺑뺑이’를 시키셨어요. 그렇게 뺑뺑이를 돌고 밤 9시 40분경이었나,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슛을 던져봤어요. 그때 무의식적으로 머리 부위에서 던졌는데 그게 잘 날아가더라고요. 그 자체만으로도 제게 큰 만족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아빠에게 리바운드를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계속 던졌어요. 새벽 1시까지인가 그렇게 던졌는데 너무 감이 좋았죠.

그 자세에 자신을 갖게 된 계기가 있어요. 중앙대학교와의 연습경기였죠.

아빠께서 그 자세로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원래 저는 대학생 형들과 경기할 때마다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어요. 몸싸움도 밀리고, 가슴에서 슛을 올리다 보니 찬스도 잘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바뀐 자세로 5개를 던졌는데 5개가 모두 들어갔어요.

호주에서도 같은 자세로 시도했습니다. 초반에는 큰 선수들 상대로 수비를 의식하다 보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빨리 던지는 연습을 많이 했죠. 슈팅건이 있어서 미친 듯이 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슛이 전부는 아니었어요.

경기를 더 뛰고, 공을 더 많이 받으려면 저를 보여줘야 했어요.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저는 메인 볼 핸들러였어요. 그런데 호주에서는 초반에 슛도 많이 던져야 5개 남짓이고 4점, 8점 밖에 못 넣었어요.

수비도 문제였어요. 다들 저를 집중 공략하는 분위기였죠. ‘저 녀석 상대로 공격하면 한 골이야’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너, 나 할 거 없이 저를 상대로 치고, 받는데 처음에는 무서웠답니다. 혼자 방에 돌아와 ‘내가 이렇게 약했나’ 생각하며 또 한 번 낙담했죠.

그때부터 방에서 푸시업도 하고, 고정관념을 깨고자 노력을 많이 했어요.

지금이야 승부를 즐기고 있지만, 호주 시절에는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말 그대로 ‘자존심’으로 농구했죠.

한국을 대표해서 여기 왔는데, 얘들한테 지면 우리나라 농구를 뭘로 보겠어요. 사실, 누구도 제게 그런 의무를 부여하진 않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독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두 가지에 신경을 썼습니다.

하나는 앞서 말했던 슈팅이었습니다.

 

“슛으로 아예 1등을 먹자. 그래서 나에게 패스를 줄 수밖에 없게 만들자!”

▲ NBA Academy 시절 / 사진 = 이현중 선수 제공

 

실제로 슈팅 드릴을 할 때면 진심으로 모든 힘을 쏟았어요. 제가 84%였고, 2위가 73%였으니 압도적이었죠.

 

(이 무렵부터 클레이 탐슨 스타일을 많이 공부하려고 했어요. 원래 저는 케빈 듀란트를 좋아했는데, 선수들을 지켜보니 ‘아~ KD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탐슨의 플레이 스타일을 쫓아야 살아남겠다 싶었습니다.)

 

두 번째로 몸을 만들었어요. 이 부분에서는 강성우 박사님 도움이 컸어요.

 

강성우 박사님은 김효범 코치님께서 소개시켜준 분이세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저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몰랐어요. 호주로 가기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안 했죠. 그런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키가 안 큰다는….

 

강 박사님이 그 고정관념을 깨주셨어요.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한 관념을 바꿔주셨죠.

 

무게를 많이 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근육을 알맞게 쓰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한 달간 박사님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자세를 만들었는데 그게 잘 됐어요.

 

호주에 간 뒤에도 박사님께 “있는 대로 제가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 보내주세요”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렇게 몸을 만들었죠.

 

경기 중에는 궂은일이나 리바운드, 수비도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친구들이니까 인정을 받으려면 팀플레이도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해 열중했던 것 같습니다.

 

호주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이런 생각도 했어요.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1년 동안 좋은 경험하고 고려대나 연세대에 갔다가 프로에 가자.’

 

그런데 지내다 보니 저보다 일찍 온 친구들이 NCAA 대학 오퍼를 받고 준비하는 걸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다들 저처럼 외국에서 온 친구들인데 준비 잘 해서 미국에 가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그때부터는 정말 더 미친 듯이 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첫 6개월 동안 저도 2~3개 대학으로부터 연락이 오긴 왔어요. 처음에는 날아갈 듯 기뻤죠. 미국에서 관심을 가져준다는데 얼마나 영광이에요. 농구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때만 해도 ‘관심’ 수준이었어요. 냉정하다고 할까. 안부만 묻고 애매하게 끝났죠.

제게 관심은 있지만, 장학금은 못 준다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마음 비우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농구 도전기의 터닝 포인트, G리그 쇼 케이스

 

제 미국 농구 도전기의 터닝 포인트는 그해(2018년) 12월 같아요.

 

12월 20일부터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G리그 쇼 케이스에 참가했습니다.

 

G리그 쇼 케이스에는 저희 호주 글로벌 아카데미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국 아카데미 팀이 참가했어요. 중국과 할 때는 3점슛 6개를 넣는 등 20점을 가까이 올렸습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와 붙었는데, 상대가 저를 박스 앤드 원으로 막더라고요. 그래서 컷인, 중거리슛으로 대응했죠. 비록 팀은 졌지만 그때 오프 더 볼 무브가 스카우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아요. 그 대회 직후 조지타운, 데이비슨, UC 얼바인, UVA 등 엄청나게 많은 학교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박유진 선생님도 옆에서 살짝 이야기해주셨어요.

 

▲ 롤모델 스테판 커리의 라커 앞에서 / 사진 = 이현중 선수 제공

 

쇼 케이스가 끝난 직후 저는 한국에 왔어요.

 

방학이었거든요. 비행기에서 11시간 동안 혼자 두근거렸어요.

 

빨리 비행기에서 내려서 코치들과 연락해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죠.

당장이라도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최종적으로는 데이비슨 대학과 워싱턴 스테이트 대학에서 관심을 보였어요. 제가 통역을 해서 부모님과 통화를 했어요. 데이비슨 대학의 경우 밥 맥킬롭 감독님과 부모님, 그리고 저까지 넷이서 전화통화를 했죠.

 

NBA 글로벌 아카데미에서 친하게 지냈던 알리 칼리파는 샬럿 대학에 진학했는데, 그 학교에서도 계속 전화가 왔어요. 세인트 메리스 대학도 연락이 왔고요.

 

그러는 사이에 저는 한국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미국 대학에 도전하기로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남은 건 부모님의 동의를 얻고, 학교를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현중 / 미 데이빗슨대 농구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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