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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0.412' 백인천의 위대한 유산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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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백인천 일러스트(출처=KBO)

 

프로야구 원년, 불꽃 같은 전설

 

KBO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 ‘유일’하면서도 ‘무이’한 4할타자. 1982년의 백인천은 한국야구가 낳은 신화적 존재다. 0.412라는 불멸의 타율을 작성하며 프로야구 원년에 불꽃 같은 전설을 만들었다.


수평선 너머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의 고지. 수많은 ‘타격의 신’들이 도전해 왔고 도전하고 있지만, 현대야구에서 4할 타율은 이제 불가능의 영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백인천은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최후의 4할 타자로 남아 있다.

 

MBC 초대 감독 겸 선수

 

“만약 한국에서 감독을 한다면 맨 나중에 남는 구단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결국 감독 자리가 마지막으로 비어 있던 MBC의 요청을 받아들였죠.”

 

KBO 역사에서 유일한 감독 겸 선수의 역사를 쓴 백인천의 얘기다.

 

1981년 말,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인천(긴테쓰 버펄로스)은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국할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야구계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부 팀들은 감독 영입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백인천이라면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상위 레벨의 선수.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국야구로선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없었다.

 

1975년에는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일본프로야구 1군 무대에서만 19년간 활약했다. 통산 1969경기,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 타율 0.278의 성적을 올렸다. 2000경기까지 31경기, 일본프로야구 명구회 조건인 2000안타까지 161개를 남겨두고 있던 거물이었다.

 

실제로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던 롯데 자이언츠는 백인천이 일본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스(1977~1980년)에서 선수로 뛴 인연을 앞세워 먼저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두상이었다.

 

롯데는 최종적으로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 지휘봉을 잡고 있던 박영길 감독을 프로 감독으로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5개 구단의 감독이 모두 정해졌다. 삼성 라이온즈는 서영무 감독, 해태 타이거즈는 김동엽 감독, OB 베어스는 김영덕 감독, 삼미 슈퍼스타즈는 박현식 감독을 초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 때까지 MBC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감독을 정하지 못했다. ‘감독 자리가 맨 마지막까지 비어 있는 팀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백인천의 조건에 부합되는 팀. MBC의 제의에 백인천도 일본 생활을 접기로 최종 결심을 하게 된다. 서울팀이라는 환경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걸림돌이 발생했다. MBC 구단과 견해 차였다. MBC는 처음엔 “나이도 있으니 감독만 해달라”고 했다. 호적상 1943년생, 실제로는 1942년생. 백인천은 1982년이면 불혹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그렇지만 백인천은 “선수로도 뛰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체득한 노하우를 한국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펼쳐보겠다는 의지였다.

 

결국 ‘계약기간 3년에 1년은 감독과 선수를 겸하고, 2년은 감독을 맡는다’는 절충점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KBO 역사상 유일한 감독 겸 선수가 탄생했다.

 

▲ 감독 겸 선수의 탄생, 4할 타율까지도 예상했을까? / 사진출처=KBO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어떻게 귀국을 결심했을까.

 

“일본에서 뛸 때 일본인들한테 ‘너희는 프로야구도 없잖아’라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한국을 너무 깔보는 거예요. 일본서 기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봤어요.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하니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백인천은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지금도 그 결정엔 후회가 없다”고 했다.

 

4할의 전설이 시작된 지점

 

1982년 3월 27일. KBO리그 원년 공식 개막전이 열린 날이다. 서울운동장야구장(동대문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MBC 청룡이 역사적인 개막전에 나선 가운데 MBC는 연장 10회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드라마 같은 11-7 역전승을 거뒀다. 원년 개막전의 주인공은 이종도였지만 백인천은 이날 타자로서, 감독으로서, ‘1인 2역’을 하며 역전 드라마를 지휘했다.

 

KBO 최초 게임이 된 개막전에서 백인천은 4번타자 자리를 포수 유승안에게 내주고 5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장했다.

 

첫 타석은 범타였다. 2회말 1사 후 첫 타석에 들어선 백인천은 삼성 선발투수 황규봉을 상대하면서 2루수 땅볼로 물러났다.

 

KBO 데뷔 첫 안타가 나온 것은 1-5로 끌려가던 4회말 두 번째 타석. 선두타자 유승안이 볼넷을 골라나가자 백인천은 좌전안타로 무사 1·3루 찬스를 연결했다. 여기서 이종도의 2루수 앞 땅볼로 추가 점수를 얻었다.

 

감을 잡은 백인천은 3-7로 뒤진 6회말 좌중간 솔로홈런을 때리며 KBO리그 무대 첫 홈런을 신고했다. 이를 발판으로 7회말 유승안이 7-7 동점을 이루는 3점홈런을 터뜨렸다. 그리고 7-7 동점에서 진행된 연장 10회말 이종도가 만루홈런을 날리면서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끝내기 승부를 만들었다.

 

3타수 2안타. 백인천의 4할 타율 전설이 시작된 지점이다.

 

백인천은 개막 이튿날인 3월 28일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타율은 0.500(6타수 3안타).

 

그러나 세 번째 경기인 3월 31일 광주 해태전에서 3타수 무안타로 타율이 0.333(9타수 3안타)로 떨어졌다. 다음 경기인 4월 4일 청주 OB전에서 3타수 1안타로 타율은 그대로 0.333. 백인천이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내려온 2경기였다.

 

시즌 끝까지 ‘꿈같은 4할 레이스’

 

백인천은 4월 5일 청주 OB전에서 2루타 2개를 포함해 3타수 3안타를 때리며 타율을 다시 4할대(0.467)로 끌어올렸다. 시즌 5번째 경기였다. 이때부터 시즌 끝까지 단 한 번도 3할대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소수점 이하 첫 번째 자리는 항상 ‘4’로 고정됐다.

 

당시는 팀당 전·후기리그 40경기씩, 총 80경기(전기리그 40경기, 후기리그 40경기)를 치렀다. 최종전을 앞두고 백인천은 0.409(247타수 101안타)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유백만 코치가 4할대 타율을 언급하며 마지막 경기 결장을 권유했지만, 백인천은 10월 14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삼성전)에 선발출장했다. 그리곤 첫 타석과 마지막 타석에서 아예 안타를 때려버렸다. 3타수 2안타. 첫 시즌을 타율 0.412(250타수 103안타)로 마무리했다. 일본프로야구 타격왕에 이어 한국프로야구에서도 타격왕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원년의 출루율 0.502와 장타율 0.740도 압도적이었다. 훗날 출루율은 롯데 외국인타자 펠릭스 호세(2001년 0.503), 장타율은 NC 외국인타자 에릭 테임즈(2015년 0.790)에게 1위 자리를 내줬지만, 한동안 KBO 연감 최상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년 홈런 부문에서는 19개로 김봉연(22홈런)에 이어 2위에 올랐고, 타점 역시 해태 김성한(69타점)에 5개 부족한 64타점으로 2위에 랭크됐다. 불혹의 나이에 도루도 11개나 기록했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양 팔꿈치가 닿을 듯 양 팔을 잔뜩 오므린 자세. 파워포지션에서 히팅포인트까지 최단거리로 내리찍는 타격. 나이가 무색하게 탄탄한 몸매와 튼튼한 체력. 3타수 1안타를 치면 타율이 내려가는 압박감과 부담감.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원년의 백인천은 ‘타격의 신’ 그 자체였다.

 

스케이트와 야구 천재…일본프로야구 진출 ‘새 역사’

 

백인천은 호적상으로는 1943년 평안북도 철산 출생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1942년 중국 우시에서 3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당시 이곳에서 극단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평북 철산으로 돌아온 백인천 가족은 한국전쟁 직전에 서울로 내려왔다.

 

백인천은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에 만능이었다. 야구뿐만 아니라 육상과 스케이트에서도 발군이었다. 경동고 3학년 때 일본 가루자와 세계빙상선수권대회에 파견할 대표 선발전에서 500m와 1500m에서 우승하기도 할 정도였다. 백인천은 “스케이트를 탄 덕분에 하체가 튼튼해져 야구선수로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돌이켰다.

 

▲ 경동고등학교 시절의 백인천 / MK 스포츠

 

백인천은 경동고 시절 포수이자 강타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원자탄 투수’로 불린 이재환과 배터리를 이루며 ‘경동고 전성시대’를 열었다.

 

2학년 때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고, 3학년 시절이던 1960년 해방 후 한국 고교생으로는 최초로 서울운동장(동대문구장)에서 홈런을 때려내 화제를 모았다. 백인천을 앞세운 경동고는 그해 무려 32연승 2무승부 무패 신화를 썼다.

 

1960년 10월에 일본학생야구협회 초청으로 경동고가 한국 고교팀 최초로 일본 원정에 나섰을 때, 백인천은 홈런 2방을 날려 일본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농업은행(농협)에 입단한 백인천은 1962년 1월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 필리핀전에서 비바람과 역풍을 뚫고 좌월 2점홈런을 날렸다. 베스트9에도 뽑혔다.

 

당시는 대만과 한국 비행기 직항로가 개설되지 않았던 시절. 준우승으로 대회를 마친 한국 대표팀은 일본 도쿄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틀간 도쿄에서 묵는 일정. 이것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이때 도에이 플라이어스(닛폰햄 파이터스 전신) 구단이 최태환 재일한국인야구협회 부회장을 통해 백인천과 접선했다. 여기서 백인천은 도에이 구단과 가계약을 하게 된다. 한신과 다이마이 구단에서도 백인천에게 눈독을 들였지만 도에이가 먼저 낚아챘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백인천은 척박한 한국야구 주머니에서 솟아난 송곳이었다. 그물을 찢고 누구도 가지 않은 길에 도전장을 던졌다.

 

일본프로야구 타격왕…200홈런-200도루 호타준족

 

백인천은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국내에서 성장한 선수 중 해외 프로 구단과 정식계약한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말하자면 ‘한국 스포츠 선수 수출 1호’라는 역사를 쓴 셈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도 이뤄지기 전. ‘일본으로 보내야한다, 말아야한다’를 놓고 찬반양론이 일었다. 여론조사까지 벌일 정도로 백인천의 일본행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빅이슈가 됐다. 5·16 군사정변이 막 일어난 시점이라 군 미필 선수의 해외 진출 역시 당시로선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 시절의 백인천 / MK스포츠

 

결국 대한체육회와 문교부가 조건부 승인을 하면서 백인천은 재일교포 장훈이 뛰던 도에이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2군에서 시작한 백인천은 일기장에 ‘1군 선수로 뛰지 못하면 죽어도 귀국하지 않는다’고 혈서를 쓴 뒤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야구 중독’, ‘혼의 야구’로 일컬어지는 백인천 야구의 밑바탕은 그때 만들어졌다.

 

▲ 1975년 10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 한국 실업선발과 일본 프로야구팀 초청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에 백인천(다이헤이요 라이온스)과 장훈(니혼햄 파이터스) 선수가 참석했다 / 사진작가 전민조

 

백인천은 1962년 1군 무대에 올라 19년간 살아남았다. 그 사이 1975년 다이헤이요 라이온스(세이부 전신) 시절 0.319의 타율로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롯데 오리온스 시절 1979년엔 0.340의 고타율로 타격 4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 일본 야구인 골프대회에서도 우숭한  백인천 / MK스포츠

 

타율 관리? 오히려 저평가된 원년 4할

 

백인천은 원년 팀의 80경기 중 71경기에 출장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자신이 감독이니 ‘타율 관리’를 했다”는 근거 없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백인천이 원년에 실제로 결장한 경기수는 3경기에 불과했다. 나머지 6경기는 몰수게임과 관련이 있다.

 

8월 26일 대구 삼성전에서 4회말 김인식을 퇴장시킨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선수단을 철수시키며 항의를 했다. 그러자 심판이 MBC에 몰수게임 패배를 선언했다. KBO는 상벌위원회를 열고 백인천에게 5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다. 여기에 5회 이전에 선언된 몰수게임은 팀과 개인기록을 무효화한다는 규정에 따라 백인천의 8월 26일 출장도 없어졌다. 그날 4회까지 기록한 2타수 1안타 기록도 날아갔다.

 

타율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시즌 막판 결장하는 게임이 있어야하는데, 백인천은 몰수게임 징계 이후 MBC의 잔여 14경기에 모두 선발출장했다.

 

“치기 까다로운 투수는 회피했다”는 말도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가깝다. 원년 최고투수 OB 박철순을 상대로 17타수 7안타(0.412)를 때려냈고, 원년 다승 10위에 포함된 투수를 상대로도 0.376(109타수 41안타)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오히려 승부를 회피하고 싶은 쪽은 백인천이 아니라 투수들이었다.

 

MBC 청룡 원년 멤버였던 김인식(현 연천 미라클 감독)은 “감독이었기 때문에 4할이 더 쉬웠던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1인 2역을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서 4할을 달성했다는 뜻이었다. “감독님은 한국에 와서 절대 야구를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야구에 미친 사람이었다. 더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한데 오히려 저평가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백인천이 4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타율 관리’보다 당시 일본프로야구와 한국프로야구의 수준 차, 선수층, 적은 경기수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4할은 KBO리그의 위대한 유산

 

메이저리그에서는 1941년 테드 윌리엄스가 0.406을 기록한 뒤 4할 타자가 멸종됐고,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역사상 4할을 기록한 타자가 전무하다. 다시 말해 백인천은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마지막 4할 타자인 셈이다.

 

KBO리그에서도 여러 선수가 4할에 도전했지만 끝내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해태 이종범은 팀당 126경씩 치르던 1994년 팀의 104경기까지 4할대 타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최종 타율 0.393으로 마무리했다. 2012년 한화 김태균은 89경기, 2021년 kt 강백호는 팀의 82경기까지 4할 고지를 밟고 있었지만 실패했다.

 

모든 게 엉성했던 그 시절, 백인천은 일본프로야구에서 20년간 갈고닦은 타격의 기술, 프로 선수로서 훈련법, 경기전 준비, 장기레이스 운영과 체력관리, 자기관리 등을 몸소 보여줬다. 이런 부분은 KBO리그 역사를 볼 때 0.412라는 숫자를 넘어서는 가치였다.

 

무엇보다 백인천은 원년에 마흔 살에도 불구하고 타격 후 한 순간도 느슨하게 달린 적이 없었다. 전력질주야말로 프로 선수가 갖춰야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조롱과 멸시 속에 생존을 건 사투. 일본에서 20년을 버텨온 백인천이 사는 법이었다.

 

백인천은 1983년 삼미로 이적해 1984년을 끝으로 선수로서 유니폼을 벗었다. 야구계를 떠나 사업을 하며 야인으로 지내던 백인천은 1989년 말 MBC 청룡 감독으로 컴백했다. 곧바로 럭키금성그룹이 MBC 구단을 인수하면서 LG 창단 감독이 된 백인천은 페넌트레이스 1위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을 4승무패로 격파하며 완전무결한 우승을 지휘했다. 청룡은 한 번도 승천하지 못하고 팬들과 작별했지만, 트윈스는 출발부터 우승으로 새 역사를 시작했다.

 

그는 삼성 감독(1996~1997년)과 롯데 감독(2002~2003년)을 끝으로 영욕이 점철된 그라운드에서 물러났다.

 

▲ LG 트윈스 창단 첫 우승을 이끈 백인천 감독 / 사진출처=KBO

 

▲ 백인천의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 사진출처=KBO

 

‘노력자애’ 그리고 후배들을 향한 응원

 

백인천은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할 때부터 ‘노력자애(努力自愛)’를 금과옥조로 삼아온 인물이다. 자신의 자서전 제목도 ‘백인천의 노력자애’였다.

 

그는 “이 말에는 스스로 노력하는 일을 사랑해야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상 모든 일은 중독되어서 하면 이룰 수 있다. 나는 그걸 야구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다.

 

▲ 본인보다 더 훌륭한 기록을 세울 선수가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 / 사진출처=KBO

 

어쩌면 우리가 백인천이라는 위대한 선수를 만났기에 감사하고, 그와 함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기에 영광이었는지 모른다. 백인천이 원년에 4할을 기록한 것은 한국프로야구의 출발에 맞춰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이자 행운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4할 타자를 구경도 할 수 없었고, 영원히 보유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일본에서 뛸 때 한국에 프로야구가 없다고 무시를 많이 당했는데 1982년에 프로야구가 생겼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고, 팬들도 프로야구를 정말 좋아하고 응원을 해주셔서 한국프로야구가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백인천은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다음 세대가 만들어갈 새로운 40년의 야구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요즘 젊은 선수들 중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아요.

내 기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선수들이 나와 나보다 더 좋은 기록을 세웠으면 좋겠어요."

 

이재국 야구전문기자 / 스포팅제국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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